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를 만나게 될 거야.”

박자세를 소개해준 언니가 말했다. 벌써 한 달 반 전의 일이다.
그때 대충 설명은 들었지만 도통 ‘박자세’가 뭐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어 
‘안내 및 FAQ (박자세에 처음 오신 분을 위한 안내)’ 웹페이지를 즐겨찾기에 넣어놓고 몇 번 열어봤었다.

지금은, 하루의 시작을 박자세 홈페이지 메인 화면과 함께 하고 있다. 
처음 박자세 사무실에 온 날, 두리번거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그리고 언니의 말처럼, 정말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경북대에서 뇌과학 단기강좌를 들었다. 박자세에 발을 들이고 처음 듣는 강의였다. 
2주간 해뜨기 전에 대구에 내려갔다가, 해가 완전히 진 후에 올라왔다. 
강의는 하루 8시간 연속으로 진행되었다. 
새벽 찬바람에 온몸이 떨릴 때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라는 말이 위안처럼 떠올랐다.

경북대에서 강의를 들은 첫째 날, 새 노트에 8개의 뇌그림을 그렸다. 
처음 듣는 용어를 무작정 받아 적으며 기를 쓰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밤샘 벼락치기 후 머리에 든 걸 모두 토해냈던 시험을 봤을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펜을 꽉 쥐고 있던 손의 떨림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고1의 선택은 결과의 무게에 비해 가벼웠다. 
수학을 못 하니까, 법대를 갈 거니까, 별 고민 없이 문과를 택했다. 
문과와 이과, 교실 사이의 벽은 학문 사이에도 세워졌다. 
고등학교 이후 과학은 저 너머의, 남의 동네 이야기였다.
 
두 번째 시간에 10개의 뇌그림을 그렸다. 노트 한 권을 다 썼다. 
노트 마지막 장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마지막 마침표를 굵게 찍었다. 

잘 쓴 노트의 기억은 꽤 깊숙한 기억창고 안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중학교 생물선생님께서는 ‘노트파’였다. 매 시간 노트 양면 가득 필기를 했다. 
아밀라아제, 말타아제의 소화 과정을 그림으로 그렸다. 소장의 융털도 그렸다. 
대학교 수업 내용은 벌써 가물가물한데, 노트에 그렸던 융털 모양은 아직도 선명하다.
 
대학생 때도 새 학기가 되면 의례히 새 노트를 샀지만 끝까지 다 쓴 적이 없었다. 
교수님들께서 수업 자료를 PPT로 올려주시고, 다운 받아 출력해서 빈 공간에 메모를 했고,
3학년부터는 출력도 안 하고 노트북을 교실에 들고 가서 타이핑했다.
 
요즘은 서불대 뇌과학 단기강좌를 듣고 있다. 몇 번 그려봤다고 여유도 생겼다. 
여전히 대칭은 안 맞춰진다. 정목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매주 리딩 모임에 나오시는 정목스님께서 뇌그림을 그릴 때 대칭 맞추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저도!’ 라며 숟가락 얹기가 모했다. 
같은 결론이어도 수첩 한 권 가득 그림을 그리신 스님의 것은 ‘깨달음’이고, 
몇 번 안 해본 나의 것은 그저 ‘투정’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강의가 끝난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요즘 초등학교 실태를 들었다. 
수업이 전부 ppt로 진행돼 학교에서 노트 필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중학교 때까지 노트 한 권도 쓰지 않고 졸업할 수 있다고 한다. 

손을 쓰는 공부, 몸을 쓰는 공부. 
사라지는 공부 풍토를 꿋꿋이 이어가고 있는 곳에, 나는 지금 자리를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