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때 이야기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부메랑'을 만들어 오는 숙제가 있었다.

토요일까지 신나게 친구들과 놀다가 일요일 오후부터 '부메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두꺼운 종이로 기준을 잡고 다른 종이로 겹겹히 붙여 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풀이 많이 필요해서 죽을 끓이듯이 풀을 만들었다.

국민학교 2학년이 그런 것도 하냐고 묻는다면 그 때 당시 모내기도 하고 벼도 베는

친구들이 반에 절반도 더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다니던 학교의 소재지는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부산면 효자리'까지

길게 써내려갈 정도로 시골이었다. 그 곳에서 아버지께서는 학교 선생님이셨고,

우리 가족은 학교 사택에서 살았다. 여름에는 밤새 개구리가 울고, 겨울에는 흰 눈 위로

발자욱 하나 없는 그런 시골이었다.  시골의 아이들은 도시에 아이들보다 일찍 일을

배운다. 손이 하나라도 필요한 것이 시골의 삶이기에 그러했다.

 

어쩌다가 어머니께서 냇가에 다슬기를 잡아다가 된장국을 끓여 주시면

나는 밖으로 뛰어가서 탱자나무에 가시들을 끊어다가 밥상에 놔 두곤 했다.

다슬기를 탱자나무 가시로 빼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날도 아침부터 탱자나무에 가시를 끊어다가 열심히 다슬기를 발라먹고 배를

튕겨가며 탱자 탱자 놀다가 숙제가 있다는 것을  일요일 오후 늦게 떠올라 부메랑을 만들었다.

 

풀을 만들 때 필요한 찹쌀과 물을 1:6 비율로 준비를 한다. 풀을 끓이기 위해 '곤로'에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곤로라는 것이 바닥에 레버를 조절하면 석유가 뭍은 천 조각이 올라오는데 너무

많이 올리면 불이 너무 강하고 검은 연기가 나서 조심해야 한다. 양은 냄비에 담긴 찹쌀과 물을

끓이기 시작해서 다 끓으면 소리가 '부락 부락' 소리가 나며 기포가 터진다. 그러면 찹쌀풀은

준비가 된다. 

 

준비된 두꺼운 종이를 부메랑 모양으로 잘라 몇 겹을 붙인다. 그리고 신문지를 잘게 잘라 두께를

조절해 가면서 붙여 나간다. 중간에 풀에 눌어서 휘게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몇 시간을 만들고 났더니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밤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잘 만든 부메랑이었다. 날렵하게 꺾인 곡선하며 바람을 타기위해 유선형으로

만들어서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풀이 많이 뭍어 있어 마르는데 잘 안 마를 것 같아서

부채로 말렸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니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그 때 시간이 아마도 10시는 됐을 것이다. 그 때 당시 학교 사택은 낡은 기와집이었는데 방문을 열면

바로 앞에 토방이 있었고 앞에는 교장 선생님 사택이 있었다.

 

지붕이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서 제비집에 손이 닿을 정도였다. 제비집에 새끼 제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였다. 부메랑은 던지면 다시 돌아 오는 것이니까, 내가 만든 부메랑을

던지면 돌아올꺼야. 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깜깜한 밤하늘에 휙~~하고 부메랑을 날렸다.

 

 

 

 

 

 

 

 

 

 

다음날 나는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벌을 받았다. 아무리 내가 다 만들고나서 날렸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을 해도 선생님은 믿어 주지를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지붕밑에 제비가 봤다고 했다가

매까지 맞았다. 난 억울해서 미칠지경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변을 아무리 찾아도

없는 부메랑에 속상했다.

 

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억울한 것도 한것이지만 도대체 부메랑은 어디로 사라진것일까만 생각했다.

 

아직도 '부메랑'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한다. 내가 제비알이 어떻게 생겼나 보려고

했다가 떨어트려서 그거 복수하려고 제비가 물고 갔나까지 생각했으니 말이다.

 

벌써 30년이나 된 이야기인데도 생각한다. 부메랑은 어디로 갔을까?를 말이다.  돌아오라는 부메랑은

돌아오지 않고 사라진 부메랑을 찾아 해메던 기억만 돌아와 입가에 미소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