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난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나를 너무 사랑하신 할아버지 때문이다. 어떤 일에도 꾸중 한 번 들어 본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조금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너무 이기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모두 할아버지의 영향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난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는 그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는 것을 말하고파서 이다.

 

할아버지는 젊으실적 부터 몸이 안 좋으셨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그런 선비가 없었다고 한다. 칠십 세가 넘도록 함게 할머니와 사셨으면서도 할머니와 말다툼 한 번 없었다. 그렇다고 역정을 내시거나 하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딱 한번 성질을 내셨는데 얼마나 무서웠던지 할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으셨단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게는 증조할아버지께서 감기가 드셨다. 할아버지는 시장에 가서 보약을 한 첩 지어가지고 오셨다. 건강을 자랑하시던 증조할아버지는 그깟 약 없어도 건강하다고 끝내 안 드신다고 하시면서 동네 마실을 가셨다. 감기가 증조할아버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도 감기가 들었다. 할머니 생각으로는 증조할아버지는 안 드신다고 하니 할아버지부터 약을 드렸다. 그 후에 나가셔서 약을 지어 오시려고 했다고 한다.

 

약을 사발에 들고 할아버지에게 드리니까 할아버지께서 물으시더란다.

 

 

' 이 약은 뭐요?' 그러자 할머니는

 

' 고뿔에 걸렸으니께. 언능 드싯시요'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 얼굴색이 변하기 시작했단다. 그러더니 버럭 역정을 내시는데

'어찌 자식 된 도리로 아비의 약을 먹을 수 있단 말이요. 아버지는 아프신데 그 아들이 혼자 살아보겠다고 그걸 입으로 넣는단 말이오. 당장 물리시오. '

 

얼마나 기세가 살벌했는지. 할머니는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고 한다. 젊을 적부터 몸이 그리 좋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자격지심이 여기서 발동한 것인지, 아버지의 것을 자식이 먹었다는 그 이유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할머니는 그 이후로 시아버지의 것이라면 절대로 손을 대지 않으셨다고 한다.

 

평생을 따뜻한 말이나 싫은 소리 안하셨다는 할아버지시다. 돌아가시기 전 날에 목욕 재개를 하시고 하얀 무명옷으로 갈아입으시더니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를 조용히 깨우고는

 

'여보시게. 나 이제 가네. 잘 있으시게나' 하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고 누워 계시는 영정을 보는데 마치 곤한 잠에 드신 것처럼 고운 모습이셨다. 평생 동안 죽음을 준비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내 나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이 멋진 할아버지는 날 매우 아끼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붓글씨 쓰시고, 책읽기를 즐기셨던 할아버지, 가끔씩 날 데리고 낚시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는 잡은 물고기를 다 놔주는게 참 이상하게 생각이 들게 했던 할아버지..

 

난 할아버지의 성품을 닮고 싶었다. 조용하고 고요한 성품에 예전 선비들의 기품이 넘친 할아버지를 닮고 싶었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항상 할아버지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동물이 더 사람을 고른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할아버지를 내 할아버지로 두고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큰 행운이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 요놈 거짓뿌렁 하는거 봐라. 허허' 하고 좋아하셨던 할아버지. 금방 들통 날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하니 그 잔망스러움이 즐거우셨던가 보다. 아직도 가끔 꿈에 나타나신다. 그리고 다 괜찮다고 하신다. 다 괜찮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