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가 겹쳐 학습탐사를 함께 못함을 아쉬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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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이병한 선생님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로마와 몽골의 후계자 오스만은 왜 몰락했나?

[유라시아 견문] 몽골의 후신 : 대청제국과 오스만제국

 

포스트 몽골 시대


베이징에서 하노이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몽골에서 베트남까지, 북방에서 남방으로, 동아시아를 종단하는 셈이다. 그 길은 정확하게 몽골족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하노이에는 몽골군에 맞서 승리했던 쩐흥다오(Trần Hưng Ðạo)를 기리는 유적이 여럿이다. 이순신에 빗댈 만한 성웅으로 높이 떠받는다. 헌데 이 길이 옛 길만은 아닐 것 같다. 지금은 장장 이틀이 걸리는 여정이지만, 고속철이 완성되면 한나절로 줄어든다고 한다. 동북아와 동남아가 하나의 생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중국의 一帶一路(일대일로) 프로젝트가 구현해갈 미래상 또한 점점 더 몽골세계제국의 그것과 겹쳐 보인다. 왕년의 역참제가 고속철과 고속도로, 인터넷으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포스트 몽골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세기 이래 서구의 굴기는 그야말로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단막극이었다는 실감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중화 세계에서 만다라 세계로 남하하면서 대륙의 풍경은 다채롭게 변주되었다. 풍광만은 미국도 못지않다. 장쾌하고 수려하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동방에는 저 풍경 사이로 人文(인문)이 켜켜이 쌓여 있다. 자연사와 인류사가 포개져 있다. '구대륙'이 보유한 위대한 유산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500년에 새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유럽의 근대'가 돌출하기 이전의 '유라시아의 초기 근대'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몽골세계제국이 중요한 것은 13세기에 유라시아 전역을 통합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그 이후에도 세계 각지마다 몽골의 유산을 남겨두었다는 점이 관건이다.

실제로 유라시아 각지의 후계 정권들은 칭기즈칸 이래의 혈통과 전통을 존중하고 몽골적 요소를 계승했다. 무엇보다 광역적 통합(=제국)의 지향이 지속되었다. 물론 장소마다 그 역사적 실상에는 층차가 있었다. 대별하자면,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나눌 수 있겠다.

서유라시아와 동유라시아

서유라시아에서 몽골의 유산은 이슬람과 혼합되었다. 아랍인의 이슬람 또한 광역적 통합망을 구축하는 또 하나의 보편적 기획이었다. 그 이슬람의 소프트웨어가 몽골세계제국의 하드웨어와 결합함으로써 페르시아어를 보편어로 삼는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성장해 간 것이다. 이 페르시아 문화권은 몽골과 이슬람이라는 양대 보편성의 통섭이었다. 남아시아에서 굴기한 '무굴'제국(16~19세기)이 상징적이다. '몽골'의 후예이자, 이슬람제국이었다.

헌데 서유라시아에는 또 하나의 보편적 기획이 있었다. 로마이다. 흔히 로마라고 하면 그리스-로마를 떠올린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근대 서구로 계승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모자란 진술이다. 그게 또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근대 역사학이 주조해낸 편향된 '신화'에 가깝다. 역사 쓰기는 늘 기록이자 망각인 법이다.

실제로는 로마의 유산은 크게 셋으로 갈라졌다. 서로마의 후계자인 서유럽, 로마제국의 정통이었던 동유럽, 그리고 동구의 영토를 점점 잠식해간 이슬람. 즉 서구의 가톨릭적 로마, 동구의 정교적 로마, 서아시아의 이슬람적 로마로 삼분되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3번째, 즉 이슬람적 로마가 몽골의 유산과 결합해갔다.

동유라시아는 어떠했나. 동유라시아의 몽골은 라마 불교와 결합했다. 서유라시아의 이슬람에 빗댈 수 있겠다. 그러나 비슷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은 전혀 달랐다. 우선 인접하는 한자 및 유교 문명과는 융합이 덜했다. 몽골세계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명나라는 몽골적 요소를 배제하고, 주자학과 화이질서라는 전통적 유교 이념을 체제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조선과 류큐 등 호응하는 국가도 있었지만, 다수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즉 동유라시아에는 서유라시아가 공유했던 '로마'의 유산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서북의 몽골, 티베트 권역과 동남부의 한자 및 유교 문명권이 근 300년간 분립하는 형태가 이어졌다. 두 개의 보편성이 일체화되기보다는 병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포스트 몽골 시대,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최대치의 통합을 실현했던 두 제국, 오스만제국과 대청제국의 구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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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로 입성하는 마호메트2세. ⓒwikipedia.org



오스만제국과 대청제국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이슬람의 칼리프였고, 유목민의 지도자인 대칸이었으며, 동로마제국의 후계자인 황제이기도 했다. 몽골과 결합한 이슬람적 로마가 발칸반도 동쪽의 정교적 로마까지 통합한 구조였다. 몽골+이슬람+로마라는 중층적 보편성을 실현한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광대한 영역을 600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다.

그에 견주어 대청제국은 몽골+라마 불교+한자 및 유교 문명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라마 불교와 일체화된 만주족의 대칸이 한자 문명권의 천자도 겸직한 꼴이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었다. 양 제국 공히 '중층적 보편성'을 구현했으되, 그 중층의 구체적 실상은 동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스만의 경우에는 융합이고 혼종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군주는 무슬림 신민에는 술탄이요 칼리프이고, 정교도 주민에게는 로마 황제라는 식으로 개별적이지 않았다. 어느 쪽에 대해서도 술탄이자 대칸이며 황제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슬람의 법제부터 이교도를 포용하는 유연성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기독교도를 통치하는 별개의 속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슬람 군주가 이교도를 지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란 이 오스만적 보편성이 해체되고 만 20세기의 '발명'이자 '창조된 전통'에 가깝다.

오스만제국 아래 살아가는 다양한 신민들은 그 종교나 속성에 따라 거주지를 따로 하지도 않았다. 모자이크처럼 지리적 혼주가 일상적이었기에 지역별로 통치 방식을 달리할 이유가 없었다. 주민들은 제각기 오스만 군주의 정체성을 각자 해석하고 수용하면 그만이었다. 정교도라면 '로마 황제'라는 감각이 강했을 것이고, 무슬림이라면 술탄과 칼리프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며, 동부의 유목민들은 몽골과 투르크를 계승한 대칸의 측면을 주목했을 것이다.

그에 반하여 대청제국은 개별적이고 이질적인 보편성을 구사했다. 오스만과 같은 융합과 혼종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리장성의 북쪽과 감숙성과 사천성 서쪽으로는 라마 불교와 일체화된 몽골 기원의 유목적 전통 위에 군림했다. 그곳에는 유교는 물론 한자마저 침투하지 않았다. 만리장성 이남은 별 세계였다. 유교 사상과 화이질서가 그대로 온존했다. 오스만제국이 용광로(Melting Port)였다면, 대청제국은 샐러드 접시(Salad Bowl)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러한 양 제국의 차이는 20세기 국민 국가로의 이행과 그 궤적이 상이해지는 바탕이 되었다.

서구의 충격, 일본의 충격

유라시아에서 중층적 보편성을 구현했던 양대 제국과 유독 동떨어진 지역이 있었다. 서유라시아에서는 서유럽이었고, 동유라시아에서는 일본이었다. 유라시아의 초기 근대를 해체해가는 20세기의 주역들이었다.

서유럽의 기원은 샤를마뉴의 서로마제국 부흥과 가톨릭의 자립에 있다. 서유럽도 로마성을 분점했다는 점에서 동유럽이나 서아시아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샤를마뉴 제국=가톨릭 권역은 그 협소한 범위 안에서 왕후와 교회가 분립하여 분쟁을 거듭하는 예외적 역사를 밟았다. 소위 '서양사'의 전개이다. 몽골세계제국이 구축한 보편성의 사례를 제대로 입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기독교-이슬람 전쟁)과 종교 전쟁(신-구교 전쟁)을 경유하여 국가 간 체제를 산출했다. 베스트팔렌 체제라는 것도 가톨릭 세계의 내부에서 신교-구교 간 왕후의 상호 관계를 재규정하는 것에 그쳤다. 루이 14세의 공언처럼 '짐(군주)이 곧 국가'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예외적이고 국지적인 체제가 19세기 산업혁명을 엔진으로 삼아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유라시아의 한 귀퉁이에서나 통용되던 관념과 법제, 행동 양식(=외교)이 압도적 무력을 내세워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어간 것이다. 유라시아의 보편 제국들이 유럽형 국민 국가들로 쪼개져갔다. '장기 20세기' 혹은 '단기 근대'였다.

굴기한 서유럽은 무엇보다 이웃한 오스만제국이 향유했던 '로마성'부터 강탈했다. 그래야 서유럽이 진정한 로마의 후예라는 대서사, '서양사'가 구축될 수 있었다. 서구 열강이 점점 더 정교적 로마의 동유럽으로 진입해 감으로써, 오스만은 갈수록 '이슬람 국가', 나아가 '투르크 국가'로 축소, 순화되어갔다. 달리 말해 '비로마화', '비문명화', '아시아화'가 전개된 것이다.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의 구축이다.

이렇게 '이슬람적 로마'를 체계적으로 부정해 감으로써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도 로마성을 박탈당한 '투르크'를 타자로 여기게 되었다. 스스로를 로마=비잔틴의 후계자로 여기며 고토(故土)를 회복해야겠다는 '민족의식'도 촉발되었다. 민족 문학, 민족 사학, 민족 자결주의가 들불처럼 번졌다. 그럼으로써 중층적 보편성을 구현했던 오스만제국은 산산이 쪼개지고, 동유럽과 중동 또한 국가 간 체제로 재편되었다. 신앙 공동체(신정국가)와 신념 공동체(민족국가) 간의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여 100년이 넘는 전국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 난세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반면 동아시아에서 서유럽을 대체한 것은 중화 세계의 외부에서 '쇄국' 상태로 있었던 일본이었다. 일본의 위치와 역할은 실로 특이했다. 문자 생활 면에서는 한자권에 속해 있으되, 대청제국이 구현한 중층적 보편 세계에는 귀속되지 않았다. 일상생활부터 집단의 조직 방식, 대외 관계에 이르기까지 공통점이 무척 드물었다.

유학을 정치,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삼지도 않았을 뿐더러, 번부나 조공, 호시 등을 통하여 중화 세계에 정식으로 편입되어 있지도 않았다. 몽골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유목 문명과도 무연했으며, 라마 불교도 신봉하지 않았다. 일종의 국외자였던 것이다. 19세기까지도 '만세일계'의 천황이 존재하고,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무사 정권'이 존속했다는 예외성이 상징적이라고 하겠다. '한-중-일'을 동아시아로 묶는 관습적 발상 또한 20세기 '東亞'(동아)의 흔적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과연 서구와 유사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래 더욱더 서구와 근사(近似)해졌다. 근대화/서구화의 선봉으로서 일본은 중화 세계와 대치하고 적대했다. 특히 서구에 근사하면서도 한자를 사용한다는 이중적 위치가 중화 세계를 내파해가는 주체로 등극시켰다. '독립', '문명', '개화', '중화주의' 등 번역과 오역과 창조의 주체였다.

하여 19세기 말 이래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갈등 또한 단순히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의 지정학적 갈등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그 심층에서 유럽과 이슬람 사이의 '문명의 충돌'과도 유사한 면모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즉 몽골세계제국이 구축했던 보편성의 안과 밖, 유라시아의 내부와 외부가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서역(西域)과 서부(西部)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제국은 파산했다. 국민 국가로의 이행에 실패했다. 투르크의 국가, 터키로 쪼그라들었다. 그럼으로써 무수한 국민 국가들이 파편처럼 파생했다. 발칸과 중동 문제의 기원이다.

반면 대청제국의 경로는 달랐다.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행했다. 성공했다기보다는 실패하지 않았다. 외몽골의 독립과 대만(타이완)의 미수복을 제외하면 대청제국이 거의 계승되었다. '제국의 근대화'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고쳐 말하면 중층적 보편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제국성을 속 깊이 품고 있다.

건국 60주년을 지나 들어선 시진핑 체제가 '일대일로'를 국책으로 내세운 점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再活(재활)을 마치고 再起(재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면 中興(중흥)의 모색이다. 중국의 부상이 유라시아의 동반 성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북아시아가 공히 꿈틀거린다.

과연 포스트 몽골 시대는 여태 저물지 않았다. 커녕 포스트 서구 시대의 유력한 대안으로 점점 더 각광받게 될 공산이 크다. 중국의 서부, 왕년의 서역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20세기 '국가의 변경'이었던 장소들이 21세기 '제국의 관문'으로 뒤바뀌고 있다. 일대일로의 출발점이자,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고 있다.

중국이 '中國'이 될 것인가의 여부 또한 서부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하기에 올해 하반기는 중국 서부에 가기로 한다. 그곳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는 西遊記(서유기)의 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이병한 /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