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나흘째

- 개미군단의 위기

 

서호주의 풍경화는 가 본 적 없는 이라도 그려볼 수 있다.

도화지를 막연히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하나 그리고

수평선을 향하다 한 개 점으로 사라지고 마는 외마디 길을 그린다.

그런 다음에는 붉은 크레파스를 들어 도화지 가득

뾰족한 삼각형을 마음 내키는 만큼 그려 넣으면 완성이다.

 

서호주를 점령한 붉은 성들의 성주는 바로, 개미들이다.

인간이 살 수 없는 척박한 지역까지 만리장성의 물결은 이어진다.

인간이 근근이 세들어 사는 이 땅의 진짜 주인은 개미떼인 것이다.

허나 이 거대한 왕국의 시민들은 체구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아서

어리석은 인간의 눈에 비친 붉은 성은 모두 빈 집같다.

인기척 없는 빈 집, 그러한 집이 끝없이 늘어 선 빈 도시가 주는

어쩐지 아득한 정조가 서호주의 들판에는 흐르고 있다.

 

이 정지한 한 폭의 풍경에 낯설은 바퀴자국을 그려 넣으며

못보던 개미떼 한무리가, 북으로 북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식사시간이나 취침시간이면 차에서 쏟아져 나와 각자위치로 움직이고

때가 되면 또 일사불란하게 차에 올라타 쉬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식사-진군-취침-진군의 리드미컬한 진행에 브레이크가 걸린건 나흘째 밤.

퍼스까지 돌아갈 일을 고려하면, 회군시점이 가까워온 것이다.

진군할 시간은 내일 하루, 남은 거리는 1,400km.

800km가 그간 최대였음을 기억하면, 불가능이 자명했다.

거리와 시간이 숫자로 손질되어 도마 위에 오르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막연히 달린 날들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머나먼 목표에 대한 불안감에, 어쩌면 부러 바로 앞만 보고 달려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을 직시해야만 하는 때가 왔다.

별들이 묵묵히 내려다보는 가운데, 토론이 시작되었다.

일군은 처음목표까지 가자했고, 일군은 탐사계획을 수정하자했다.

누군가는 호주행 자체가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던 것 아니냐고 반문했고,

누군가는 매 순간이 너무 가쁘다고, 과정 자체를 즐기자고 제안했다.

이는 또한 인생의 축소판이다. 내일을 달리는 사람과, 오늘을 즐기는 사람.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다.

의견은, 자연스레 모아졌다.

정도는 달라도, 아무래도 탐사대는 탐사대였기 때문이다.

박사님께서는 이는 탐사의 본질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여행을 온 게 아님을, 그에 동의한 사람만이 여기 온 것임을 상기시키셨다.

내일밤이면 상황이 명확해질 터이니 미리 논할 필요 없다고도 하셨다.

 

개미떼는 소란을 맺고, 뾰족한 삼각텐트들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분수령이 될 하루를 앞둔 삼각텐트들 밖으로

밤늦도록 잠들지 못한 이들의 걱정거리가 두런두런 새어나왔다.

 

 

 

호주 다섯째날

-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새벽부터 기척이 심상치 않다.

네시경 텐트들이 반짝반짝 거리더니

다섯시엔 차들이 번쩍번쩍 헤드라이트를 켠다.  

별들도 아직 뒤척이는데, 오늘은 탐사대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젯밤의 토론으로 몇 작전이 변경되었다.

첫째, 로드킬 우려에 회피했던 새벽주행과 야간주행을 감행하기로

둘째, 아침과 점심은 차 안에서, 먹으면서 달리기로.

셋째, 무리지어 이동하던 방식에서, 목표점까지 기든 날든 각자 오는 방식으로

 

계란을 삶아 떠난 첫 목표지는 Sandfire 로드하우스.

아직 남은 잠의 여운과 침묵 속에서, 정동쪽으로 달린다.

우리들 앞에 가로누운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그 어둠의 한 가운데서 거짓말처럼

빛이 태어나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리를 질러대며 빛을 향하여 달리고 또 달렸다.

어린아이처럼 달려가는 우리들 머리 위로 하늘이 생겨나고

눈 앞, 양 옆, 등 뒤, 고개를 돌려서 볼 수 있는 온 사방 천지에, 지구가 생겨났다.

그 아침에 우리는 그렇게 뜻밖에, 휘황한 선물을 받았다.

 

높이 떠오른 태양은 정면에서 우리를 향해 빛났고

눈이 부셔 시야를 가린 1,2,5호차가 Sandfire를 지나쳐버렸다.

그때 2호차의 기름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다. 다음 주유소는 70km밖.

2호차는 경제속도를 유지하며 언제 설지 모르는 시한부운전을 시작했다.

모두가 2호차를 걱정하는 동안, 오히려 2호차 안에는 평화가 감돌고 있다.

속도가 반이 되니 풍경이 보이고, 음악도 들리고, 아침도 먹고, 모처럼의 여유다.

엄청난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여유에 달리던 차도 깜빡 속은듯

2호차는 멈추지 않고 무사히 Bidyadanga라는 작은 어촌에 도착했다.

우연히 들어간 이곳은, 뜻밖에도 킴벌리 최대의 원주민 마을.

방문하려면 원래는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한단다.

사고 덕에 애보리진의 생활을 생생하게 목격한 대원들은

그렇게 오늘의 두 번째 선물을 받아 들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점심식사는 차 안에서. 땅콩버터 바른 호밀빵과 사과 한 알.

그런데 문제의 2호차, 길가의 멋진 바오밥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문장렬, 김승수, 이경, 문순표, 홍종연선생님,

우리의 못말리는 로맨티스트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얼른 내려 나무를 두들겨도 보고, 쓰다듬어도 보다가, 아예 그 아래 점심상을 차린다. 

먼저 도착한 차들이 잠시 걱정하다가, 스쳐온 2호차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는 점에서, 사고는 아니리라 잠정 결론을 내렸다.

 

크고 작은 엇갈림에도, 새로 도입한 작전들이 잘 맞아떨어져

다섯 차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월도 해가며 광속도로 달렸고

Broom을 이미 점심나절에 지나쳐 Fizroy Crossing, Halls Creek까지 주파해 버렸다.

최대한 벙글벙글에 접근하는 것이 과제였으므로 목표는 계속 업그레이드되었고,

결국엔 밤운전으로 벙글벙글레인지 코앞까지 가기로 최종목표가 결정되었다.

온종일 차 안에서 보낸 어르신들은 목과 어깨가 뻐근하다 하셔서

나는 아빠안마 이십년 경력을 살려 어른들을 주물러드리는 것으로 마음을 표했다.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앉은 그 밤, 우리는 벙글벙글레인지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하루만에 기적처럼 반전된 상황에, 벙글벙글 웃고 떠들며 서로를 격려했다.

박사님도 오래간만에 시름을 내려 놓고 편히 웃으셨다.

호주탐사는 올해로 네번째. 지난번 인원은 칠십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의견도 분분했던 모양이다. 젠틀맨십, 에티켓을 외치는 목소리 아래

운전도 규정속도 내, 야영도 허가장소 내에서만 하는 바람에

멀리까지 가보지 못하고, 별자리도 불빛에 자주 가리웠다고 한다.

그들의 소신도 일리가 있지만, 박사님이 중시하는 바는 다르다.

우리가 호주에 온 이유가 대자연의 법칙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면

사소하고 인위적인 인간의 법칙들은 잠시 접어두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관점을 벗고 진정 겸허하게, 있는 그대로의 대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위험한 질주가, 결코 무용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언제나 선택의 문제라면

대자연을 만나겠다는 참 단순하고도 순수한 열정,

그 열정 아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무릅쓰고, 맞춰가면서

스물네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조화롭게 움직여 여기까지 왔다는 것.

아니 하나의 유기체였다면 오히려 할 수 없었을 일을

서로의 열정으로 서로를 감염시키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나는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