최대 노력으로 최소 만족 '그 바보스런 매력'


고전음악·여행·종교 등 내 문학의 자양분 역할
그리고 그뒤엔 사랑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힘든 물음 가운데서도 힘든 물음이다. 생각해 본다. 나는 왜 문학을 안 하곤 못 배기는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혹은 자신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라는 식의 명쾌한 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혹은 삶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런 건 너무 큰 목표이다.

 

너도 나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것을 획득하려 정신없이 뛰고 있는 이 세상에서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것을 얻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문학의 바보스러움이 지닌 매력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게 정직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얼마 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글 쓰는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들의 조합이 황홀을 낳는 것에 끌렸고, 그 황홀 속에 녹아 나는 삶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가 호기심이 꽤 많은 인간이긴 했다. 전방위(全方位)가 호기심의 특성이라 빠진 골목도 여럿 있다. 더러는 한참 헤매다가 나온 곳도 있지만, 문학 골목만은 한번 들어간 후 지금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확인한 것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하마터면 음악 골목에 빠져 평생 헤맬 뻔한 적도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2 때 시각적 즐거움이 거의 삭제된 상태였던 한국전쟁의 폐허 서울에서 나는 음악실 르네상스와 돌체에 다니며 청각의 황홀을 만들어 주는 고전음악을 발견했고, 음악을 생의 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

 

작곡가가 되는 일 이외의 모든 일이 우습게 보였고 대학도 당연히 음악대학 작곡과로 잡았던 것이다. 독학으로 화성학 책도 뒤적이던 나는 얼마 후 친구 마종기와 함께 음악회에 갔다가 연주회장을 나오며 방금 들은 곡을 같이 휘파람으로 불다가 자신이 약간의 발성 음치인 것을 알게 돼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음악은 업(業)은 아니지만 지병(持病)이 되었다.

 

전세방을 돌아다닐 때도 무거운 음향기기를 둘러메고 다녔고 가난 속에서도 기기를 바꾸고 판을 샀다. 바로 몇 달 전에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의 구조를 캐기 위해 여러 4중주단의 연주로 작품번호 127로 시작되는 4중주 다섯 곡과 ‘대둔주곡’만을 들으며 3개월을 보낸 적도 있다.

 

그런 노력을 들이고도 구조를 캤다고 할 수는 없고, 다만 린지 4중주단과 베그 4중주단 연주의 아름다움을 재확인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베토벤 연주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베토벤을 좋아하는 것이다.

 

유행가요를 잘 몰라 노래방에서 기죽게 만드는 일을 빼더라도 고전음악이 내 삶과 문학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초기에는 리듬의 변화를 위해 작품을 음악의 악장들처럼 번호를 매겨 나누기도 했고, 최근에는 작품 이름을 그대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빌 에반스가 내 시 속에 들어온 것을 보니 재즈도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음악의 영향은 악장 흉내나 곡 이름 등장에 그치지 않는다.

 

그 동안 나는 좋은 그림과 조각과 건물에서도 음악의 혼을 느끼곤 했다. 내 문학은 실제 삶과 음악 사이의 주고받음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문학의 출발이지만 시가 음악의 혼에 접근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었다. 음악이 나를 끈 구체적 동기는 문학처럼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된 오늘날 고전 음악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서 호기심이 나를 끌어들인 골목이 여행이다. 요즘처럼 관광여행이 생기기 전의 일이라 가는 일도 먹는 일도 자는 일도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여행이었다. 때로는 돈을 주고도 곡식을 구할 수 없어서 쌀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곳도 있었고, 여인숙이라는 것도 전기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두 방 사이를 막은 칸막이 위쪽을 트고 전구 하나를 달아놓았기 때문에 코고는 소리와 잠꼬대가 그대로 들리는 잠을 자야 했다.

 

여수에서 통통배를 타고 남해와 통영을 들려 부산으로 간 여행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당시 폐허의 본체가 그대로 남아있는 서울과는 달리 한려수도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여행하기 전 통영에 사는 학교 친구를 집에 불러 대접하고 그의 집을 찾아갔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나 워낙 가난할 때라 당도한 날 저녁 나를 집에 데려왔다고 그가 어머니한테 야단맞는 것을 몰래 엿듣고 괴로웠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통영을 뜰 수밖에.

 

나를 여행 시인이라 부르는 분들도 있으나 나는 시를 쓰려고 여행을 떠난 적도 없고 여행지의 풍물을 그리기 위해 시를 쓴 적도 없다. 끝난 여행은 무의식의 곳간이나 추억 속에 방치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썼을 뿐이다. 예를 들면 ‘기항지’에 나오는 겨울 항구는 몇 번에 걸쳐 만난 남해안의 몇몇 항구들을 합성해서 하나로 만든 것이다.

 

여행에 끌린 것이 물론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겠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것을 얻는 바보스러움의 쾌감도 상당히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여행하며 즐긴 일보다는 고생한 일이 더 유쾌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때문에 나는 ‘네가 못한 여행을 하며 이렇게 즐겼다, 부럽지?’ 하는 자의식 없이 마음 놓고 여행을 시에 이끌어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볼만한 곳 치고 안 가본 데가 별로 없다는 허영마저 가지게 된 지금 그 무엇보다 가보고 싶은 곳은 예전에 들러 본, 지도에는 있으나 사라진 마을들이다. 어떤 곳은 빈집들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종교도 복을 빌거나 천국에 가려는 마음으로 빠져본 적은 없다. 원래 기독교 집안이어서 성경을 읽은 것이 문학에 도움됐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님의 반 강요로 청량리에 사는 한 장로님이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보는 모임에 한 일년 참석한 일이었다.

 

당사자들은 원시교회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즈음으로 말하면 ‘휴거’ 교회에 가까운 것이었다. 예수의 재림이 매 주일 한 걸음씩 다가오는 긴박감이 예배를 지배하곤 했으나 나는 예언서의 치열함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 후에는 그나마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다. 대학에 와서는 니체에 경도되기도 하고 이십년 전부터는 책을 통해 선불교에 빠지게 되었다. 깨달음이란 결국 용맹정진의 ‘스토이시즘’에서 해탈의 ‘에피큐리어니즘’으로 넘어가는 순간일 것이다.

 

서양의 이 두 사생관을 한 줄에 꿰고 있는 것이 선의 매력이다. 그러나 책으로 배우는 선은 백 권을 읽어봐야 한번의 용맹정진의 성취보다 못하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 나 자신 깨친 자이기는커녕 불교도라고 치부한 적도 없다. 다만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들을 즐기며 계속 일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려는 극락이나 천당에 대한 욕망이 대표하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을 잠시 제쳐놓고 종교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생각해보면, 종교도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것을 얻는 장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와 선불교가 내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에는 도그마를 잠시 옆에 제쳐놓은 예수와 불타가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연작시로 쓰기도 했다. 그 대화 속에서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점차 설 자리가 좁아지는 고전음악, 관광여행이 아닌 진짜 여행, 기복신앙을 제쳐놓은 종교, 이들 모두 인간의 무상(無償)의 행위를 아우라로 지닌 것들이다. 무상의 행위가 아니더라도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것을 얻는 행위들이고, 자연스레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를 받쳐주는 행위들이다.

 

그 뿐일까. 아니, 그들 뒤에 무엇인가가 있다. 내 문학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초기의 ‘즐거운 편지’부터 ‘태평가’ ‘초가(楚歌)’ ‘1998년 5월의 문답’ ‘쨍한 사랑노래’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초고들까지 내 문학은 인간으로서 애인 혹은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사랑의 견딤과 포용의 환희와 막막함으로 차있다.

 


내가 좋아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런데 사랑 또한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것을 얻는 인간의 어수룩함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