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리는 과연 '지금'에 살 수 있을까?
우리는 보고 느낀 것을 뇌를 통해 인지한다.
우리가 본 현실은 항상 지나간 것이다.
우리의 시신경은 색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형태를 감지하고 동작을 감지한다고 한다.
"빨간 사과가 굴러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동시적으로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다.
빨간색을 감지하고 그다음 형태인 사과를 감지하고 굴러가는 동작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사기의 원리처럼 우리가 동시간대로 인식할 정도로 짧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지금 현실의 사과는 이미 다른 동작을 향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 교양으로 읽는 뇌과학, 이케가야 유지
뇌를 통한 인식은 언제나 현실과 시간갭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우리의 뇌는 현실에 보정까지 가한다.
그리고 인간의 수만큼 다른 세계를 가진다.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 지금 여기에 살으라"는 과거 수많은 성인들이 한결같이 한 말씀이죠..
이말을 깨닫기 까지는 꽤나 많은 세월이 걸린듯합니다.//
물론 님께서는 단지 뇌과학적, 우주론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만..
제가 아쉬운것은 빨간사과에 대하여, 지식으로만 주요산지, 수확계절, 성분 분자식까지
줄줄이 암기한다 해서,
성분도 모르고 어떤영양가 있지는 모르는지만 실제 사과를 자주 먹어본 사람보다
사과라은 물질에 대한 어떠한 우월감을 가질수 있을까요??
가만 생각하니 저 달도 지금의 달이 아니고 저 해도 지금의 해가 아니군요. ㅋㅋ
달은 2초전의 달이고 해는 8분 전의 해가 아닙니까?
저 멀리 광년을 넘어 도달한 별은 또 무엇입니까?
그 별은 지금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여기에 살아라"는 성현의 말씀은 인간, 뇌가 만든 생각을 떠나보내라는 말씀일지도 모르겠네요.
왠만하면 자연과학에 깊이 빠져서 한동안 학습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빈약하게 우리사회가 학습되어 있으니깐요.
라마찬드란 박사의 이상한 연구실에 보면 시각영역의 손상으로 사물을 보고 있어도 모르는 사람의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엽서를 주면서 우체통(옆으로 길게 구멍이 뚫린)에 넣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환자가 말을 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우체통이 보이지도 않고 구멍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넣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 때 일어 났습니다. 그 환자가 연습도 없이 능숙하게 엽서를 받아서는 구멍에 집어 넣은 것이지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채 말입니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이를 좀비의 뇌라고 명명하고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눈에 들어온 정보 중에 속도와 움직임에 관한 정보는 굵은 신경으로 두정부로 가고, 색깔을 구분하고 형태를 분간하는 얇은 신경은 측두부위로 간다고 말입니다.
과학강국님의 글에서 나온 것처럼 움직임을 파악하는 신경과 색깔을 구분하는 신경이 다릅니다. 신경의 굵기와 oligodedrocyte등으로 이루어진 수초는 신경전달의 속도를 관여하여 timming을 형성합니다. 결국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신경망의 연결된 순간 탄생됩니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실재 사건인 빨간 사과가 굴렀다이지만 이 외부 사건이 내부(뇌)에 표상이 되어야 앎이라고 하는 인지과정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이 때 실제 사건이 일어난 것과 내부에서 표상되는 시간 사이에는 갭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지금을 보고 지금을 느끼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가끔 생각해 봅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거나, 누구와 싸우고 나서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좋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순식간에 함께 생각나는 걸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건 지금 내 뇌에서 신경망이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나의 과거도 현재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현재라고, 지금이라고 부르는 나만의 시간에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동시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케가야 유지의 책은 저도 매우 좋아하는데 같은 책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금강경의 과거심 부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란 구절이 떠오르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