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쑥스럽지만 특별한 뇌과학 공부를 시작한 소감을 적은 글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제 글은 아니고 함께 몇 강을 들었던 남편이

저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입니다.

박자세 공부가 저희 집에 신선한 바람과 충격, 도발을 일으킨 것은 분명합니다.

박자세에 고맙기도 하구요, 제가 지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자위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올립니다. ]

 

 

자연과학 공부가 필요한 이유

 

-시공의 사유, 기원의 추적, 패턴의 발견, 박자세의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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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부하는 내용 중에 자연과학 공부를 빠뜨리면 100 50은 놓치고 가는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을 균형 있게 공부해야겠지만 이왕 하는 공부라면 자연과학 공부가 앞서야 더욱 효과적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든 후에 하는 공부라면 더욱이 그러해야 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배움은 있다! 눈을 들어 찾아보면 배움을 찾고 배움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다. 의외로 많다. 배움의 언저리를 늘 헤매지만 막상 자신의 배움은 한 뼘도 키워나가지 못하는 우리들!

 

배움의 공동체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이하 박자세)]이 만들어가는 공부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세 식구 길을 나서다!

 

늘 강단에 서고 강의를 듣기도 하지만 지난 9월 초부터 듣는 강의는 참으로 독특한 매력이 있다. 10강으로 구성된 이 강의는 매주말 일요일 건국대에서 열린다. 이 강의를 듣기 위해서 우리 집 세 식구는 길은 나선다.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하 박자세’)]에서 주관하는 4회 특별한 뇌 과학강의 수강을 위해서다.

 

수원에서 서울 화양리의 건국대라면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그런데 수원에 사는 우리 부부야 그렇다 치지만 광주에서 매주말 올라와야하는 시우의 경우라면 좀 고역이다. 2주에 한 번씩 귀가를 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귀가주가 일치하는 때라면 모를까 미귀가주에는 일부러 올라와야 하니 더욱 그렇다. 일요일 오후 2시부터 시작해 오후 7시나 돼서야 끝나는 강의이다 보니 귀교시간을 맞출 수 없어 시우는 아예 월요일 새벽에 학교를 간다. 그것이 고역이긴 하지만 이를 반복하는 시우가 기특하기도 하다.

 

박자세에서 주관하는 특별한 뇌 과학 강좌는 우리의 생각, 감정, 운동, 기억, 언어 등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두뇌의 실체를 알기 위해 뇌의 발생과 진화과정을 촘촘하게 추적하고 파악해나가는 강의다. 뇌의 발생으로부터 인간의식에 이르기까지 언어와 사고의 의미, 인간의 의식과 초월의식, 수면과 꿈, 전두엽과 학습, 기억과 훈련 등 흥미진진한 주제로 각 신경회로의 연결과정 등 뇌과학의 핵심지식을 다룬다.

 

 

10강으로 구성된 강의가 중반을 넘어서고 있으니 이제 좀 익숙해지긴 했지만 처음엔 도대체 어리둥절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진풍경. 신비한 몰입이 일어나는 공부의 현장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좌는 우리 가족에게는 일종의 고문 같다.

 

그 사정 속으로 잠시 안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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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 강좌가 뭐 길래!

 

우선 신비한 몰입이 이루어지는 풍경을 소개한다.

 

강의실 풍경1

 

대략 100여 명으로 짐작되는 인원이 수강한다. 수강자 중에서는 강의를 듣기 위해 유럽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이도 있고, 베트남에서 매주 오는 이도 있으니 까짓 부산, 대구, 광주 등은 열정의 이력서 내밀기가 민망하다. 박자세에서 네 번째 이루어지는 뇌과학 강의이나 네 번을 다시 듣는 이들도 수두룩하니 우리 같은 초짜는 알아듣던 말든 강의는 아랑곳 않고 지속된다. 말하자면 불친절하다.(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수강자들 간의 수많은 네트워킹과 자발적 스텝 역을 맡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그 불친절을 메꿀 다양한 방법과 루트들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욕구와 헌신들에 의해 공부모임은 꾸려지고 있을 것이다.)

 

강의실 풍경2

 

자리다툼까지는 아니되 좋은 자리를 확보하고자하는 눈치싸움이 치열하다. 보통의 강의라면 강사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가장 명당이다. 혹시라도 묻는 질문에 곤혹스런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기라도 하면 불편할 테니 최대한 강사와는 눈이 마주치지 않는 자리가 명당이겠으나 이 강의는 좀 달랐다. 칠판과 가까이 있어야 좋은 자리이며, 강사의 몸동작으로 인해 칠판이 가려지지 않아야 좋은 자리다. 극장식 강의실이다 보니 가운데 열 왼쪽 앞자리가 이 강의의 명당 중 명당이다.

 

이런 사정을 알 수 없었던, 알았더라도 한 시간 먼저 도착해 자리를 확보하는 열정이 없던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속수무책으로 그 강의의 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무대식 강단을 가득 채운 칠판에 빼곡이 채워진 그림을 옮겨 그리는 것이 이 강의의 핵심이다. 칠판은 4시간 동안 두 번 갈아엎어진다. 이 두 판을 옮겨 적으려면 족히 A4용지 기준 10페이지는 되는 분량이 된다. 그냥 옮겨 적거나 그려서도 안 된다. 필히 4가지 색 볼펜이 동원돼야 한다. 거기에 수정액이나 지우개 그리고 연필은 필수며 사람에 따라서는 카메라, 녹음기, 영상카메라까지 다양한 도구들이 지참된다. 그러다보니 수업시작 2시간을 지나서 잠시 쉬는 시간 풍경은 실로 가관이다. 강사가 잠시 쉬러가는 틈을 타서 수강자들은 일제히 칠판 앞으로 내려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미처 뒷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아 옮겨 적지 못했던 필기기록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풍경은 하루 두 차례씩 빠지지 않고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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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 계속 들어야 돼?

 

좋은 자리 맡기 전쟁이나 필기기록 확보 전쟁은 둘째치고라도 이 강의를 듣는 우리 세 식구만의 애환도 따로 있으니 도대체 이 강의를 왜 들으러 왔으며, 앞으로 남은 강의를 마저 들어야할지 매 강의 때마다 고민되게 만든다. 참으로 난망하기만 하다.

 

이유인즉 이렇다.

 

이 강좌는 일반대중강좌가 아니다. 전문 학습자를 위한 강좌로 마련됐다.(하지만 이는 우리 세 식구만의 판단이다) 그러다보니 이 강좌를 듣는 우리 세 식구 여러 가지로 난감하다. 우선 강의에서 언급되는 용어를 하나도 모른다. 강의를 영어로 하지는 않지만 여기에 사용되는 모든 용어는 영어를 이용한 의학용어이거나 과학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난망하기 이를 데 없다. 반 이상은 모를 소리요, 그 나머지 중 또 절반은 귀에 닿지 않는 소리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확인한 우리 세 식구의 성향(?)은 숫자와 데이터와 셈, 그리고 엄밀 과학 논리에는 아주 취약한 형편이다 보니 전문 학습자는커녕 일반 대중에도 못 끼는 그런 수강생 가족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의가 진행되는 다섯 시간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졸거나 잠시 한 순간 딴 생각을 품을 수 없다. 철저한 몰입이 있을 수밖에 없다. 쉴 새 없이 볼펜 껐다 켜는 소리, 필기구 내렸다 드는 소리 외에는 들리는 소리가 없다. 가끔마다 터지는 웃음소리만 가득하다.

 

어쨌든 못 알아듣는 소리가 절반을 넘어서고 있지만 몇 가지 위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같이 못 알아듣는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좀 알아듣는다 해도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올챙이 시절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믿음이 있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일 뿐!

 

 

어쨌든 강의를 듣고 와서도 또 한 주가 바쁘다. 연신 강의를 녹화한 동영상을 리플레이 시키면서 복습을 반복하는 수밖에. 관련 서적들을 들척이는 수밖에. 허나 이것까지 하는 사람은 우리 가족 중 단 한 명. 시우엄마다.

 

시우엄마에게 물었다. 실은 첫 강좌를 듣고 나서 곧바로 물었다.

 

 

당신은 좀 알아듣겠어?”

 

그럴 리가...!”

 

그럼, 이 강좌 계속 들을 거야?”

 

그럴려구!”

 

이 강좌가 의미가 있어? 보아 허니 강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문 과학자나 의학자들 같던데. 이 강좌가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차라리 ‘137억년 우주의 진화강좌라면 모를까 이건 너무나 전문적 영역 아냐? 나는 박문호 이 양반이 쓴 책 딱 한 권 읽는 것이면 족한데 이건 너무 나가는 것 같애.”

 

이 강좌를 듣기 전 이 강좌의 강사인 박문호 박사가 4년 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 생각의 출현-대칭, 대칭의 붕괴에서 의식까지/휴머니스트]를 대략 읽었던지라 실은 그 정도의 강의라 짐작하고 강좌를 수강했기에 덜진 질문이다.

 

그랬더니 시우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한번 이 단계를 넘어가 보려고. 실은 더 이상의 개론서 수준의 공부는 이제 질렸어!”

 

여튼 시우엄마는 꽤나 열심이다.

 

시우의 관심은 시우엄마와는 좀 다른 지점에 있다. 어렵게 느끼기는 나와 마찬가지일 테고, 당장의 필요를 갖는 공부는 아닐 테지만 몰입의 풍경에 자극받는 눈치다. 비전문가의 영역에서 당시대 최고의 지식을 꿰차고 정진하는 강사에게도 놀란 눈치고, 새로운 분야에 눈떠 자신들 지식체계의 질서를 잡아나가려고 노력하는 수강자들에게도 깊은 자극을 받는 눈치다. 여튼 자신의 공부 성과와는 다르게 그 기운으로부터 고무 받고 싶은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현실적으로는 주말에 이어가는 공부이다 보니 지혜학교의 여러 일정과도 자주 겹치는 문제도 있거니와 그 공부가 주는 큰 함의 정도만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마감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연과학 공부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문을 털고 가야겠다.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은 자연과학 공부에 사람들은 왜 이처럼 열광하고 몰입하는 것일까? 수강자 통과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요, 통과시험이 있다한들 어떤 자격이나 면허, 레벨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흔히 말하는 스펙 쌓기와는 아무 관련도 없을뿐더러 그 스펙 쌓기가 목적인 사람들이었더라면 이처럼 정교한 공부에 투자하는 것이 오히려 스펙 허물기일 뿐일 텐데 말이다. 무엇이 이 무서운 강의의 몰입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수강자들이 모두 관련 전문 업종 사람들이 아닐까하는 처음의 의심은 금방 사라졌다. 우리가 흔히 존경해마지 않는 전문가라는 영역은 근대 분과학문이 성립된 후의 폐해다. ··을 아우르는 종합지식인이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멀지않은 시기였다. 근대의 성립 이후 인간의 지식도 쪼개기 시작했다. 한 쪽, 한 분야만의 전문가란 이름으로. 그러다보니 이 세계를 하나로 꿰지 못하는 병폐가 생겨났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대상이 하나의 세계이고, 하나의 현상일 텐데 그것은 하나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쬐금, 겨우 한 모퉁이만이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일뿐이다. 그것마저도 겨우 도달한 이들에게 우리는 전문가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복잡한 뇌수술을 전담하는 전문의에게조차 뇌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그러니 인간이 통째로 이해될 리 없고, 인간현상에 대해 해석할 능력이 없다. 우선 이 강좌의 수강자들의 첫 번째 그룹은 이와 같은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하나로 꿰고 싶은 욕구를 가진 자들이다. 그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문가라 이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중학생부터(중학생 수강자는 시우를 포함해 둘이 있으나 고등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 대학(), 주부나 일반 직장인, 상담전문가, 인문예술분야의 학자들, 스님과 같은 종교인, 전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허름한 80노인까지 수강자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하다. 어쨌든 아주 일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 가족과 같이 셈과 데이터와 지표들과는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와 같이 초장부에 지레 겁먹고 지쳐 떨어진 이들 없지는 않겠지만 박자세에 몸담고 새로운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그들을 하나같이 인터뷰해본바 없기에 속속 알기는 어려우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세계를 사는 방법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 뜬 자들 중 일부라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이며, ‘변화의 비용이 공부라고 할 때, 기꺼이 그 변화를 실감하고 변화에 몸 담근 자들이란 얘기다.

 

몇 차례 되지도 않은 강좌를 통해 얻은 것은 참으로 많다. 하나의 관심과 주제를 설정하고 목적지까지 길을 잃지 않고 쉴 틈 없이 몰아가는, 그래서 당시대 최고의 지식을 일궈낸 강사에 대한 매력을 빼놓을 수가 없고, 그것을 나누는 공부모임의 여러 원칙과 방법들에 대해서도 한없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현상을 꿰뚫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자연과학. 그리고 그 공부로서의 자연과학.

 

 

박자세는 개인적 공부의 집합체는 아니다. 자연과학 문화운동 단체이다. 최근엔 사단법인으로 그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자연과학 문화운동의 방법으로 교과서 중심주의 공부몸 훈련주의원칙을 가지고 있다. 137억 년 우주의 진화, 뇌과학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는 교과서중심주의 공부는 자연과학대학에서 쓰이는 자연과학 교과서를 중심으로 철저히 암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인문학의 완성 또한 자연과학 학습을 전제로 두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이들은 믿는다. 몸 훈련주의 원칙은 쉽지 않은 자연과학 학습에 요구되는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체를 단련시키고자하는 프로그램이다. 해외학습탐사 또는 국내학습탐사를 통해 몸 훈련을 이끌고 그 결과로서 책 한 권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연과학 공부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 아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고, 일상에 매몰된 인간이 만든 가치가 진짜인지를 묻는 질문법이야말로 자연과학 공부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이나 절대를 느끼면 감정을 이입하게 됩니다. 저는 인문, 예술, 종교를 통한 감동의 눈물은 낮은 차원의 눈물이라 봅니다. 철학이나 종교는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뇌가 아무리 위대해도 그것은 자연 속의 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탐사대는 자연을 직접 만나며, 즉 그 철학과 인문학과 예술을 만든 뇌의 본질 안에서 생각의 구조가 완전히 용해되고,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주적 현상에 동참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사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 인식의 전환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감동이다.

 

박자세는 앞서 잠시 소개한대로 대학 과정의 교과서를 중심으로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일반인들의 학습모임이다. 천체물리학, 분자생물학, 뇌과학 등을 집중적으로 학습한다.

 

[, 생각의 출현]의 저자이자 박자세의 운영자인 박문호 박사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새로운 사유의 물꼬를 튼 사람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의 첫 강의는 양자역학과 인문과학!’이었다. ‘양자역학의 내용과 어려운 공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열린 소통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 강연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물리학자나 과학철학자가 아닌 반도체 연구로 학위를 받은 전자공학도였다. 박문호 박사의 강의는 , 세계의 열림과 접힘’, ‘뇌와 생각의 출현으로 이어졌고, 그의 막힘없는 사유에 대해 인문학자 고미숙, 자연과학자 최재천 등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박문호 박사의 공식 직함은 한국전자통신원구원(ETRI) 책임연구원이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뇌 과학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전에서 2002년 시작된 백북스 학습독서공동체(www.100books.kr)’를 이끌어가면서 자연과학 독서운동을 펼치는 지식문화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를 담는 세 개의 시선을 이야기 한다.

 

그 하나는 시공의 사유.

세계를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137억 년이라는 시간과 우주라는 공간으로 우리의 지식과 세계관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을 넘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와 생명의 탄생 그리고 생각의 출현에 이르는 거시적 혹은 미시적 시각을 가진 탐사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는 얘기다. 다른 말로 차원의 확장을 통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우리는 3차원 세계에 거주하며 잘 해야 3차원적 세계관을 이루며 세계를 판독한다. 물론 각자의 개체가 조형되어진 대로 그 이하의 차원적 세계에 갇혀 자신이 본 세계를 설파하고 있기도 하다.(이와 관련해서는 우리 홈페이지에 아주 유익한 글이 하나 있다. 교사마당-선생님게시판-김창수 선생님68번 글-‘나는 주로 몇 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나?’ 참조)

 

또 하나의 시선은 기원의 추적이다.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생학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모든 현상을 변화와 진화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 하나의 시선은 패턴의 발견이다.

지식의 총량이 지혜는 아닐 것이다. 지식의 백화점식 나열이 가지는 의미는 미약하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어내면 지혜의 영역이 된다. 방향성의 탐지 영역이 되리라.

 

답 글에 박문호 박사의 인터뷰를 싣는다
자연과학 공부의 의미를 묻는 인터뷰다
. 참고하시길...

(역시 글이 길어서인지... 한꺼번에 글이 올라가질 않습니다. 인터뷰 부분을 답 글로 분재해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