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법념(法念)

 

  일요일마다 서울로 간다. ‘특별한 뇌 과학’이란 강의를 듣기 위해서이다. 경주에서 첫 버스로 올라가면 강의시간보다 1시간 전에 도착한다. 빨리 가서 좋은 자리를 잡아야 말도 잘 들리고 칠판글씨도 잘 보여서 앞자리를 잡는다.  30분전에 가도 명당자리엔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 구석자리나 뒷자리밖에 남지 않는다. 한번은 볼일보고 시작하기 10분 전에 갔더니 제일 구석자리였다. 강의에 집중도 안 되고 글씨도 잘 안보여서 그날은 거의 적지를 못했다. 자리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일찍 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학생들의 자리선호도는 정반대이다. 제일 뒷자리에 있는 구석자리가 인기순위 1위에 든다. 강의실에 들어와서 쓰윽 보고 뒷자리나 구석자리가 없으면 서성댄다. 어딜 앉아야 교수의 눈에 띠지 않을까? 이리저리 살피면서 눈치를 본다. 그런 모습을 없애려고 나온 대책이 지정좌석제라는 것이다.

   고교까지 좌석배정으로 앉는 것이 습관이 되어선지 자율적으로 자기가 앉을 자리를 잘 찾아가지 못한다. 그런 대학생들을 바라보면 한숨이 나온다. 학생답지 못한 행동을 하려고 하니 떳떳하게 앞자리에 앉지 못한다. 그저 뒷자리나 구석자리를 찾는 것이다. 왜 뒤로 구석으로만 앉으려고 하는지 안타까운 현상의 하나이다.

  여고시절엔 창문가의 자리에 앉기를 원했다. 이층 교실의 창문에서는 바다가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전망이 좋은 곳에 서로 앉고 싶어 한다. 궁여지책 끝에 일주일에 한 칸씩 당겨서 앉기로 했다. 책상 짝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었지만, 돌아가면서 앉으니 별 불평 없이 일 년간 이어진 적이 있었다.

   어른들 말씀에 ‘설자리 앉을자리를 잘 알아야 어딜 가더라도 걱정이 안 된다.’고 했다. 어릴 적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말 몰랐다. 앉고 서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커서야 알았다. 어떤 일이든 자신 있게 잘할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자신이 없으면 안절부절 하다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거추춤한 자세가 된다. 말하자면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이 말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국제 PEN대회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동리⋅목월문학관의 관장님 배려로 어렵사리 자리를 받아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갔었다. 노벨문학상수상자 두 분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강연은 점심시간 뒤, 2부 순서에 있었다. 일찌감치 가서 될 수 있는 한, 내가 앉을 수 있는 뒷자리 중에 제일 앞자리를 잡았다. 자리가 앞뒤로 나뉘어져 있었다. 앞은 주로 초대된 분들과 외국에서 온 회원들과 정식회원들로 꽉 차 있었다.

가을의 문턱에서 시작된 대회인지라, 한여름의 더위를 싹 날려버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꿈만 같았던 시간이 다가왔다. 첫 강연자는 1986년도 노벨상수상자로 나이지리아에서 오신 월레 소잉카(Wole Soyinka)교수였다. 주제는 ‘마법의 등불’이었고 주어진 시간은 30분이었다. 이때는 그런대로 조용했고 자리이동도 적었다. 간혹 늦게 와서 강의 도중에 왔다 갔다 하는 실례를 범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거의 앞자리의 정식회원이었다. 명색이 회원인데 자리 하나도 제 시간에 앉지 못하고 늦게 오다니! 늦게 왔으면 아무도 모르게 뒤에 살짝 앉을 것이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가는 모습은 정말로 꼴불견이었다.

   문제는 두 번째로 등장한 2008년도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Le Clézio)교수의 강연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자리가 술렁대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점점 더 크게 들리니까 앞자리에 앉은 외국 분들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려 강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애들도 아니니 야단칠 수도 없고 정말로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적어도 문학을 한다고 지성인이라 자부하고 사는 사람들이 할 행동은 아니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할 거면 아예 참석을 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무엇하러 이곳까지 왔는지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상자 두 분의 강연을 뭐로 생각하고 경주까지 걸음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국제 PEN대회 로고가 찍힌 가방 하나 받으러 왔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상식이하의 행동을 하는 걸 보니 부끄러운 줄 모르는 철면피 같았다. 이 장면을 보니 자리에 잘 앉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지켜야할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 그 모임의 질서는 깨어지는 것이다. 국내대회라 하더라도 그런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될 터인데, 국제대회에서 문인들이 보인 자세는 정말로 바람직하지 못했다. 긴 시간도 아니고 30분이란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기차시간이다, 버스시간이다, 시간약속이다 라는 등을 핑계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며 씁쓸한 감정과 함께 끌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었다. 오죽하면 PEN 클럽에 직접 글을 올리려고 인터넷으로 들어갔을까. 결국 회원이 아니어서 올릴 수는 없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를 위해 자리양보를 하면 그 자리는 남을 흐뭇하게 만드는 자리가 되지만, 모른척하고 눈 감고 앉아 있으면 볼썽사나운 자리로 변한다. 자리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 재미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일에 자리다툼이 있는데, 이 다툼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신문이나 방송매체를 통해 매일 듣다시피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실감하게 만든다.

   인도 배낭여행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금 아는 영어로 겨우 기차표를 끊었다. 밤기차여서 좀 편안하게 가려고 2등표를 구입했는데, 올라가니 우리자리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는 게 아닌가. 표를 보니 하나도 틀림없는 같은 번호였다. 이중매표를 한 것이었다. 승무원의 안내로 우리일행 네 명은 3등 칸으로 옮겨졌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2등 칸은 이층 침대여서 앉아도 여유가 있다.  여기는 세 칸으로 되어있는 삼층 침대라서 앉으면 머리가 닿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밤새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하고 가는 내내 누워서 뒤척였다. 내려서 환불은 받았지만, 삼층 침대의 기억은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인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해서 거듭 놀란 적이 있었다.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일상생활이 이 두 가지 행동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모든 생활이 자리에서 앉고 서고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앉을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그 자리에 맞는 행동을 해야만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으려고만 하지 말고 앉은 자리를 잘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자리가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