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 붉은 대지에 서서

 

 비행기가 뜬다. 생명의 고향, 원초의 대지를 향해서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른다.

처음 학습탐사를 떠날 때의 설레임이 생각난다.

나는 ‘학습탐사’라는 생소한 여정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해외여행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를 돌아다니기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동경하기를 더 즐기는 나는, 소위 ‘방콕’형 인간이다.

오래전에는 6개월간 한 번도 현관을 벗어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집안에 갇혀서도 별로 불행하지 않았고,

가라앉아 있는 물처럼 정적인 시간 속에 안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는

끝도 없는 탐색의 시간도 좋았다.

답답할 만큼 집안을 맴돌던 사람이 어느 날 뜬금없이 서호주를 간단다.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신변에 심각한 이상이 생긴 거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었다.

과감하게 한 발을 내딛은 이후 인생은 급회전을 했다.

그로부터 3년. 우물 안을 벗어나니 하늘은 무한대로 열려진다.

시원을 찾아 지구 반대편의 땅으로 날아가고, 우주의 시작점을 탐구하게 되었다.

오랜 족쇄처럼 자신을 묶고 있던 관념의 틀을 깨고 삶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뷰포인트를 갖게 되었다.

다시 한번 뜨겁게 뛰는 심장과 꿈을 만날 수도 있었다.

인생은 다양한 색채와 빛깔로 나날이 더욱 풍부해져가고 있다.

 

 1. 길, 길, 길을 달리다

눈 닿는 곳마다 파아란 둥근 천장을 둘러쓴 지평선이다.

그 중간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진 선을 따라 아련히 사라져가는 하나의 점을 향해

끝도 없이 질주해간다.

우주의 저 끝 한 점에서 시작된 근원을 쫓아 호기심 어린 탐구를 시작한지 넉달.

마침내 우리는 35억년 이 원초의 대지에 서 있다.

모두가 품어 안은 각자의 생각들조차 덧없이 사라져버릴 듯한 넓디넓은 대륙.

내가 살아가는 곳이 행성지구임을 한 눈에 보여주는 깊고 깊은 다크블루의 하늘.

온 몸에 전해지는 자동차의 진동이 우주 속의 기적 같은 푸른 행성,

지구의 숨죽인 맥박인 듯 느껴진다.

품어 안고 있던 태초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알알이 살아나 다시 피어날 것만 같다.

  

아칸소스테가가 천적을 피해, 먹이를 찾아서, 늪지를 헤치고

조심스레 육지로 첫발을 내디딘 그날로부터 3억 6천5백만년.

그의 후손들이 어슴프레한 여명 속. 길을 떠난다.

경계도 없이 하나인 하늘과 땅 사이에 빛 하나가 틈을 만들더니

서서히 틈새를 벌리고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고개를 내민다.

가로베어진 대지는 검붉은 고통의 비명을 내지른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저러한 고통을 이겨내고서야 얻어지는 것일까.

일순, 숨이 막힌다.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

눈을 찔러오는 찬란한 빛무리에 머리속까지 새하얘진다.

그 빛마저 뚫고 유칼립투스 그림자 길게 드리운 길을 따라 우리는 또다시 달려간다.

빛과 함께 열려진 하루는, 새롭게 창조된 완벽한 세계이다.

태초의 대지를 찾아가는 길. 그 길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2. 별을 베고 잠들다.

바오밥나무 하이얀 몸체에 깃든 황홀한 석양이 지고

온세상은 파스텔조의 보라색 글라데이션으로 물들었다.

꽃처럼 하나 둘 피어나던 별들이 어느새 새카만 하늘 한복판에 황홀한 길을 만들었다.

아주 어린 날, 엄마 손을 잡고 외갓집엘 간 적이 있다.

덜컹거리는 비포장길을 달려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에 내렸을 때는

캄캄한 밤중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짙은 어둠에 질려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그 순간.

눈에 가득히 들어와 박히던 무수한 반짝임들.

손 내밀면, 자그랑 자그랑, 영롱한 구슬로 알알이 들어와 만져질 것만 같았다.

그 경이로움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호주의 밤하늘 아래에서

어린 날의 나를 다시 만난다.

별보석 가득 박힌 까만 벨벳 밤하늘을 이불로 두르고 그 중 큼직한 별 하나를 뽑아서

베개로 삼고 잠을 청한다. 나의 요는 대지이다.

베고 누운 귓가에 밤새도록 이야기들이 흘러 넘친다.

유난히 까만 하늘 한 공간.

우주의 먼지구름 속에서 푸르른 빛무리들이 태어나고 있음을,

온 우주에 생명의 원소를 가득히 뿌리고 장렬히 산화하는 어느 별의 최후도 전해준다.

저 별에서 출발한 내가 절대고독 무한의 우주로 되돌아가는 날을 떠올려 본다.

아마도 50억년 후의 일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이 지구 속의 생명 시스템 안에서 떠돌고 있겠지.

바다 속에도 있었다가, 바위 안에도 머물다가, 나비의 날개 속에도 숨어 있다가

마침내 최후의 날이 오면 별과 함께 우주로 날아가리라.

단단히 엉겨붙어 외롭게 우주를 떠다닐, 다이아몬드 별이 될까,

그저 한없이 가벼운 먼지가 되어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우주를 떠다니게 될까.

밤새 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듯 하더니, 어느새 꿈이 부드럽게 내려덮힌다.

자연의 품 안에서 무한히 자유로워지는 희한한 잠자리이다.

 

3. 아, 공생자 지구의 위대한 시아노박테리아!!

샤크베이. 기대에 찬, 바쁜 걸음이 바다로 나아가다가 우뚝 멈춰선다.

나의 출발지였던 바다.

염도 높은 그 생명의 바다는 흐릿한 경계선 아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2년 전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

그날은, 하늘과 바다의 파아란 색을 가르는 수평선이 선명했더랬다.

거기에 점점히 늘어선 새까만 스트로마톨라이트.

그 명징한 색감이 아프게 눈을 찌르던 서양화 였다면

오늘의 샤크베이는 하늘도 바다도 한 색감으로 녹아들어 경계조차 허물어져버린 수묵의 동양화였다.

바람조차 숨죽이고 시간도 공간도 모두 엉크러져 아득한 적막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결 한 점 일지 않는 바다 속에는 까아만 스트로마톨라이트들이 상징처럼 놓여져 있다.

지금도 쉼없이 생명의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는 저들.

붉게 변해가는 딱딱한 외피 위에 서서, 그들이 만들어 온, 만들고 있는 장구한 시간 속의 대륙을 느끼며

아직도 세상에 푸른 숨결을 내뿜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시아노박테리아를 만난다.

저들이 만들어 준 나를 만난다.

내가 바다이면서, 대지이면서, 이 지구임을, 가슴 떨리게 자각한다.

 

4. 대륙의 검은 주인. 애보리진을 만나다.

길가의 가로수조차 붉은 비포장 길을 달려서

우연이 맺어준 운명 같은 끈을 따라 만나진 애보리진 마을.

전통적인 부락의 모습이 아니면서도 이제까지 지나왔던 도시들과도 다르다.

이방인의 들뜬 호기심을 밀어내는 조용한 가라앉음.

나무 아래 벤치에는 환담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 그러함에도 여기는 적요하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수 만년을 이어온 그들의 전설을 떠올린다.

암벽과 대지에 새겼던 조상들의 지혜와 꿈과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토템들과

노래와 춤을 떠올린다.

척박한 대지 안에 지혜롭게 순응했던 사람들.

밀려오는 시대의 물결을 감내하기에는 무력했던 사람들.

아직도 잃어버린 신화와 전설을 아프게 꿈꾸고 있을 사람들.

그들이 살면서 지켜왔을 땅.

그 땅을 밟고 디디며, 달려오는 동안 살아 남기 위한 무수한 생명들의 분투를 보았다.

환경에 맞추어 적응하고 연합하고 공생하며 진화를 거듭해온 수 많은 생명체들.

우리들 또한 그렇게 진화해온 결과물이지 않은가.

이제야말로 어슬픈 감상과 관념의 틀을 깨고 온전하게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 온 호모사피엔스의 동지로서.

 

137억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강의실에서 출발한 여정이 서호주 붉은 대지에서 끝을 맺고 있다.

이 땅에서 온 몸의 오감을 열어 만났던 모든 것들이, 내일을 위한 풍부한 바탕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떠나왔던 나의 공간 속으로 돌아간다. 분명히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