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 왕조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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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리는 이렇게  배웠습니다

이 번 학습탐사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1.왕릉과 월성등 시내 유적지 탐사

2. 경주 남산 탐사

3. 국립경주박물관 탐사

나의 이번 글은 주로 1번 학습탐사에 대한 글이다

 

* 박자세 국내 학습탐사를 경주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20만년전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 코끼리들을 못살게(?) 함 그래서 코끼리들이 사람을 피해 북으로 이동함

인류의 역사는 먹이의 역사임   따라서 호모사피엔스들도 코끼리를  따라 대략 5만년전 시베리아로 지나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대략 기원후 만년이후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가축화가 이루어짐)

유럽과 아시아루트가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시베리아를 지나 한반도까지 오게됨

그래서 우리는 시베리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한반도의 끝 경주까지 온 우리 조상들의 뿌리를 찾아 

역으로 여기에서 기원의 추적을 시작하기로 함

 

" 앞으로 박자세는 자연과학을 밑바탕으로 

 -137억년 우주의 진화에서 시작하여 뇌과학으로 이어지는- 하는 기원추적과  아울러 

 인문과학적 - 사회 , 문학, 철학, 역사 , 지리, 종교등 - 기원추적을  같이 하는 작업을 할것이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것은 역사공부가 될것이다

( 박사님이 이 말씀을 하실때 나는 희망을 보았다^^나는 아직도 자연과학은 생물학을 빼면 너무 어렵고 낯설다

 내 밑바탕에는 인문학이 더 많이 깔려있는것 같다ㅋㅋ )

 그래서 앞으로 국내학습탐사도 일년에 2~ 4번 정도 할 계획이다 " 라고 하심

 

*신라  명칭 ... 덕업일신 망라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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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대  지증왕때 처음 국호생김  그 당시 우경(소를 이용해서 밭을 감)과 순장제도가 있었다

 

* 중요한 연대

661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5년 매소성 전투와

676년 금강하구 기벌포에서 7년간의 나당전쟁에서 설인귀를 격파하고 최강국 당나라를 이땅에서 몰아냄

비로소 삼국전쟁이 끝나고 한반도를 통일함

그 신라인들의 저력이 현재의 경제대국 우리나라를 만드는 뿌리가 됨 따라서 우리는 결코 신라를 몰라서는 안됨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왕국만은 아니다. 신라가 고려에 물려준 유산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리고 현대 한국사회에 이어지는 신라의 유산도 무시할 수 없다       ㅡ 이종욱 저 신라의역사 1 에서 ㅡ

 

* 동아시아 3대 영웅

당태종 이세민, 연개소문, 김춘추

 

삼국당시 신라는 가장 약소국이었다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영역이었던 한강유역을 백제와 함께 획득한 후

 신라는 도리어 백제를 배반하고 그 지역을 혼자 다 차지하였다

이에 화가 난 백제 성왕이  신라 - 관산성전투- 를 쳐들어와서

선덕여왕때는 백제가 신라의 수십개 성을 다 차지할 정도로 위태로웠다

 합천 대야성전투에서 김춘추는 딸과 사위까지 잃고 가슴에 한을 품고 백제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함.  고구려로 도움을 청하러가니 화가 난 연개소문이 (얼마전에 쳐들어온 주제에 도움을 청하러온 김춘추를 도저히 용납할수 없었음 그 정도로 김춘추는 당시 급박했음) 김춘추를 가둠

김유신이 만명의 특공대를 동원해서 온다는 소리를 듣고 김춘추를 풀어줌 

그 다음에 당나라에 청원하러감. 이때 맏아들 법민( 문무왕)을 데리고 감.  바로 당태종에게 가지 않고 공자 사상을 배움

당태종이 김춘추의 외모와 (풍채가 아주 좋았다고 함) 그런 태도를 보고 도와 주었다고 함

이런 김춘추의 행동을 보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고 또 당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것을 비판하면 안된다

백제와 고구려는 그 당시 내분으로 이미 약해 있었다

 

* 외우기

 법흥 (재위26년) -  진흥(재위36년) -  진지 (재위3년)

진평 (재위53년) - 선덕  -  진덕

태종무열(재위7년)  - 문무(재위20년) - 신문

 

신라에서 가장 위대한 역대왕들임

 

1. 법흥왕 - 불교의 공인 .. 5세기 후반 무렵부터 신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불교는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해 있었는데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귀족들과의 타협하에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불교가 집권체제를 받쳐주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최초의 신라절 흥륜사 지음( 우리 회원이신 법념스님이 현재 주지로 계심 ^^) 

 말년에 왕비와 함께 불법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차돈 순교비-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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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진흥왕 -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 황룡사 지음 화랑제도도 적극 지원

 진흥왕 자신도 불교를 독실히 믿어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동륜(銅輪)·사륜(舍輪:金輪 또는 鐵輪)이라 했는데 이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굴리는 윤보(輪寶)의 명칭이다. 즉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성왕과 같은 지위에 비기고 있었던 것이다. 만년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법운(法雲)이라는 이름으로 생애를 마쳤다

 

3. 진지왕 - 정란(政亂)·황음(荒淫)으로 재위 3년만에 폐위되었다고 하는데 사량부에 사는 도화녀(桃花女)를 사모하여 죽은 뒤 다시 나타나 사랑을 나누어 비형랑(鼻荊郞)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설화〈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이것은 핑게이고  당시 신라사회가 아직 왕권이 약해  귀족들에 의해 누명을 씌워 쫓겨난것으로 봄

 

 4. 진평왕 ㅡ 가장 중요한 왕이다

왜? 재위기간이 53년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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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님은 진평왕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 왕릉을 몹시 좋아한다고 하심

고즈녁하고 사람들도 별로 없고 ...  진평왕을 사모하시는 듯 함  ^^

 유홍준씨도 이 곳이 가장 경주스러운 모습이라고 했다고 함

이날도 늦은 오후, 날씨도 약간 흐리고 우리들만 능을 거니는데 큰소나무 사이로는 하얀 반달이 걸려 있었다 

강석경 작가의 '능으로 가는길'이 낭독되고...   (강작가도 제작년호주학습탐사를  같이간 우리 회원임)

 

진평왕은 이름은 백정(). 백작백  깨끗할 정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었고

불교의 확립에 기여

진평왕의 옥대는 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탑과 더불어 신라3대 보물이다

백정은 부처님아버님 정반왕의 이름이다  왕비이름은 마야부인

황룡사를 지음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여김 따라서 석가모니불 같은 아들을 기다렸는데

 딸만 낳음- 덕만, 천명공주 

아들이 없자 충격에 빠져 국정을 놓고 사냥만 다님

 

ㅡ훗날 임금이 사냥을 나가니, 길 중턱에서 멀리 소리가 나는데 “가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듯했다. 임금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었더니, 종자가 “이찬 후직님의 무덤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드디어 후직이 죽을 때 남긴 말을 아뢰니 대왕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

 “그분은 죽어서도 충성을 다해서 내게 간해주니, 나를 사랑함이 지극하구나. 내가 만약 끝까지 고치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그분의 넋을 마주하겠느냐?”

 마침내 세상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김후직편>

 

여기에서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나오게됨

 

이상에서 보듯이

신라는 80%이상이 불교역사이다 고려도 마찬가지이지만..

신라는 부처님나라의 재현이었다 (이름도 동천축국이라고 함)

물론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한 면도 있지만.

따라서 불교를 종교적인 입장을 떠나 역사적인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알아야 됨

 

...또한 성골 왕의 신성함은 불교를 통하여 사상적으로 뒷받침되었다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것이 그 한 증거이다. -중략-

외래 종교인 불교를 왕이 주도적으로 받아들였고, 성골집단을 부처의 집안과 동일시하였다

신라의 재래 신들 위에 부처를 위치시켜 부처와 왕실을 일치시킴으로써 왕은 그 신성함을 얻었고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ㅡ 이종욱 저 신라의 역사1 에서 -

 

법성게(義湘祖師法性偈)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모습이 본래없고

모든법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니 진여의 세계로다.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證知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이름도 붙일수 없고 형상도 없어 온갖것 끊겼으니

깨닭음의 지혜로만 알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참된 성품은 참으로 깊고도 오묘하니

자기 성품을 지키거나 집착하지 않고 인연따라 이루워지네.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속에 일체있고 여럿속에 하나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로다.

 一微塵中含十方  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한 작은 티끌속에 시방세계 머금었고

온갖 티끌 가운데도 또한 이와 다름없네.

 無量遠劫卽一念  무량원겁즉일념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세월이 한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십세호상즉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란격별성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른듯하면서도 모두가 현재의 이 마음에 함께 있어서

 얽힌 듯 얽히지 않고 각각 뚜렸하게 이루워 졌도다.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시변정각

生死涅槃相共和  생사열반상공화
 부처를 이루고자 처음 마음 낼때의 그 마음이 곧 바로 깨닭은 부처의 근본 마음이요,

생사와 열반이 언제나 함께하네

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十佛普賢大人境 시불보현대인경
 진리의 본체계(리)와 나타난 현상계가 한결같이 평등하여 분별할길 없으니

수 많은 부처님과 보현보살님의 경지로다.

 能仁海印三昧中 능인해인삼매중

 繁出如意不思議  번출여의부사의
 
부처님은 고요한 해인 삼매 가운데서

온갖 불가사의한 법을 나투시네.

 雨寶益生滿虛空 우보익생만허공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중생을 이익되게하는 허공가득한 진리의 보배가 비처럼내리고

 중생들은 저마다 그룻에 따라 얻는다네.

 是故行者還本際  시고행자환본제   

息妄想必不得  파식망상필부득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 도리를 얻어 본바탕에 이르려면

헛된 집착을 끊지 않고서는 얻을수 없네.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착여의

歸家隨分得資糧 귀가수분득자량
 걸림이 없는 방법으로 여의주를 마음대로 잡아쥐어

 진리의 고향에 돌아갈 자질과 능력대로 얻는도다.

 以多羅尼無盡寶 이다라니무진보

 莊嚴法界實寶殿  장엄법계실보전
 신묘한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서

온 세상을 장엄하여 보배궁전 만드네.

  窮坐實際中道床  궁좌실제중도상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명위불
 마침내 실다운 진리의 세계인 중도의 자리에 앉았으니

옛부터 변함없는 그이름 부처로다.

            

* 박사님은 왜 법성게를 신라역대왕계보와 함께 학습탐사 프린트물에 넣으셨을까?

의상대사의 화엄사상 - 원융회통 = 차별을 없앤다 - 이 통일국가의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

화엄사상은 '즉' 이다 상즉상입의 즉

물리학에서 말하자면 photon이다  포갤수 있는것, 중첩이 가능한것

화엄에는 60화엄으로 노사나불이 있고 80화엄으로 비로자나불이 있는데 두분다 빛을 의미한다

더구나 화엄의 빛은 그림자가 없다(무량광불),그리고 대적광전(이때 적광은 고요한 빛)

 

중국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보면 신라스님이 일곱분이나 된다

스님들의 인도 구법행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당시 인도 나란타대학에는 승려들이 만명이나 있었다고 기록.

특히 혜초스님은 인도의 뛰어난 고승 금강지와 불공의 8명 제자중 한명으로 왕오천축국전을 편찬함

 

이쯤에서 원효스님 이야기가  안나올수 없다

원효스님이 위대하신 이유는 일심사상때문.

 

불교계에서 700년 가까이  2개의 사상이 충돌하고 있었다 

.중관사상ㅡAD1세기경 제2의 부처님이라고 할정도로 뛰어난 용수보살이 주장한 이론으로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대표로하는 空, 無 사상으로 우리가 있다고 하는 그런 어떤 본질, 바탕은 없다 모든것은 그때 그때의 인과 연이 만나서 나툴뿐이다 이것이 지혜이고 반야이다.

 

.유식사상- 마음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를 기원추적하고 무명을 분석하는(스토리를 추적하는 타입)사상으로 인도가 사라센의 침입을 받자 불교가 기존의 종교인 바라문교와 결탁하여 밀교화 됨. 후에 티벳으로 넘어감  요가사상으로 1.마야(환) 2. 까르마(업) 3.요가 (벗어나는길)4.니르바나(해탈)... 업이 幻花에 의해  즉 무명의 바람에 의해 주객(세계와 self )이 생기고 이것은 요가수행을 통해 열반,적멸 상태로 갈수 있다

 

원효는 인도 마명대사(BC1세기)가 지은 대승기신론에 해석을 단 대승기신론소(해동소)에서

이 둘 모두가 부처님의 한 마음에서 나왔다 (一心)라고 하여 이 둘을 회통시킴.

그리고  중생심이 곧 부처이다 라고 하여 신라를 하나로 뭉치는데 도움을 줌

가톨릭신자였던 시인 具常도 남북통일시 근간을 이루는 철학은 원효의 화쟁사상이어야 한다고 함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적국 백성도)통일신라를 하나로 통합한 힘이 의상과 원효의 사상에서 나왔다고 봄

그리고 원효가 파계했어도 그 당시 신라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원효를 사랑하였고 또 아량이 넓었다

 

* 신라 고분이 200여 기

인구가 늘어나면서 평지에 있던 능들이 외곽으로 나가기 시작

한창때 신라인구는 100만 가호

현재 경주 인구가 27만인데 남산에서 보면 빈평지가 많다 그곳에 집들이 다 차면 백만가호 가능

그리고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도시이다  '방방곡곡'이 들어맞는 말이다

 

*월성,  반월성이라고도 하는데 왕성이다 신라 왕들의 궁궐이 있었던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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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숲에 위치 문무왕때 안압지와 임해전 첨성대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

신분제도의 테두리였다  그 당시 이 안에서 살수 있는 사람들은 성골에 가까운 사람들.

화랑세기에서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 가 있었다고 전해져 현재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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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가 무슨 용도 였을까? 아직까지 여러 주장이 많은데

최근에 첨성대가 (우물을 신성시 하여) 우물을 밖으로 내어 보인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고 하심

(누구인지 들었는데 안 적어서 까먹음)

말씀을 듣고 다시 보니 완전 속에서 나온 우물의 모습이다  꼭대기에 우물 井자도 있고...

그런데 박사님형님이 이 말을 들으시더니   '그럴리는  없다'  라고 역정(?)을 내신다

박사님도 형님 앞에서는 꼼짝 못하시고

웃으시면서 ' 예 문자가 제일 정확합니다 아직은... 瞻星臺가 제일 맞을겁니다 ' ㅋㅋ

형님께서는 우리를 맞아 프랭카드-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 경주 학습탐방-까지 만들어서 교육문화회관에서

학습을 할수있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김인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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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의 둘째아들이며 김유신의 동생으로 신라인들이  좋아하는 인물이다

문무를 겸비했고 삼국통일의 숨은 주역.

당에서 평생을 살면서 여러 전쟁시 당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끝까지 신라에 충성

그 당시 상황에서 배반하고 자기가 집권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

현재로 말하자면 자기 지위(귀족)에서 할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다 한것.

 

*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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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대사(慈藏大師)대사의

건의에 따라 지음. 처음에는 궁궐을 지을려고 땅을 파는데 별안간 황룡이 나타나 궁궐대신 절을 지음

9층 목조탑 높이가 80여m에 이르며 백제에서 초청된 아비지(阿非知)등 200여명의 장인이 참여하여 17년 만에 완성함.

황룡사 창건이야기 ...중국에 있을 때  자장이 한 신령스러운 사람을 만나 "신라는 북으로 말갈, 남으로는 왜국과 접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범하니 이런 이웃나라들의 횡포로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고 호소하자, 그는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왕을 섬기고 있으니 위엄이 없음으로 이웃 나라들이 넘보는 것이오. 지금 본국에 돌아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리하면 이웃나라들이 모두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가 조공해 올 것이며 나라가 길이 평안하리라"라고 했다.

 

남산 마애불상옆에 있는 황룡사9층 탑의 모습...결코 전설이 아님을 확인

바위에 새겨진 탑에도 한층마다 처마끝에 종의 모습이 새겨져 있음 

'그 큰 탑에 바람이 불면 한꺼번에 울리는 그 종소리가 어땠을까? ' - 박사님 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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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9층 목탑을 재현할려고 정부에 예산이 준비되어있으나 여러 기술적인 문제도 있고해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중국에 가면 큰 탑들이 많은데 굳이 우리가 이 탑을 크기에  의미를 두고 다시 세울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이 허물어진 절터에서 많은 것을 느낄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 경주시 공무원 박옥순씨 말씀 

 

* 경주남산의 불상에서

균형잡힘과 완성도 높음을 볼수 있다

예술이전에 장인이 있었다

남산의 불상들은 바위의 크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려에 가면 이 balance가 깨어지고 무조건 크기가 커지면서 조화가 깨어진다 균형미가 없어지고

'그로데스크' 해진다 

모든 것이 그렇다 자신이 없을때 오히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외관를 크게 해서 내부의 부족함을 감추려한다

 

- 누구나 느끼지만 남산의 불상은 너무나 친근하다

불상의모습이 바로 우리 이웃집 후덕한 아주머니의 모습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금방 바위에서 툭 튀어 나오실것 같다 아주 생생하다 -내 느낌

 

*학습탐사 내내 나는 우리 대원들에게서 '경주가 아주 푸근하고 마음의 고향같다'는 얘기를 여러번 들었다

그 전에도 경주에 올 때면 같이온 사람들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곤 했다

 

끝으로 아선랑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을 소개하면서 어설픈 나의 탐사기를 마칠까 한다

모자라는 부분은 앞으로 더 첨가하기로 한다

 

     내가 경주로 돌아 온것은 나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온 회귀이다 

                                                                   - 강석경의 경주산책중 -

     강석경 작가의 '근원으로의 회귀'는 '피의 DNA 가 아닌 영혼의 DNA가 동일한 '그것.

 

     또 한해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숫자란 그저 하나의 매듭일 뿐이지만

 

     우리는 자신의 근원을 찾아 오늘도 흘러간다

 

 

 

 

* 우리를 항상 배움으로 이끌어주시는 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일박이일 같이한 대원들께도 감사드리며ㅡ 남산산행에서 힘들어가는 여성대원들을

 끝까지 잡아주고 이끌어주고 어둠속에서 불을 밝혀 주신(?) 남성대원들 모습에서

 박자세의 밝은 앞날을 보았습니다

 숙식에 도움을 주시고 맛있는 찰보리빵까지 선물로 주신 고동록선생님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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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다렐라님 사진 이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