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그는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나는 그저 그런, 그리고 서울 주변을 유영하듯이 떠다니는 이다. 어찌 보면 어디서든 전혀 주인공이 될 만한 소지가 손톱만큼도 없는 평범한 이다. 그냥 어제 일이었다. 서래마을에서 아담한 공간을 계약하기에 거기에 참여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3호선을 타다 옥수역에서 덕소가는 전철로 갈아탔다. 막차여서인지 사람들이 더 몰려서 복잡한듯하다. 젠장할. 할 수 없이 전철 노약자석 자리부근에서 얼쩡이다 빈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다.

 

어찌 보면 이 글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나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이 <뇌속의 신체지도>이다. 집중하여 책을 읽다가 회기역쯤 가니, 웬 풍채 좋은 노인 한 분이 타고서 주인공 앞에 선다. 그 시간에 노약자석은 젊은이들이 모두 앉았지만 술을 먹고서 취한 자세로 졸고 있다. 나는 그다지 특별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먼저 얼른 일어나 앉으라고 자리를 권한다.

 

노신사는 괜찮다고 말한다. 그냥 앉아서 책을 보라고 한다. 지나가는 말투로 노인들이 무조건 양보한 자리에 앉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지 않느냐 라는 식으로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는 도무지 앉을 생각을 안하는 것이었다. 어찌하다보니 이제 책을 읽는 것은 건너간 듯하다. 나이든 어른은 서서 가고, 보다 젊은이가 그 앞에서 앉아 가는 모습은 뭔가 언밸런스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얼른 일어나서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이보슈 젊은이. 내가 나이 몇 살로 보이는 거유”

 

짐짓 아, 이야기가 시작되는군 하고 느낀다. 말이 나오기 전에 그의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정보가 머리에 계속 입력되고 있었다. 술을 제법 한 불그스레한 낯빛과 좋은 기분을 보이는 듯한 푹 젖어있는 눈빛, 손잡이를 잡으면서 차의 출발과 정지에 맞추어 부드럽게 움직이는 몸짓, 그리고 누군가하고 그 기분을 나누었으면 하는듯한 바램의 기운이 자연스레 느껴졌던 것이다. 나도 애써 그런 정보입력을 거부할 필요는 없기에 편하게 그의 흔들리는 공간에 동승하며 흐름을 함께 탄 것이다.

 

그는 단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으며, 비록 뱃살이 나왔지만 탄탄해 보이는 균형잡힌 몸매를 가졌기에 볼수록 긍정적인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노인분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위축된 기운을 별로 느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아마 사회적으로 제법 튼실한 이력을 가진 이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넘치는 기분을 받아줄 대상을 찾는 듯이 주위를 쓱 하니 한 번 보면서, 시선 자세를 사람들에게 쭈왁 돌리다가 다시 정자세로 창문앞에 서기를 몇 번 반복한다.

 

어느새 차는 상봉역을 지나 망우역을 향하고 있다. 그는 결국 자기의 대화상대가 나뿐임을 알았는지 대화를 걸어온 것이다. 선택해야한다. 받아줘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응대해야 하는지. 아마도 다른 때 같았으면 그 경우에 응대함은 전철안에서 일반적인 응대수준으로 함이 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그 때는 자정을 넘긴 막차 안이고, 말을 많이 하여 주위에 곤히 자고 있는 여러 명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전철의 공간을 기준으로 의례적인 말로 응대할 것인가. 아니면 그와의 개별공간으로 들어가 사람 대 사람이 만나는 수준까지 고려하여 말을 붙일 것인가. 그 차이에 따라 나의 공간감각은 현격히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즉 사람은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공간영역에 따라 감각수용이 달라지고, 또 그에 따라 발하는 감정의 때깔도 또한 천차만별로 달라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의 기운도 달리 형성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때까지 자연스레 흐름을 타고 있던 기운에 맡기기로 한 것 같다. 마치 예전에 알고 있던 어른을 만난 기분으로 착실히 응대하였으니 말이다.

 

“ 아, 예. 육십 중반을 넘긴 것 같고, 대략 육십 후반으로 보입니다.”

 

나의 대답을 듣더니, 그의 얼굴이 좀 더 커져 보인다. 흥이 나는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말하기를,

 

“ 의례적인 말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봐요.”

“ 그럼요, 내가 무슨 없는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재차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면서 말을 마치니, 그의 얼굴에는 득의만만한 기색이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매우 기분이 좋았던가 보다. 혼자 느낌으로 그는 말했던 것보다는 나이가 더 많았던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젊게 보인다고 그래서인지, 그는 더욱 흥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그는 이후 십 여분 정도의 거리를 타고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어떨 때는 간을 보면서, 어떤 때는 자기흥에 넘쳐 툭 내뱉듯이, 어떤 때는 제법 대화의 형식을 갖춘 이야기형태로서, 어떤 때는 독백하듯이 말이다. 전체적으로 발화내용과 발화의도는 산만했으나, 이리저리 조각을 꿰매듯이 이어진다. 어쨌든 나는 그의 말과 동작에 계속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으며, 그에 맞는 응대를 하려 애를 쓰고 있는 편이었다.

 

“ 우리나라 노인들은 문제야. 무조건 앉으려고만 하니 말이야.”

“아, 예. 예.”

“나는 말이야. 아예 앉아서 갈 생각을 안해.”

 

이런! 그는 서서 이야기하고 나는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니, 이 대화내용은 그냥 껄끄럽게 다가온다. 그는 젊은이가 굳이 노인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노인들도 서서 가는 것이 일반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째 이야기의 주객이 바뀐듯한 느낌이다.

 

“ 나는 아직도 일하고 있어. 공직 35년을 마치고 민간기업에 취업하여 지금까지 일해오고 있어. 지금 다니는 회사가 대략 150명의 젊은이들이 있는지라,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좀 젊게 살아가.” “ 오늘은 회사에서 매우 좋은 일이 있어서 내가 술 한잔했지. 젊은이가 이해해줘.”

“아, 그렇습니까. 매우 부럽습니다. 건강하게 일하는 것도 나이 들어서는 하나의 행복이 되는 것이지요.”

 

“ 노인들의 복지도 문제있어. 노인들이 종로에 모여 시간만 죽이잖아. 얼마나 많이 복지금을 받을지만 생각하고 말이야. 나는 그게 못마땅해.” “ 난 말이야 아직도 국가가 잘되는 것을 생각해. 아침 6시에 일어나면 말이야, 뉴스를 보지. 그리고 신문을 읽어.”

“아, 대단하십니다.”

 

엥. 이게 뭐지. 이 말은 복지를 줄여야 한다는 논리잖아.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것은 더 늘려야 하는데, 이 분은 왜 그게 못마땅한 것이지. 나는 그 말이 자신이 당당히 일하고 있으며, 이 사회에서 무슨 일인가 기여하고 있기에 나온 생각이리라 정리해 본다. 사실 다른 이들은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젊은이들도 자리가 없어 실업률이 꽤 된다. 어떻게 연배든 분들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말이 매우 상식과 다름을 느껴간다. 아마 패기가 넘쳐서 그럴 것이다. 어쨌든 그의 말은 사회의 괴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개인적 자신감의 표출일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경우는 말하는 사람이 매우 개성이 강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이쿠! 이제 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삑사리가 나게 생긴 것이다. 전철은 어느새 구리를 지나 도농을 향하고 있었다. 망우역에서 구리역까지에는 망우리고개가 있는 얕은 야산자락이 있다. 제법 긴 터널을 지나면서, 그가 자신감과 더불어 무엇인가 젊은이들에게 겸손하게 대하는 대화를 이어가니 점차 우리들의 수작은 터널의 길이만큼 깊어지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터널을 지나자 창가로 불빛들이 띄엄띄엄 나타난다. 전철은 서울이라는 묵직하고 복잡한 곳을 지나 제법 쾌적한 지역을 달리는 듯하자 거침없이 나아간다. 트트트... 아니 특특특인가. 혹 턱턱턱....

 

일단 노신사의 대화에 진지한 응대를 하지만, 주인공의 머리 한 켠으로는 덕소에 내려서 집에 가 읽을 책에 대한 생각도 떠나지 않는다. 좀 전에 보던 <뇌속의 신체지도>의 서문과 목차를 떠올리며, 오늘 밤 어디까지 읽을까 라는 그야말로 단일한 예상으로 머리 한 부분에는 즐거움이 거품일 듯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까지 보던 책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뇌와 몸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기본적인 시각은 뇌가 신경로를 통한 자극을 수용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나, 몸과의 연계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뇌가 몸 전체의 감각을 인지할 지도를 미리 그리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역동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자신의 신체 감각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뇌에게는 자기의 일부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팔다리가 뻗는 공간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에 의해 들려진 도구에 따라 감각영역이 변하게 되고, 따라서 그 공간은 무한대일 수도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길의 곡률 정도에 따라 충격을 느끼는 것도 자동차를 매개로 내 주변을 촉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동차를 매개로 나의 감각공간이 확장되었기에 그에 맞는 뇌의 지도가 그려지고, 그 지도에 따라 뇌가 길의 노선상태를 인지한다는 말이다. 일단 말이 되는 것 같다. 상상컨대 매우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천체 망원경을 사용하면, 즉 그것을 매개로 그것에 보이는 만큼의 공간도 나의 공간영역이 되어 나의 뇌에 맵핑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천체가 인지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일단 놀라운 관점이 되겠다.

 

결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어떤 대상이든 감각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감각은 오관 혹은 오관의 매개물로 인해 늘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존재하는 공간영역은 대상을 인지하기 전에 나의 뇌에 미리 지도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지도에 따라 나의 뇌는 대상을 인지하고, 또 관계를 계속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관점은 서론과 목차만으로도 매우 흥미를 끌었기에, 나의 뇌는 계속 거기에 머물고 있었으며 빨리 덕소에 도착하기를 거듭 바라고 있었다.

 

동시에 추측컨대 사람을 감각하는 것도 비슷하리라. 예를 들어 나와 노신사의 연결도 어디까지인 것일까. 나는 애초에 그의 말을 거부했으면, 즉 그라는 대상이 나의 뇌에 맵핑되지 않았다면 그와의 대화는 어느 것도 나의 뇌를 건드리지 않았으리라. 그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이력을 가졌는지에 대해 도무지 관심도, 알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라는 대상이 나의 뇌에 맵핑됨으로 인해 그와의 모든 대화는 이제 의미가 생성하기 시작했으며, 무엇인가 나의 뇌는 맹렬히 그리고 모든 경우를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뇌에 들어오자 길거리의 일반인이 아닌 보다 공손하게 대할 사람으로 뇌는 좌표를 옮긴 것이다. 즉 그와의 거리를 어디까지 맵핑하느냐에 따라 그와의 관계도, 그리고 대화의 수준까지도 결정되리라. 그의 말도 거듭 이어지고 있었다.

 

“참, 예전에는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좋은 세상에 사는 것은 나이든 사람들이 이전에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아. ”

“아, 예 예, 그렇지요. 그들이 열심히 살았기에 젊은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지요.”

 

그는 제법 간을 맞췄다고 생각하는지, 갑자기 민주당 한명숙 당대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앞까지는 간간히 이야기를 에둘루다가, 이제는 직접적인 질문형태로 말을 잇는다.

 

“한명숙 말이야. 임종석이를 사무총장으로 앉혔어. 이게 말이 돼. 예전에 빨갱이였는데 말이야.” “ 요즘 나라가 흔들려. 그렇다고 빨갱이가 설치면 돼? 나는 나라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해.” “어떻게 생각해?”

“아, 그래요! 요즘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오잉. 갑자기 이게 뭔 말인가. 공직 35년이라는 말이 번뜩 떠오른다. 나이든 분들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흐름인가. 응대하면서도 일단 대응으로 반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유는 아마 밤은 시원하다 못해 상쾌했고, 전철은 밤공기를 쾌활하게 뚫고 지나며 유쾌하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던 듯하다. 모든 것하고 한바탕 유쾌하게 파티를 열고픈 생각으로 넘치는데, 무슨 수로 정색을 한단 말인가. 심지어 그의 말도 매우 유쾌하게 한 바탕 소극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너그러운 밤이었던 것이다. 아! 그래요 하면서 매우 즐거운 미소가 나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던지, 그는 얼굴을 보다 가까이 대고서 계속 이야기를 신나는 듯이 이어간다.

 

“이봐 젊은이. 젊은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르겠는데, 나는 말이야 아직도 나라의 발전을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어. 비록 이번 정권이 너무 못해서 문제지만, 그래도 빨갱이가 설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아유, 그래도 우리 세대는 민주화세대라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요즘 제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는 내가 제법 이야기가 될만한 놈이라고 여겼는가 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난데없는 도발적인 질문에 정색을 하고 이야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어떤 이야기이든지 그가 먼저 차를 내리거나 내가 내리면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리라고 생각하며 편히 응대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질문부분부분에 진지하게 맘까지 섞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소이부답이랄까.

 

차는 도농을 지나고 있다. 오잉. 보통 용산선은 도농에서 내리지 않으면 거의 덕소에서 내리는데도 그와 나는 아직도 대화를 섞고 있었다. 그렇다면 덕소에서 같이 내리게 된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거기까지 대화모드로 가야겠구나. 도농이후부터 덕소까지는 논밭지대라 밤풍경이 제법 그림처럼 느낄 때가 있는 구간이다. 밤이지만 어느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곳이다. 전철은 은하철도999가 우주를 유영하듯이 그렇게 유유히 어디론가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스르럭, 스르럭.... 그의 말도 조용히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 우리 손자들이 초딩 1년인데도 학원을 다섯 군데나 다녀. 태권도, 피아노, 그림.... 우리 때는 그런 것이 없어도 좋았는데 말이야. 이게 말이 돼. 교육이 큰 문제야.”

“하여간 요즘은 왜 그런지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인 것 같네요. 우리 때도 학원에 가는 친구 한명 보지를 않았는데 말이예요.”

 

이야기는 사방으로 튀고 있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임에도 우리는 제법 긴 문장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차를 타거나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이들과 말을 섞고 이야기를 하다가 맘이라도 들면, 아니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듯이 어울려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요즘 어디에서 그런 만남이 자연스러울 것이며, 또 제법 긴 문장을 이어갈 수 있으랴. 하여간 나는 앉아서 그리고 그는 서서 그렇게 연극이라면 제법 그럴듯한 단막극을 연출하며 긴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한강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덕소에 가까이 온 느낌이다. 아마 일이 분 내로 도착하리라. 주인공은 처음으로 말을 먼저 걸어 본다.

 

“집이 덕소인가 봅니다.”

“덕소지. 정년퇴임하고 난 다음에 대치동에서 살다가 덕소로 이사 왔어. 지금은 출근길도 여기가 편해.” “ 직장이 여기서 한 시간도 안 걸려. 공기 좋지. 강변을 볼 수도 있지. 내 집은 한강변의 현대아파트야.”

 

어느새 전철은 자기 집을 찾아 들어왔다. 그 긴 밤의 터널을 용쾌도 헤매지 않고 들어왔으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제 하루 밤 푹 자라고 말을 해주고픈 순간이다. 나의 맘과는 다르게 밖에서는 이제 모든 차편은 마쳤다는 방송이 급히 계속 나오고 있다. 서로 뭔가 모르게 엇갈리는 듯한 느낌이다. 고마움을 사양하며 이제 빨리 꺼져달라는 멘트로 이해하였다면 과한 느낌일까. 하여간 전철을 나서니 제법 밝디밝은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어쩐지 공기가 맑은 것보다 밝은 것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제 집에 가서 마누라랑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보통 오늘 일에서 즐거웠던 것을 예기로 서로 주고 받는 편이기에 말이다.

 

출입구에 카드를 찍고 지나니, 곧 그와 나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 왔다. 그의 몸은 2번 출구를 향하고 있었고 나의 몸은 1번 출구를 향하는 것이기에, 이제 작별인사를 할 상황이 도래함을 느낀 것이다. 오늘 좋은 밤이 되십시오 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경계에 막 들어선 것이다. 그쪽으로 가십니까 하고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짜른다.

 

“덕소 어디에 사는가.”

“아, 예, 동부에 삽니다. 여기서 걸으면 십여분 걸립니다.”

”아, 동부. 거기 잘 알지. 그런데 오늘 내가 기분이 좋아. 좋은 일이 있었지. 그래서 술을 좀 하고 왔어. 여기서 헤어지기 싫은데 우리 내려가서 조금만 더 하면 안될까. 자네는 술을 좋아하나.“

“술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것이 인연인데, 우리 조금만 하고 깨끗이 일어나면 안될까. 한 삼십분이면 충분할거야.”

 

헉, 이런. 지금 바로 가야하는데. 벌써 시침은 자정을 한 참 넘겼고. 집에서도 기다리고 있을텐데. 당근 사양하고 다음에 하자고 말한다. 그는 거듭 부탁을 하였다. 어제 꿈에 오늘 귀인을 만나는 꿈을 꿔서 그런지 그냥 헤어지기가 싫다고 한다. 으악! 냉정하게 부탁을 꺽고 가기에는 밤 느낌이 넘 좋았던 탓인가. 그럼 딱 한잔만 하고 가는 것이라면 가겠습니다. 라고 말을 해버린다.

 

그때 12시 20여분. 집에 들어가니 3시. 그 사이의 사연은 밤의 길이만큼 길게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