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 글을 읽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입니다.
만일 모든 기억이 뇌에서 사라지더라도 잘 운동할 수 있을까?
단순한 반사가 아닌 목적지향적인 정교한 운동이 가능할까를 생각해 보니 고개가 가로 저어집니다.
기억이 존재하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운동과 연관지어집니다.
생각한다는것과 기억하는 것 행동하는 것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어느날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나라고 얘기하면 난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엉덩이의 점이 같은 위치에 있으니 나야, 혹은 눈의 크기가
같고, 설마 나 같이 생기고 싶은 사람이 있겠어(ㅠㅠ)등등을 떠올린 것이지요. 그러다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기억하는 방식과 순서로 나를 설명한다면 그건 나라고 말해도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기억이 '나'입니다.
기억이 없으면 나는 없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까를 정할 수 없으면 같은 이유로 나는 없습니다.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공통적인 행동들은 목적성이 어디 있느냐 입니다. 갈 곳 몰라 이리저리 방황
하거나, 의자에 앉아 있다가도 옆에 아이가 지나가면 그냥 따라 갑니다. 본인이 결정하는 예측의 범위가
매우 협소하고, 짧은 예측만을 하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일년 후, 십년 후, 혹은 백년 후. 를 생각할 때 그 방향성이 정해 집니다. 일년 후를 생각하는 사람, 십년 후를 생각하는 사람, 백년 후를 생각하는 사람의
미래는 매우 다르다는 말입니다.
멘토님의 질문은 정말 기억에 핵심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모든 기억이 뇌에서 사라지더라도 잘 운동할 수 있을까?'라는 말은
기억이 운동을 만들고, 운동은 어느 곳으로 향할까에 대한 이야기이니.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예측을 어디까지 할까?에 대한 질문이 됩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어쩌면 부족한 행동이라고 여기는 행동을 우리가 장애라고 발음하는 것은
어쩌면 짧은 시간의 예측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백년을 천년을 만년을 생각하는 사람 앞에 그보다 못한 시간을 몇 시간, 몇 일을 생각하는
우리는 지적장애의 아이들이 하는 예측을 장애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가진 우리네의 기준들은 매우 협소한 가치와 원칙을 갖게 됩니다.
기억을 확장 시킨다는 건 어쩌면 지금의 시간을 확장시켜 미래를 지금 여기에 두는 작업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교육이란 다만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신영복 교수는 이야기 하였고,
희망이란 누구보다 먼저 좋은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 박노해 시인은 얘기했나 봅니다.
생각은 공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생각은 결국 공부 방식을 통해 엮어지는 현상입니다.
박문호 박사님의 공부가 만든 결과물은 인문학(인간이 만든 문화)이 만든 오류를 재조명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팔정도라고 하는 불교의 방식의 세상보기의 현대적 해석이 박자세에 있다고 결단코 믿습니다.
박자세가 단지 자연과학이라고 말하면 안될 듯 싶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식의 해석 덩어리가
실체를 이룬 것이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박자세가 행하고 있는 행위 또한 시간이 지나서는 인문학
다시 말하면 인간의 문화적 행위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때가 되면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가 더욱 중요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란 어느 누구보다 먼저 좋은 세상을 사는 것이니까요.
기억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의 첫 번째 오류는 외부의 사물, 혹은 사건들이 그대로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것이 내게 들어오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외부의 것이 있는 그대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감각 수용기는 전기적 형태로 정보를 변환하고 변환된 것을 뇌에 뉴런에 저장합니다. 사실 저장이라는 것이 저금통에 넣듯이 라고 생각하면 안될 듯 합니다. 뉴런들의 네트워크, 즉 얼마나 연결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나가 기억일테니 말입니다.
두 번째로 기억은 외부의 것과 거의 동시에 내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변화들을 저장합니다. 외부적 자극은 감각수용기를 통해서 들어오고, 그와 동시에 자극을 통해 일어난 내 몸의 생리적 변화(심장 박동, 호흡, 근육의 수축, 눈동자의 변화, 혈관의 수축, ...등등)를 기억합니다. 외부의 것이 내 생리적 반응에 따라 기억 서열 순서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기분 좋고, 나쁘고, 집중의 순서가 정해지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불변표상은 모든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과를 일례로 들면 사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릅니다. 심지어는 맛, 향기, 아삭거리는 질감, 먹는 방식에 따른 손의 사용(고유 수용기)등등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과를 말하면 공통적으로 빨강색을 떠올립니다. 하나의 불변표상적 범주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까닭에 소통이 가능하게 됩니다. 허나 모든 사람에게 사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같은 상자에서 꺼내어 같은 사과를 먹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아담의 언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세상의 모든 만물에 이름을 붙이게 하였고 그 이후로 모든 것에 이름이 생겼습니다. 아담이 이브에게 썼던 언어는 아담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 모두 전달되는' 신의 언어였습니다. 사과라고 말하면 사과의 모든 속성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언어를 쓰지 못 합니다. 그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담의 언어를 쓴다고 하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모두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달될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각기 다른 불변표상을 언어라는 형태가 마치 같은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만들어 낸 뇌 저장 형태의 구현 방식입니다. 운동은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방향을 갈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정교한 움직임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방향의 움직임을 할 것인가 입니다. 결국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말들은 어떤 방향을 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지요. 앞으로의 어떤 방향으로 갈것인지에 대한 예측에 대한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은 결국 기억의 방식을 효과적이며, 효율적으로 바꾸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확히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기억이라고 하는 것도 앞으로 나는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를 만들기 위한 선택에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그것이 일년 후가 될 수도 있고, 십년 후가 더 나아가 백년, 천년을 꿈 꿀 수 있습니다. 제프 홉킨스가 자신의 책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에서 설파하고 있는 내용도 이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간에게 불변표상은 계층적이며 단계적인 상관관계들이라고 얘기하며, 만약 인간이 가진 예측 능력이 이 상관관계를 통해서 나왔다면 슈퍼 컴퓨터를 통해 인간의 6단계의 계층성을 7단계, 8단계, 100단계 그리고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단계를 만들 수 있다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할 것이고, 종국에는 우리는 준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은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하고 정확한 방향을 설정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박자세에서 하고 있는 일련의 공부들은 이 좋은 기억을 만들기 위한 훈련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더 노력하고 더 더 더 하면 좋은 기억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옛 선사들의 이야기는 어투로 나온 이야기가 아닌 것이지요.
이화종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고 짧은 생각 적어 보았습니다. 새로운 식견으로 써내려가신 기억의 이야기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고, 생각의 전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화종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