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밖으로

 

새벽의 끝.

첫차가 어둠을 한꺼풀씩 벗기며 다가온다.

어둠 이편에 남몰래, 작은 캐리어와 내가 서 있다.

엄마아빠 연배의 어르신 스물세분을 쫓아, 호주로 떠나기 위해.

 

그들은 삼년째 함께 모여 자연과학을 공부해오신 분들이고

나는 어렵게 비행기표를 구해 합류한 마지막 탐사대원이다.

어디서 굴러먹던 새파란 돌멩이가 나타나 따라가겠다 했을때,

시선은 그리 따스하지 않았다.

박사님은 별자리캠프가는 어린애같은 마음이라면 오지도 말라셨고

누군가는 이삼십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섞여들 수 있을지를 염려했다.

 

스스로 물어본다.

무슨 고집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걸까.

 

대답은 별로 길지 않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고

곤두박질 치지 않기 위해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여기였다.

 

대학 졸업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교수님도, 선배도, 친구도, 부모님도, 정치인도, 시인도, 예수님도.

가르쳐주지 않는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집도 사고, 보험도 들고,

가끔은 골프도 치고, 드라마도 보면서 나이를 먹다가

어느 날 문득 죽을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일들이 아니었다.

중요하다 정의된 많은 것들이 허무해 보였다.

 

철학 수업에 매달리며 밤낮 책을 읽고 답이 없는 토론을 하다가,

스님들을 괴롭히며 템플스테이에 선재수련에 삼천배를 드리다가,

수녀님들을 쫓아다니며 말기암환자 호스피스를 하다가...

그러니까 나는,

살아보기도 전에 벌써 인생을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가면 갈 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땅딸막한 내 안에 갇혀 길을 잃고 만 어느 봄날,

우연히 한 강의를 만났다.

비전공자를 위한 물리학산책이라는 그 강의는

‘철학적 문제에 물리학이 답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여지껏 그리고 앞으로도 내 삶과는 무관할 것 같던

'과학'을 처음 만나던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과학은

우주, 원자, 그리고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과학하면 기계론, 환원론을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던 나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자꾸 한 발자국씩 과학의 바다로 걸어 들어갔고

어느 날 박문호박사의 동영상 강의를 듣게 되었다.

빅뱅초기 우주의 지문이 찍힌 위성사진을 보고 놀라 눈물을 흘렸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서로를 결정하는 상대성이론과

무기물이 모여 유기물이 되는 생명의 레시피 실험,

요동치는 양자의 세계와 내 안에 꿈틀대는 미토콘드리아를 만났다.

 

현미경 속 자그마한 것들부터 천체망원경 밖 우주 저 끝까지,

알고보니 세상엔 소중한 것들이 넘쳐났다.

난생 처음 나는,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과학은

보잘것없는 '내 안'에 갇혀 질식할 뻔한 나의 시선을

'내 밖'에 펼쳐진 무한한 세상으로 돌려 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가장 큰 컴플렉스는, 내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을 볼 때에, 나는 자주 작아졌다.

혼자로도 충분해 보이는 나 자신이 이 세상 어디쯤에 꿰매어져 있는지,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매듭지어져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도덕책이나 성경을 읽고 감동받기엔 나는 너무 약삭 빨랐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대한 답을, 과학책이 속삭이고 있었다.

우주의 품에 안겨, 지구의 등에 업혀 숨 쉬고 있는 나,

내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생물들과 꽃과 물고기들의 흔적.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들을 따라서, 나는 호주로 가야만 했다.

 

첫차가 내 앞에 멈춰섰다.

오래 뒤집어쓰고 있던 묵은 어둠을 벗어두고, 나는 버스에 올랐다.

 

 

- 호주로 가는 비행기

 

나는 비행기가 싫다.

스스로가 아닌 어느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이 느낌.

비행기가 떠오르는 순간, 필사적으로 땅을 디디던 내 두 다리는 힘없이 무너진다.

우리 모두는 순한 양이 되고, 조종사의 안내방송은 하늘 바깥에서 신탁처럼 들려온다.

 

일상 속에서 나는 내 삶을 조종하거나, 적어도 조종한다는 착각에 빠져 살지만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음이 명백해지는 순간이 몇 있다.

비행기를 탈 때, 수술대에 오를 때, 사랑에 빠질 때.

 

세 경우의 공통점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실은 자신의 동의를 요한다는 것,

그리고 모종의 망설임과 불안과 용기와 결단과 인내를 통과하고 나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장소 - 새로운 시간 - 새로운 자신이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7월 22일, 우리는 또 한 번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