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2일 토요일 봄날 오후 

문호, 경, 언희, 현미, 종현, 진홍, 동수, 양겸, 그리고 나

나른함에 힘겨워 생명의 유희를 펼친다.


가슴 먹먹한 시어들이 봄 햇살처럼 쏟아져 

이내 작은 공간을 가득채우며 유영한다.


치자꽃 설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어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사내의 잿빛 등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짝 잃은 여자의 젖은 어깨

저 혼자 바닥을 뒹굴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탁소리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개여울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

개여울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거룩한 식사

등 돌리고 라면발 건져 올리고 있는 나이든 남자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순대국밥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벽제

그날, 비 오던 날 친구들 모여 한줌 한줌 뼈를 뿌릴 때 <진달래꽃 옆에
뿌려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친구들, 흙이 되기 전에 또 비 맞는 그 녀석 생각하고,

그리운 고향 벽제. 너무 가까우면 생각도
안 나는 고향. 음식점과 잡화점, 자전거포 간판이 낡은 나라. 무꽃이 노랗게
텃밭에 자라나고 비닐 봉지 날으는 길로 개울음 소리 들려오는.
벽제. 이별하기 어려우면 가보지 말아야 할, 벽제. 끊어진 다리.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풍장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化粧(화장)도 解脫(해탈)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풍장27

이 세상 뜰 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 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과꽃

과꽃이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지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가 가지

조금 울다 가버리지

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었지


오규원, 최두석, 박목월, 서정주, 곽재구, 유치환, 백석의 시세계 열리고


가우시안 분포 맨 끝자리 

훅 불면 증발해 버릴 신기루 같은 생명의 끝자락에서


나, 양겸, 동수, 진홍, 종현, 현미, 언희, 경, 그리고 문호

아지랭이처럼 피어올라 

그 봄날 오후를 그렇게 떠내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