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늘 아침 갑자기 '균형'이란 단어가 퍽 다가왔다.
박자세의 나를 비롯한 스텝들은 '균형'이란 이 좋은 단어에 약간의 상처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
"인문학과 자연과학 독서의 균형"이란 듣기 좋은 명분때문에
"인문학의 저변에 자연과학이 있고, 부족한 자연과학 독서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라는
박자세의 모토가 충돌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굳이 이 훌륭한 단어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박자세의 모토가 옳다고 자신하고 있다.
로버트라이시라는 사상가가 있다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라는 책의 저자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데, 소득불균형의 지나친 왜곡이 본질적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그 논리는 쉽고도 명쾌하다.
개인적으로 경제위기를 타개하고 반복을 막는 정책들을 만들고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이 분의 진단에 100% 공감한다.
이 책을 보면서 박자세 필독서 "세포의 반란"이 떠올랐다.
경제위기와 암은 매우 닮지 않았을까하는 가정을 가지고 리뷰할 필요가 있다.
선택과 집중은 복잡한 기제가 고도화되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그렇게 고도화된 복잡한 기제가 건강하게 지속유지되는 비결은 상당부분 균형이 차지할거란 생각이 든다.
선택과 집중의 강조는 매우 성취지향적이다. 경쟁심과 전투력을 고취시킨다.
나는 왠지모르게 이런 사고가 지배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균형은 거의 입으로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의 몸과 사업과 그리고 내 인생에 균형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고 있다.
최근 과거 20때 시절의 운동량을 퍼부었다. 능숙하게 하고 싶은 운동이 생겼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의 컨셉이었을 것이다. 최근 몸에 왠지모를 치우침이 느껴졌다.
한동안은 많은 땀의 배출로 활력이 일어나는 몇개월이 분명 있었다. ^^
어제 회사를 방문한 태극권 고수인 후배의 한마디가 띵하게 다가왔다.
대칭 그리고 균형이란 얘기를 그 친구가 꺼내었다.
박자세의 적송이다. ^^
몸의 좌우균형이 매우 중요하다. 과도한 운동은 한쪽을 지나치게 단련시킬 우려가 있다.
균형의 깨짐은 결국 암과 같은 것으로 결과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특정한 부분의 고도화는 분명 어느선까지는 시스템전체의 능률을 향상 시킬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한 부분의 고도화는 결국 소득불균형처럼 왜곡을 양산하게 되고
몸 전제의 균형을 무너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한 부분을 지나치게 단련하는 스포츠 스타들의 일생을 건강의 차원에서 유심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 그들은 좌우 한쪽을 지나치게 단련한 케이스가 많다.
특히 라켓을 들고 하는 운동은 그러할 것이다.^^
균형있는 선택, 균형있는 삶은 의식적인 행동이며 자연스러이 일상으로 묻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흐르거나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균형을 깨닫고 행동으로 옮길 기회가 찾아 왔다는 것은 나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어린나이라면 축복이지요
60이 가까워 지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자연과학이 일상이어야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인문적인 사고로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한 범주안에서 생활을 했었으니 한참을 이 세계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진 일상이었기에 그 후에나 균형이 잡힐 듯 합니다.
균형독서 생각하니, ㅎㅎㅎ 웃음부터 나옵니다.
인간의 언어 중 단어 하나를 없애라면 균형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싶어요.
이와 비숫한 뉘앙스의 중용, 중도, 중간이란 단어도 아마 포함되겠죠.
우주에 대칭은 있어도 균형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균형이란 단어가 특히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사용될 때 기준의 모호성으로 인해 화자 중심의 가치관을 강요하는데 전가의 보도 처럼 악용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치관의 균형점이라는기준은 무얼까요? 정하는게 가능할 까요? 차라리 합의점이라는 단어로 대체함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심장이 오른쪽에 있어서 균형이 어긋나니 가운데로 옮겨야 한다.
자연은 왼손잡이다. 균형을 잡기위하여 양손잡이로 바꿔라.
게의 한쪽 큰집게발이 너무 커서 불균형하니 둘다 균형을 맞추어야 정상이다.
형식적 균형론자들은 이렇게 주장할 법 합니다.
자연이 왜 우리에게 한쪽 손과 한쪽 팔과 한쪽 눈을 잘 사용하도록 진화해 왔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자연이 왜 불균형을 선택해 왔는지,,,분명히 진화상 이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질의 세계와 물질의 특이한 배열로서 생명과 생명의 모든 현상은 자연에서 대칭이 깨지면서 발생합니다.
대칭보다도 대칭의 깨어짐을 좋아하고, 균형보다 불균형을 좋아 할 수 밖에 없음은 그것이 나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대칭과 균형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입니다.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균형은 자신의 착각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불균형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사랑해야 진정으로 자연과 우주와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은 다른 각도의 이야기 같지만, 부처가 주장하듯이 욕망과 욕구와 번뇌를 불균형한 잡스런 생각이라서 없애는 것이 해탈과 깨달음 속의 참되고 균형잡힌 행복한 삶일까요?
그것들을 내면으로부터 없애는 것은 생명과 존재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생명체로서 목적지향적인 행동자체가 대칭의 깨어짐이요, 욕망과 욕구의 표현입니다.
욕망과 번뇌와 망상을 괴롭다고 여기지 말고 그저 느긋하게 바라보며 즐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거대한 신피질을 갖도록 진화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욕망과 번뇌와 불균형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칭과 균형을 너무 사랑하시면 존재가 소멸되어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쓰고 최재천교수가 번역한 "통섭"
인문학과 과학기술은 어떻게 만나는가를 깊이있게 서술한 이인식의 "지식의 대융합" 같은 책들은
균형을 승화시킨 통합과 통섭의 시각으로 전 학문을 아우르는 장대하고 거대한 바다를 보는 듯한 책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