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민족주의자 만델라의 나라 <남아공>을 찾아서

박 규 택 (곤충학 박사)

 

지금 돌이켜 보면 정년 2년을 앞둔 2007년에 명퇴를 하고, 플로리다대학으로 내 연구둥지를 옮긴 것이 내 인생후반의 새로운 장을 열 기회가 된 것이 분명하다. 연구여건이 좋은 그곳에서 5년여를 보내며 일구었던 결과들은 내 평생 연구의 주를 이루었고 그것들을 기간으로 새로운 연구열정이 오늘도 나의 발걸음을 재촉해 주고 있는 것 같다. 70대 중반 나이에 아프리카산 나방류 곤충에 대한 연구주제로 한국연구재단 개인기초연구사업에 선정된 것도 국내 연구풍토에서는 새로운 사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연구수행을 위해 지난해 2018년 11월 19일 출발하여 10여일 간의 일정으로 아프리카의 첫 방문길에 올랐다. 먼저 인연이 닿은 우간다를 주 조사지역으로 선정하고 사전 답사를 가는 것이 주 목적이었고, 동시에 관련 연구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소이자 전 아프리카지역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Transvaal Museum이 위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3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아프리카는 6대주 중에서도 큰 대륙이지만 생물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전 세계 생물다양성의 절반 이상이 담겨진 자연 생물자원의 보고임에는 틀림없다. 우리에게는 먼 미지의 세계로만 기억되는 아프리카였지만 사실은 그리 먼 곳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인천에서 아프리카의 허브역활을 하는 에치오피아의 Adis Ababa공항까지는 12시간 정도, 매일 에치오피아 항공기가 직항으로 운행되고 있으니 내가 플로리다대학을 왕래할 때를 생각하면 그 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이다. 내게는 생애 첫 방문지인 아프리카이기에 매우 설레는 마음으로 기내에서 창밖의 전경을 살피기에 한동안 여념이 없었는데 정작 내 시선에 와 닿은 건 내가 생각해 왔던 밀림 같은 숲은 보이지 않고 평평히 펼쳐진 넓은 대륙은 마치 우리의 60년대 벗겨진 산야를 보는 느낌이었다. 현지 방문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농촌지역에서 유일하게 현금화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숯을 구워서 파는 일 밖에 없으니 숲은 사라져버렸고 현실은 늘어나는 인구에 따른 자연재해임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웰빙시대를 꿈꾸기 위해서는 아니 우리 인류가 생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자연파괴를 남의 일이라고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원래 짧은 일정이라 3일간의 우간다 일정을 마치고 수도인 캄팔라 부근에 위치한 Entebe공항을 거쳐 남아공의 요하네스브르그 공항까지 가는 데는 2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었다. 요하네스부르그는 전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나쁜 도시로 이름난 곳이기에 안전을 위해 공항에서 연구소가 위치한 프레토리아(Pretoria)까지는 미리 인터넷으로 리무진택시를 예약해 두었었다.


남아공의 백인통치는 17세기 중엽, 백인 이주자들이 케이프타운에 상륙하면서 부터이다. 1871년 영국령으로 시작된 후 1910년 주변의 4개 지역을 합병,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남아프리카연방으로 탄생되었다. 1950년 인종차별법으로 흑인들이 무차별 탄압받던 역사를 거치는 동안에 영국정부가 인종차별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자 1961년에 영국연방을 탈퇴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독립한 나라이다.

 

비록 곤충의 자료를 찾기 위하여 가는 길이었지만 남아공에 대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차별정책에 항거하다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1990년 석방된 넬슨 만델라였다. 긴 투쟁의 역사를 거쳐 그는 1994년 선거에서 마침내 대통령의 권자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다. 만델라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용사이면서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1993년 노벨평화상을 타기도 하였다. 그는 흑인 민족주의를 구호로 내어 걸고 백인과의 인종차별 철폐를 외치다가 1964년 반역죄로 몰려 종신형을 받았던 인물이다. 남아공의 인구분포를 보면 흑인 80%, 백인 10%, 컬러드인과 아시아계가 10%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에 감옥에서 석방되어 정치활동을 재개하여 1994년에는 만델라 정부를 수립하여 1999년 까지 화합의 정치를 이끌었었다.


오랜 기간의 백인중심 국가경제시스템을 개혁하여 빈부의 격차를 줄인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고용이 줄어들면서 실업자는 증가하고 치안이 불안해져서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남아공은 국토면적이 우리 한반도의 6배 크기이고 인구는 5700만명인데 국민소득은 5000달러 수준이다. 영국의 식민지시대에는 지배인이 백인이었고 현재는 그 자리를 흑인들이 차지하고 있을 뿐인데 지배계급의 횡포에 서민들의 생활은 식민지 시대보다 훨씬 못하게 되었다. 민족의 지도자가 결국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를 맞이하여 거대한 만델라의 동상 앞에는 거지떼만 득실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민족의 문제를 민족주의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 이승만 박사의 정치철학를 다시 한번 회상하게 된다.


만델라의 경우도 민족주의 투쟁에 몰두하다가 사회생활에서 격리된 감옥살이 27년간의 공백기간에 쌓였던 분노와 증오심을 민족정신에 불길을 밝혔지만 결국 국가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간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때 남아공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고 선진국가로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가던 이 나라가 어찌 이렇게도 허망하게 몰락해가고 있는 것인가? 비록 3-4일간의 짧은 방문 기간 이었지만 내게 비춰진 것은 정말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방문객으로 혼자 거리를 나 다니는 것도 위험하지만 여기선 훔쳐가는 도둑이 아니라 값진 물건이 보이면 거리에서도 강탈 해 가는 것이 예사로 행해진다는 예기를 듣는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내가 방문한 연구소는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한 국제적 명성을 가진 연구소(Transvaal Museum)로 건물, 시설이 훌륭하고 보유하고 있는 생물표본은 유럽의 어느 자연사박물관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보였다. 첫날 나를 맞이한 Kruger 박사는 독일출신으로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연구자로서 나와는 첫 만남이었으나 자상하게 내가 원하는 재료들을 찾아주면서 최대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건물 4층을 오가는 그날 하루 거의 일하는 다른 사람을 거의 볼 수가 없었으며, 한마디로 휴장상태와 다름없었다. 함께 일했던 Kruger박사의 동료 연구자들도 은퇴하고 난 후 그들 자리가 채워지지 않아 지금은 보조수도 없이 그 층을 혼자 지키고만 있는 실정이었다.


최근 국내에서도 민족해방의 구호나 민족주의를 앞세운 선전에 점차 세뇌되어가고 있는 주변들을 둘러보면서 최근에 본 남아공의 현실이 결코 남의 일만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남아공에서 첫날 본 시내의 전경이나 이 연구소의 현실을 보면서 이대로 가다간 5-10년 후 우리나라도 이 꼴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충격적 생각에 나의 첫 남아공 방문은 내게는 큰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되었다. 주변의 여러 분들에게 이 작은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변변찮은 몇 자의 글로 제 마음을 전하려한다. (2019.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