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차 천문 뇌과학 강의에서 ‘기억’에 관한 소고

 

강의 내용

 

매우 기억에 남을만한 좋은 내용들이 이어졌다. 그 중 기억에 관한 내용이 기억에 남아 적어본다. 박사님은 신피질의 기억에 관련한 언급을 하면서 그 핵심내용을 4가지로 정리하였는데, 그중 두 번째의 기억 저장방식에 관한 내용이 그것이다. 즉 신피질은 기억을 불변표상으로 저장한다 라는 언급이 되겠다.

 

먼저 감각된 내용은 어떻게 표상이 되는가? 답은 감각자극중 새로운 내용은 파페츠회로를 통하면서 일정한 패턴을 가진 하나의 표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감각내용의 자극은 파페츠회로를 돌면서 하나의 물결과 같은 흐름을 형성하면서 돈다. 이때 일정한 패턴이 이루어지면서 표상이 정립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어떤 자극도 단 한 번의 파페츠회로의 흐름만으로 이미지나 표상으로 정립되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자극은 새로운 감각내용이어야 한다. 새롭지 않은 정보는 이미 더 이상 정보처리가 필요없다. 새로워야 시상에서 이들 새로운 자극을 처리할 필요를 느끼고 대뇌로 올린다. 대뇌 번연계에서 이를 인지하면, 파페츠회로를 통해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회로를 반복하여 돌면서 애매하였던 부분들이 점차 사라지게 되고 일정한 형태를 이루면, 전두엽에서 이를 기존의 표상과 비교판단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저장하게 되는데, 그 방식이 불변하는 표상의 형태라는 것이다.

이상이 강의에서 들었던 기억에 관한 일부 내용이다.

 

던져지는 의문들

 

그런데 불변표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이라는 말에 다양한 의문들이 뒤따라 상념으로 떠오른다.

먼저 표상이라는 개념부터 정리해보자. 인식론적으로 표상은 대상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인지한 내용이다. 이미지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따라서 표상은 감각대상에 결부하여 떠오르는 이미지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되고, 불변표상은 그 표상을 고정화시킨 형태를 말하는 것이 될 터이다.

 

여기서 느낌이 크게 다가온 부분은 표상을 불변 형태로 저장한다는 말이었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를 좀 더 정리해보자. 아마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종종 절대적인 확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연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경향은 바로 불변표상의 형태로 저장하는 뇌의 생리적인 기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까. 하지만 우리의 지식과 진리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없다고 본다. 뇌의 생리적인 기제가 자극감각을 필요한 그 정도만큼만 정리하여 불변형태로 저장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확신은 단지 생리적인 기억의 저장방식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역사에서 그토록 많은 도그마와 이데올로기가 진리라고 우길 수 있었던 것이다.

 

불변표상으로 저장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범주화되었다는 말이다. 범주화는 어떤 대상에 대한 느낌이나 이미지를 일정한 개념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즉 범주화는 서로 구별이 가능한 카테고리를 만들어 어떤 대상에서 느낀 구체적 감각을 그 범주에 귀속시키는 일이다. 그 본질은 패턴을 통해 차이와 공통을 인지하는 일이 되겠다. 이를 보다 고도로 추상화하면, 계속 표상화 범주화를 높은 수준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상들을 관계나 시공상의 위치 등 그 속에서 고려하여 판단하면, 대상의 추상화는 보다 다른 차원에서 계속 이루어져 갈 것이다. 나아가 인간간 상호의식의 작용과정, 즉 상호주관성에서 더욱 고도화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표상의 개념들은 원래의 것보다 더욱 추상화되어 갔을 것이고, 그 과정이 인류의 문명사가 되었으리라.

 

사람은 그 추상화된 범주화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즉 기억을 어떻게 저장하는가? 불변표상으로 저장한다. 실제로 그 책을 읽지 아니하고 강의한 내용만으로 추정하여 보면, 불변표상으로 저장하는 것은 인간이 진화된 뇌의 생리가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불변표상으로 기억을 저장하는데, 기억을 저장하는 일이 무슨 연유로 그런 생리적인 작동을 수반하는 것인가?

 

이 대답을 위해 진화론적인 시각을 잠시 빌려보자. 어떤 공부를 할 때 그 대상을 알고자 할 때 그 구조와 기능을 분석하는 일도 좋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발생론적으로,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특히 생물학적 주제는 더욱 그러하겠다. 진화론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연유로 발생하는가의 연유를 이해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진화의 시작점을 어디에다 놓아야 할까? 상당히 애매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의 진화과정만 살펴서는 안되고, 그 이전의 단계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동물들의 진화, 생물들의 진화, 생명의 진화, 그 이전 세포의 구성원소들의 형성진화를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에다 낙착점을 두어야 할지 애매해진다. 여기서는 그 동안 주장하였듯이, 하늘아래 모든 것은 137억년의 진화를 통해 살펴보아야 그 실체가 판명된다 라는 말을 따라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기억을 저장한다함을 운동의 입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자. 진화의 시각으로 보면 생명체의 모든 진화는 보다 운동을 잘하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저장한다는 것은 보다 잘 운동하기 위한 수단이며, 보다 잘 기억하는 것이 고등생물로의 진화인 것이다. 진화의 여정에서 단기기억보다 장기기억이 훨씬 운동을 잘하기 위한 바탕이 될 수 있다. 붕어의 기억력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예로 들면, 단기기억으로는 같은 동작을 계속 거듭 반복하여야 하므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만약 장기기억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앞에서 했던 불필요한 동작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 가면서 대상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히 할 것이다. 인류는 기억작용을 고도화시켜 운동의 효율을 증대하여 온 것이다.

이런 과정이 뇌가 불변표상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것의 본질일 것이다.

 

 

철학의 입장에서 불변표상을 보면

 

불변표상을 철학에서는 종종 이데아라는 말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 이데아는 원형의 개념이다. 어찌 보면 불변표상과 한 끗 차이를 보일 정도이므로 같은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사람은 불변표상으로 기억을 저장하듯이, 철학자도 개념을 정련하여 이데아로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일정한 틀을 갖춘 이데아들을 체계화하여 철학적이론으로 만든다.

 

플라톤이 이데아 개념을 제시한 이후, 그 뒤의 철학자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데아의 형태로 자신의 이론을 포장한다. 자신의 이론을 진리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이데아의 형태로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숱한 철학은 이데아를 매개로 진리를 제시하는 일을 다양한 변주로 반복한 것이다. 즉 그들 이론 전체를 통관하면 진리라고 표방하는 일은 대개 이데아의 형태를 취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데아는 일종의 불변표상의 잔여로 보이며, 따라서 그 속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착각을 전제한다.

 

이데아 즉 원형개념은 일종의 불변표상으로 기억 저장하는데서 오는 결과로 보여진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무수한 형태의 이데아를 영원한 진리라고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결과는 우리에게 혼란으로 남는다. 어느 철학자가 진리를 제대로 말하는 것일까? 하나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진리를 말했을 거라는 소박한 믿음을 쉬이 버릴 수가 없기에, 우리는 계속 헤매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처음으로 철학 사상들을 접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호기심과 더불어 많은 곤혹함을 느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모두 자기의 이론이 옳다고 하니 어떻게 판단해야 하지. 게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이론들은 얼마나 많은지. 아마도 그것들을 연구하다가는 흑발이 백발이 되는 것도 한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갈 것이다.  

기억을 불변표상으로 저장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전 서양철학이론들의 본질을 바로 가슴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이론들은 세상과 삶을 보는 자기 나름의 기억방식, 즉 고정된 불변표상에서 연유했음을 확신한 것이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오랜 철학사에서 어떤 이데아들이 있는가? 불변표상에 바탕한 이데아이론들 중에서 어떤 것을 따를 것인지? 그리고 과연 그것을 따르면, 그것은 어떤 공효를 주는 것인가? 이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논리는 과연 있는지.

아마도 그 이론들 모두는 우리가 운동하고 행위함의 좌표에서 판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느 이론이든지 운동하고 행위할 때 혼란함이 줄어주는지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 나아가 보다 효율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할 일이다. 진리의 공효는 바로 이것이다. 몸의 운동과 행위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우리 주위와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 오래된 많은 이론들을 하나의 실로 꿸 수 있는 지평이 마련된 것이라 하겠다. 불변표상으로 저장한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도 보다 분명해진다. 이 외에 다양한 접근방식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외의 별다른 어떤 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진리가 어딘가에 있지만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을 존재한다는 전제를 상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서양철학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으악! 이다. 아마도 우리를 오랜 시간 혼란으로 몰아넣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