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은 로마군이 400년에 걸쳐서 점령한 지역보다 넓은 지역을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점령했다고 한다. 몽골군이 얼마나 강한 군대였는지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한데 베트남은 이런 몽골군의 침략을 3번이나 물리친다. 베트남으로 학습탐방을 떠나기 가장 궁금했던 것이 베트남이 어떻게 당시 최강의 군대였던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몽골제국이 강한 군대를 가질 있었던 것은 몽골인들이 대부분 유능한 전사였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을 비롯한 유목민들은 철이 들기도 전부터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한다. 말을 타고 가축들을 관리하고 동물들을 사냥한다. 목축과 사냥만으로 얻을 없는 물건들을 갖기 위해서 약탈을 시도하고 유목 부족들 간에는 전쟁이 계속된다. 사냥과 전투는 그들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런 유목민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힘을 합치는 일은 매우 드물다. 호전적인 태도는 적대적인 관계로 이어지기 쉽고 계속되는 전쟁은 서로에 대한 원한을 키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칭기스칸처럼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인물이 탄생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가랑비처럼 흩어져 있던 유목민들이 한데 모여 거센 강줄기가 된다. 칭기스칸을 중심으로 강력한 몽골군이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몽골군의 최대 무기는 뛰어난 기동력이다. 2 대전 당시 현대식 군대의 하루 평균 이동 거리가 20km정도였는데 몽골기병대는 통상 150km 이동했고 때로는 200km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뛰어난 기동력이 있었기에 적은 수의 군사로도 힘을 발휘할 있었던 것이다.

몽골군이 이렇게 뛰어난 기동력을 갖출 있었던 것은 모든 병사가 말을 제몸처럼 다루는 뛰어난 기마술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모두 사냥이나 약탈을 통해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는데 능숙했고 말린 고기를 빻아 만든 보르츠 등의 휴대식량을 항상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따로 병참부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기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병사 명이 2~3마리의 말을 끌고 다녔다. 갑옷 역시 비교적 가벼운 것을 입었고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안에 촘촘히 짜인 비단옷을 입었다고 한다.

몽골군의 대표적인 전투장면을 묘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찰을 통해 적군의 위치를 파악한다. 적군의 위치가 파악되면 바람을 등지고 전투를 시작한다. 여분의 마리에 빗자루를 달아 적진을 향해 달리게 한다. 먼지가 충분히 일어나면 몽골의 기마병들이 적진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적군이 멀리서 생겨나는 먼지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을 먼지 구름 속에서 화살비가 쏟아진다. 적군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혼란에 빠져있을 먼지를 뚫고 만곡도와 창을 기마병들이 돌진하기 시작한다.

몽골의 병사들은 단순히 말을 아니라, 등의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고 사냥과 전쟁을 통해 다양한 전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이렇게 다재다능한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투를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할 있었다.

몽골군이 가진 기동력은 언제나 정찰이나 정보전달 면에서 우위를 점할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전투시에는 언제나 수적 우위나 좋은 진영 속에서 싸울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적진의 쪽을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가 몽골군이 다수일 효과적으로 전투를 해내고 적들이 몰려와 불리하게 되면 다시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후퇴했을 것이다.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상대를 유인해 기습공격을 하거나 다방면에서 동시 공격을 하는 기동력을 십분 발휘한 공격 방식들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몽골군이 세계 최고의 제국을 건설하면서 만난 상황은 훨씬 다양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동력이라는 몽골군의 장점을 극대화 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승리할 있었을 것이다.

몽골군은 당시 최강의 군대였고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몽골군들도 베트남을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베트남과의 전쟁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몽골군의 공격을 받을 당시 베트남은 왕조(1225~1400) 지배하고 있었다.

원난 지방에 주둔하면서 인근 민족들을 토벌하고 있던 제국의 우리양카다이가 1257 남쪽 송을 공격할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왕조는 요청을 거절했을 아니라 사신을 투옥시키고 몽골군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수군에 대한 지휘를 다오 장군에게 맡긴다.

하지만 몽골군은 둘로 나뉘어 , 유역을 따라 남하하여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롱에 입성했다. 하지만 베트남 정복이 목적이 아니었던 데다 식량이 부족하고 기후가 습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이를 이용해 왕조의 군대는 반격에 나섰고 롱의 동쪽에 있는 강의 더우 보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렇게 몽골군은 베트남에게 패배를 얻게 된다.

다음 베트남은 몽골에 사신을 보내서 3년에 입공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원은 이전 왕조들의 전통적인 남방 팽창정책을 이어받아 남해무역을 장악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원은 당시 베트남 밑에 있던 참파를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고 베트남에게 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베트남이 이를 거절해 원은 해로를 이용해서 병력을 보내고 1283 초에 참파의 당시 수도 비자야를 점령했지만 산지로 도피한 참파 국왕군이 게릴라전을 전개하자 병력이 부족해 구원병을 요청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원군은 다시 해로로 병력을 보내지만 폭풍을 만나 타격을 입고 만다.

이에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1284 50 대군을 아들 토곤에게 이끌게 하여 육로를 통해 베트남과 참파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최남단의 영토까지 점령하고자 한다. 당시 베트남의 군대는 20 밖에 되지 않았기에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상황이었다. 이에 똥은 전국의 덕망 있는 촌로들을 모아 저항과 항복 중에서 택일할 것을 물으니 모두들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연홍회의(延洪會議)라고 불리는 모임은 베트남 민족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모두가 결의해 원군에 맞서지만 맹습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수도를 내어준다. 이에 왕은 다오 장군에게 항복하는 어떻겠냐고 묻는다. 하지만 다오 장군은 끝까지 저항할 것을 권유하고 격장사(檄將士)라는 왕조 시대의 명문으로 알려진 글을 지어 장수와 병사들에게 왕조의 위급함을 호소한다. 이에 왕조의 군대는 사기가 충만해지고 이미 베트남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몽골군을 상대로 여러 지역에서 공격을 가하거나 식량과 물품 공급을 차단한다. 결국 몽골군은 다시 후퇴를 해야 했고 다오 장군은 후퇴하는 길목에 군대를 배치해 공격을 하기도 한다. 몽골군의 번째 패배였다.

패배에 격노한 쿠빌라이는 당시 계획하고 있던 일본 원정을 포기하고 1287년에 다시 토곤에게 수륙 30 대군을 거느리고 베트남을 침공하게 했다. 이번에도 다오는 군대를 롱에서 철수시키고 원군은 수도인 롱을 점령했다. 그러나 군량 공급 선단이 오늘날 가이 부근의 바다에서 왕조의 군대에게 격파되어 원군은 식량을 수급할 없었고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 총퇴각할 밖에 없었다. 다오는 바익당 강에서 후퇴하는 원의 수군을 맞아 일전을 벌였다. 강에 말뚝을 박고 만조 원의 전함을 유인했다가 간조 이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원의 육군도 왕조의 복병에 타격을 입고 간신히 샛길을 통해 귀국할 수가 있었다. 최강의 몽골군이 번이나 패배한 것이다.

당시의 왕조는 안정적인 사회경제적 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군사제도 역시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뛰어난 전략가이자 문장가이기도 다오라는 걸출한 장군이 있었다. 또한 외부의 적을 향해 모두가 힘을 합쳐서 대항하겠다는 단결력도 갖추어져 있었다. 아마 베트남에서 강조하는 승리의 요인은 가지일 것이다. 가지 요인이 승리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겠지만 점만으로는 당시 최강의 군대였던 몽골군이 적은 수의 베트남군에게 패배했다는 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당시 몽골군의 전쟁 경험이나 사기는 결코 베트남군에 뒤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몽골군의 강력함은 뛰어난 기동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있을지도 모른다.

침략에서부터 몽골군은 쉽게 수도를 점령하지만 매번 다시 수도를 내어주고 만다. 이유는 언제나 식량 부족과 기후이다. 몽골군은 사냥과 약탈에 능하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드물었을 것인데 아마도 베트남군이 퇴각하면서 모든 식량을 숨기거나 폐기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같다. 베트남인들은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작업에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몽골군이 자신들의 기동력을 백분 발휘해 도망자들을 쫓았을 것이다. 아니 먼저 앞서가서 매복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도망친 곳이 속이나 밀림 속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파른 산과 밀림 속에서는 어떤 말도 힘차게 달릴 수가 없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의 여름을 맞이하는 것은 특히 몽골의 전사들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몽골인들의 식단은 고기나 유제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운 몽골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지방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들의 역시 지방을 잔뜩 유지할 있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을 것이다. 이런 특성은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모두 무릎을 꿇은 시베리아의 추위 앞에서도 힘을 발휘했고 시베리아의 일부를 제국의 땅으로 삼을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이런 특성은 오히려 독이 되었을 것이다. 두꺼운 지방층은 몽골 병사들을 덥게 만들었을 것이고 더위 속에 지쳐있는 이방인은 베트남 풍토병의 쉬운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베트남의 호치민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캄보디아에서 소는 매우 홀쭉했다. 마치 심한 다이어트 중인 같은 모습이었는데 아마 적응력의 산물일 것이다. 이에 미루어 다량의 지방을 갖고 있던 몽골 말들의 고생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해로를 통한 접근 역시 몽골군에게는 익숙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 침략에서처럼 태풍에 배를 잃기도 하고 베트남 수군에게 패배하기도 한다. 몽골에서는 생선이 인기가 없다. 우선 잡지도 않고 잡아서 먹는다고 하더라도 지방기가 별로 없어 맛없는 음식으로 치부된다. 아마 생선을 먹는 일만큼 강이나 바다 위에서 배를 타는 일도 드물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베트남은 강과 바다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던 나라였다. 특히 당시 지배왕조이던 왕조가 어업과 해적질을 통해 세력을 키웠었기 때문에 수군에 대한 관심이 컸었던 점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산과 밀림, 바다 그리고 더위가 몽골군의 기동력 봉쇄해 버리자 소수의 부대로 다수의 부대를 제압하던 용맹한 전사들이 자신들보다 적은 수의 베트남군에 제압당하게 되었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은 사실 몽골군의 전매 특허 같은 전략이었을 텐데, 밀림과 덕분에 오히려 게릴라전술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번째 침략에서 50, 번째 침략에서 30만을 동원했었기에 당시 20만이었던 베트남군을 이기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가 소용이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조금씩 거점을 정비하면서 밀고 내려갔다면 이기는 것이 의외로 쉬운 일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더위와 전염병 대한 부담, 그리고 유목민 특유의 이동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은 그런 결정에서 그들을 비껴가게 했을 것이다. 혹은 자신들의 다른 성공에 심취해서 단순히 시공의 사유를 소홀히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2 점점 더워지고 있던 베트남의 날씨와 넓은 메콩 강이 떠오른다. 박자세와 함께 하는 여행은 여행지의 시공에 더욱 다가갈 있게 해준다.

 

<참고 문헌>

박자세(2013) 『몽골』 엑셈

유인선(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