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영화 <동주>를 보러 갔다. 영화는 시 한 편에 부끄러움 하나씩을 엮었다. 흑백화면을 동주의 부끄러움이 붉게 물들였다. 나의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고 난 후 질문 하나가 남았다.
‘우리가 마시는 산소 대부분이 암석에서 나온다는 걸 모르고……’
얼마 전, 박자세 홈페이지에 올렸던 댓글이다. 잘못 썼다는 지적을 받고 바로 내렸다. 수정해서 쓸 수도 있었지만 문장 자체를 지웠다.
게시판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머릿속까지 비워진 건 아니었다. 창피함 때문에 몸이 달아올랐다.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왜 썼을까, 성급했던 것을 후회했고, 지금까지 왜 알지 못했을까, 무지했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실체 없는 손가락질과 비웃음이 며칠을 따라다녔다.
박자세에 들어온 뒤로 매일 나의 무식함을 깨닫는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그 조금 아는 것도 제대로 된 게 없다. 꽤 많이 집어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은 것처럼 텅 비어 있다.
어제는 최재천 교수와 이규태 칼럼을 몰라 박사님의 놀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내가 또 뭘 놓치고 살았나. 집에 돌아와 최재천 교수의 강의 동영상을 봤다. 도입부를 조금 들으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몇 년 전, 탐욕스럽게 교양 강의를 찾아서 봤는데 그때 본 영상 중 하나였다.
이규태 칼럼도 마찬가지다. 대학교 때 ‘사설과 칼럼’이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분명히 읽었을 텐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설과 칼럼’은 글 잘 쓰는 선배가 부러워 따라 들었던 수업이었다. 어떤 내용의 칼럼을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고, 매주 있는 글쓰기 과제 압박에 수강 신청을 한 내 손을 원망했던 것만 생각난다.
필독 도서 목록을 따라 샀으나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 찬 책장.
맥락 없이 모으기만 하다 그만둔 자료 스크랩.
스펙에 도움이 된다는 카더라 통신에 휘둘려 했던 자질구레한 공부 이것저것.
실 없는 구슬들이 집 안 여기저기에, 머릿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독에 밑이 빠진 이유가 있다.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건 따로 있다.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
논어 학이편 16장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남이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뒤에 있는 患不知人也 중에 사림 人을 빼면 이렇게 해석됩니다.
“알지 못함을 근심하라.” 학이편을 보면서 가장 생각해야 할 단어를 患(환)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근심하고 있는가? 공자는 평생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
속에 살았습니다. 많은 나라를 쫓겨다니 듯 주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깨달음은 알지 못함을 근심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생각했다고
느꼈습니다. 때때로 고민하고 근심하는 많은 것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더군요.
학교 다닐 때는 성적을 걱정하고, 여자친구가 없을 때는 여자친구가 없음을 걱정하고,
돈이 없을 때는 돈이 없음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나는 오래가지 못할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티벳 속담 중에 “ 걱정해서 걱정이 사라지면 걱정만 하겠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걱정이라는게 걱정해서 사라질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생이 어차피 고민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오래 할 수 있는 고민을 가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알지 못함을 고민한 공자의 마음은 그를 4대 성인의 자리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오늘도 고민합니다.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