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이런 경우를 빗대어 많은 말들이 생겨났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든지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등의 사자성어(四字成語)가 그것이다. 한문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현대인이라도, 이 말만큼은 들어봐서 뜻도 대강은 짐작하리라.

어느 절에 갔더니 요사채의 현관 입구에 ‘처음처럼’이라는 글이 걸려있었다. 보통은 유명한 스님들의 글씨나, 그림이 걸리기 마련인데 의외였었다. 목판에다가 전각을 한 것인데, 분명히 유명인의 솜씨는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주지스님께 들으니 중앙승가대학의 바자회에 가서 학생스님이 만든 작품을 사온 것이란다. 글이 주는 의미가 좋아서 잘 보이는 곳에 걸었다고 했다. 현관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처음처럼 변하지 않는 신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근사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하다가 며칠 지나면 그 열기가 사그라져서 흐지부지하게 되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현관에 발을 디 밀 때마다 ‘처음처럼’을 읽고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주지스님의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말로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마음먹고 시작한 것이 수를 놓는 일이였다. 급한 성격을 가진 내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도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여학교 때 ‘가사(家事)’라는 시간에 옷을 만들거나 손수건에 수를 놓거나 버선을 꿰매오라거나 하면 한 번도 내 힘으로 제대로 해서 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어머니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내곤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아는지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이거 네가 한 것 아니지” 하면서 안경너머로 매서운 눈초리를 하며 바라보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조그맣게 “예”하고는 얼굴이 빨개졌었다. 이런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2년 전에 두 번째 자수전시회를 마쳤고, 올해는 세 번째 전시를 할 예정으로 날짜를 조율하고 있는 중이다. 유일하게 작심삼일이 되지 않고 끌고나간 일이라 내심 뿌듯한 마음도 있지만, 하면 할수록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더욱 더 보람을 느낀다. ‘하면 된다.’는 말을 그저 말로만 했는데 작품으로까지 발전할 줄은 아무도 상상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수를 놓는다고 하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평소의 나를 기억하는 지인들조차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화엄경 약찬게(華嚴經 略纂偈)」에 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變正覺)’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게송은 ‘첫 마음을 낼 때가 곧 깨친 때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처음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화엄경은 『대방과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약자이고, 약찬게는 화엄경 80권에 있는 39품과 10만 게송 240만자의 진수를 뽑아서 770자 110구로 요약한 게송이다. 또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설하신 경전으로 깨달음의 오묘한 이치를 말해 놓은 불경이다.

약찬게는 사찰에서 새벽마다 도량(道場)에서 석(釋)을 할 때 목탁을 두드리면서 많이 독송하는 게송이다. 지금은 열반하시고 계시지 않지만, 살아생전에 향곡(香谷) 큰스님께서는 “새벽에 도량에서 석을 할 때 약찬게를 독송하면 도량을 지키는 신들이 좋아해서 춤을 덩실덩실 춘다.”고 하셨다. 향곡 큰스님은 현재 종정이신 진제스님에게 법을 전하신 한국 불교계의 거목이신 선지식이셨다. 항상 온 몸을 흔들면서 웃으시는 소탈한 큰스님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계신다. 늘 “초발심 때 견성(見性)하지 못하면 깨닫기 어렵다”고 하시며 초발심을 강조하셨다. 큰스님께선 양산내원사에서 18살의 어린 나이에 초발심으로 견성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초발심의 중요성을 누누이 말씀하셨다. 현재 송광사의 회주로 계시는 법흥 스님은 향곡 큰스님이 월내 묘관음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 입승(入繩)이셨다. 매일 새벽예불 끝에 대웅전을 한 바퀴 돌며 약찬게를 한 편 독송한 뒤, 선방으로 입선(入禪)을 드리러갔었다, 큰스님의 영향이었던 것 같았다.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첫발을 잘 디뎌야 한다.’라든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냥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말이라고 여겼었는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첫발을 잘못 들여 놓으면 빠져나오기도 힘들고, 가까운 길도 빙 둘러 가게 되니 고생만 죽도록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경쟁사회에서는 남보다 뒤처지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속담처럼 경험 많은 어른의 말은 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들어서 손해 볼일이 없는 것이다. 첫 단추도 같은 맥락이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면 그다음은 단추 끼우기가 식은 죽 먹는 것보다 쉬워지기 때문이다.

처음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 우리말에는 많다. 첫사랑, 첫걸음, 첫눈, 첫인상, 첫머리 등등이다. 처음은 시작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그 끝이 처음과 같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화엄경 약찬게의 초발심시변정각이라는 한 구절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

어떤 일을 하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만이 내가 갈 길이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이라는 말처럼 처음에 세운 뜻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밀고 나가자!

처음이 없으면 끝도 없기에 처음이 시작이자 끝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