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인 고3 학생 중 생물학과에 진학을 원하는 이과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어를 무척 못한다고 기가 죽어 있습니다. 비문학 글은 좀 읽어내는데 문학은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럴만합니다. 어휘가  약하고 글의 이면을 읽어내는 연습이 부족합니다. “국어가 제일 싫어요, 특히 문학은 하나도 모르겠어요.” 하는 녀석입니다. 중간고사 대비 공부를 점검하다가 과학 시험 범위를 물었더니 미토콘드리아 호흡이라고 합니다. 저는 미토콘드리아란 말이 반가워서 더 자세히 묻다가 그렇게 중요한 걸 배우고 있다니, 아예 다음 수업 시간에 발표를 준비해 오라고 했습니다. 5분 동안 핵심만 외워 칠판에 써서 발표하라고 박자세 식으로 주문을 했습니다.

 

학생은 다음 시간에 미토콘드리아의 호흡 3단계를 해당과정, TCA회로, 전자전달계 순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중 TCA회로는 박자세 천뇌 발표에서도 들었던 터라 익숙했습니다. 국어 선생이 내 주는 과학 과제를 어찌나 충실하게 준비해 왔던지 발표를 끊지 못하고 20분이나 들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100년 사이에 알게 된 인류 최고 지식 중 한 부분을 정말 훌륭하게 설명했다고 박수를 치며 칭찬해 주었습니다. 녀석은 수업 중 항상 말끝을 흐리며 웅얼거려서 제가 자주 지적을 했는데 이제는 제가 주문하지 않아도 큰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을 합니다. 게다가 싱긋 웃기도 합니다.

 

발표를 보며 교과서의 유용성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지만 꼭 필요한 지식이 집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대체로 교과 지식에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시험 위주의 교수법이나 자발성의 유무도 문제의 원인이겠지만 자신이 배우는 지식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학생들은 지식을 종횡으로 연결하지 못합니다 구조적 사고의 부재 때문입니다. 여러 분야의 지식을 횡으로 확장하고, 종으로 심화하는 구조적 사고의 훈련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식과 지식뿐 아니라 지식과 현실은 연계되지 않고 단절되어  버립니다. 교실에서 나가면 일상용어에 물들어서 배운 것을 더 생각하지 않고 시험이 끝나면 싹 잊어버립니다. 얼마나 중요한 지식을 배우고 있는지 여실히 알고 그 의미를 연결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당분간 이 여학생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도 국어 시간에 생물 발표를 병행 해야겠습니다. 생물학의 내용으로 시를 쓰게 만드는 것, 세상을 통합해서 바라보는 힘을 키우는 것이 제 공부와 수업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불편한 생각이 하나 떠오르네요. 저는 박자세를 스승과 도반으로서 오래 전에 만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데, 학생들에게 저는 나중에 만날수록 도움이 되는 선생이라는 점. 제자들이 이걸 몰라서 다행입니다. 혹여 눈치 채더라도 덜 부끄럽게 부단히 공부해야겠지요.

 

* 시험기간이면 시험과 관련 없는 다른 책이 더 잘 읽히는 심리는 모두 경험해 보셨지요. 제가 그렇습니다. 개구리소년님의 의견에 답글을 고민하던 중 누룽지 전법으로 딴소리 하며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