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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그 동안 ‘망각이 기본이고 기억이 예외적인 시대’에서 살아왔다. 인간은 그 예외였던 뛰어난 기억력을 원해 왔다. 귀중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했다. 기억을 저장하려는 모든 시도는 값비쌌고 저장량도 한계가 있었다.  


  디지털 기술은 ‘기억이 기본이고 망각이 예외가 되는 시대’ 를 창조했다.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가 찍은 수 백 장의 사진을 몽땅 컴퓨터에 저장해버린다. 한 장, 한 장 추려서 지우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기억하기보다 지우는 비용이 비싸지고 있다. 


  이제 디지털 저장 장치는 날로 용량이 커지고 값도 싸진다. 32GB라는 가공할 저장장치도 십 만원이면 산다. 디지털 저장장치를 생산하는 회사는 더 용량이 크며 값싼 장치를 개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매년 그 엄청난 결과를 보고 있다.


  시각을 예로 들어보자. 평균적인 인간의 눈은 1,500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 수준의 고해상도 이미지를 매초마다 수십여 장씩 받아들인다. 청각 같은 다른 감각까지 고려하면 인간의 두뇌가 방대한 저장 시스템이라 해도 금방 꽉 차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바다처럼 엄청난 양의 정보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망각 기술’과 ‘정보 압축’ 능력을 발전시켜왔다.

  검은 물체가 더 가까이 오고 있다는 스냅사진을 담은 수천 장의 개별적인 정보 더미보다 ‘검은 개가 내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추상화된 정보가 훨씬 더 유용하다. 그래서 인간은 엄청난 정보를 고의적으로 버려버린다. 


  그처럼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선물은 망각이 아닐까? 인간은 사회 전체적으로도 망각한다. 이런 사회적 망각은 실패한 개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용한다. 과거에 행복하지 않은 관계였더라도 당사자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망각이 없다면 개인과 사회는 끊임없이 발목을 잡아당기는 기억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것이다. 디지털 사회에서는 한 번 사람이나 조직에게 나쁜 인상을 주면 그 낙인은 주홍글씨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인간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잊혀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손에 쥔 스마트폰을 보라. 구글같은 검색 엔진에 당신 이름을 한 번 쳐보라. 당신이 인터넷 세계에서 조금만 활동했다면 우르르 쏟아지는 불멸의 정보에 깜짝 놀라리라. 미국에서는 당신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소식을 인터넷 검색 순위에서 뒤로 밀어내는 유료서비스가 등장했다. 


  망각할 수 없는 디지털 세상은 인간 두뇌와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수 백 만년에 걸쳐 진화해 온 인간 기억 시스템은 새로운 세상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디지털 기억 저장 시스템은 그걸 만들어낸 인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제 2의 두뇌’가 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