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현실이 나를 배신하여 나를 근심케 하는게 아니다.
내 생각이 이를 근심타하여 현실이 근심이 된다.
버려야 할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근심케 하는 내 생각이다.
과거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순간에
내가 발음한 불행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나직히 외쳐 본다.
좋다! 좋다! 좋다!
지금 정확히 내 상태군요.
그래서,
'아이쿠, 미치겠다' 에서
"와~~괜찮다. 좋다!!" 로 바꿔보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의 시간도 어쨌든 흘러서 지나갈 것이고,
악을 쓰다 보면 바늘구멍 같은 해결책도 나타날 것이기에..
힘든 일도 즐기다 보면, 모두다 공부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으며..
이번 7강에서 조가비핵과 꼬리핵의 구심성분을 설명하면서
'신체부위실명칭증'을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네요.
"신체부위를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부위의 운동을 하지 못한다"
세상에, 명칭을 모르면 운동이 안된다!!
생각이 운동을 만든 것이고 그 생각은 언어가 만들었다.
결국 말이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이 운동을 만든다 .
내면화된 운동(생각,이나스)이 출력되어 현현된 것이 우리가 지어놓은 세계인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
'슬픈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인생도 그렇게 된다'
'생각하고 꿈꾸는 대로 된다'
'일체유심조'
뇌과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그렇다면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사유하고
바르게 움직이면
모든게 다 잘 될거다~
늘 생각해 봅니다. 언어가 가진 범주화 시키려 드는 속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언어에 성질은 두 가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가 랑그(단어)이며 파롤(문장)입니다.
하나의 단어라고 하는 것은 늘 문장으로 설명되어 지고, 그 문장은 단어의 조합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가진 생각이라는 것도 단어적 속성처럼 범주화를 시켜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슬픔, 외로움, 기쁨, 사랑, 등등 은 늘 외부자극이 감각기를 통해 들어 오고, 정보화된 자극들은 다시 내 몸을
바탕으로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내 몸이 만든 생리적 반응(정서)들을 개념화 시키게 되는데 이것을 감정이라고 합니다. 감정은 결국 기억을 만들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방향성을 얻게
됩니다. 이 때 언어들은 복잡한 생리적 반응(정서)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규명화 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단어가 가진 범주화 입니다.
비운다고 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생각들을 비운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들을 감각기를 통해 받아 들일 때
충분한 정보를 형성하지 못해 생긴 오류와 그 오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생리적 반응(정서)과 생리적 반응을
범주화 시킨 감정과 이를 단어로 말하여(불행이다, 슬픔이야, 절망이야. 등등) 언어가 만든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우려고 노력 중입니다. 나를 통해 만들어진 내면화 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비우는 연습이란 결국 또 다시 세상을 받아들이고 나를 관찰하고 관염하여 관조하여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치는 바람 한 조각에도 온도가 다르고, 내 몸을 감싸는 강약이 있으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의미 짓기보다 더 많이 감각을 나누고 구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자기 관리는 영원한 숙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