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여섯째날

- 지구를 만나다

   (137억년 우주의진화 제8강 <지구> 현장답사)

 

대양을 건너 대륙을 건너 닿은 곳.

고작 30년전 인간에게 들킨 이 곳에 22억년 전의 지구가 있다.

어린이지구는 인간, 공룡, 삼엽충 따위가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NASA는 지구에서 화성과 가장 비슷한 장소가 서호주라 하였다.

그래, 먼 옛날에는 지구도 화성도 금성도, 서로 닮은 얼굴이었겠지.

지구는 낯설고 스산한 풍경이었으리라.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벙글벙글레인지로 들어선다.

 

이 곳의 크기는 한반도만하여서, 걸어서는 한 눈에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셋 씩 조를 이루어 헬리콥터를 타고 굽어보기로 했다.

헬기가 땅을 박차고 오르자, 가장 먼저 펼쳐진 것은 끝없는 평야,

상처처럼 깊게 벌어진 계곡,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웅성웅성 모여 서 있는 수십만 채의 봉우리.

우리의 시야 안, 그 드넓은 지구 위에, 움직이는 물체라곤 단 하나 없다.

헬기가 떨어뜨리는 그림자만이 땅 위에서 외로이 우리를 좇는다.

이 광활한 곳에 정말 우리 뿐인가?

나는 가슴이 먹먹해서 두 손으로 확성기를 만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안녕, 거기 누구 없어요?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못하고 내 목소리는 대기중에 흩뿌려진다.

절대적인 적막 속에 프로펠러 소리만 어색하게 겉돌고 있다.

 

태초의 지구는 참말, 조용했을 것이다.

개미라도 거인으로 오해될 만큼 작은 미생물들의 시간.

지구는 아직 생명의 행성으로 불리기에는 너무 고요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생명체들이 나타나 북적거리기 전, 말없는 암석으로 가득찬 어린 행성.

내 눈에 비친 어린 지구는, 조금 외로워 보였다.

그렇게 혼자 누워 나를 바라보는 지구.

지구라는 행성을 만나러 가자던 박사님의 말뜻을,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도시에서 태어난 나와 같은 아이들은, 자연을 조금 두려워한다.

어른들은 도시에서 답답함을 느끼지만

우리들은 오히려 도시를 벗어날 때 불안감을 느낀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때에만 살아있다는 활기를 느끼고

산과 들에서는 생명의 온기를 감지해내지 못한다.

자연과 교감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서일 것이다.

난생 처음 만나보는 대자연과의 육일간의 내외 끝에,

나는 아주 서툴게, 자연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린 지구는 과연 낯설었으나, 그러나 아름다왔다.

가장 화성과 닮았다던 이곳은 아이러니하게, 아무리 봐도, 그래도, 지구였다.

삭막한 화성의 풍경을 각오했던 나는, 조금 안심했다.

우리들의 지구는 가장 낯선 순간에도, 다른 별만큼 무서운 풍경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친근한 풍경, 그 유순한 봉우리들 위에, 나는 마음을 놓았다.

언젠가는 우리도 흩어져, 흙이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어느 곳으로 가게 되든, 이 지구에만 머물 수 있다면.

무섭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여기까지 흘러들어, 저 둥그런 봉우리가 된다 해도 말이다.

 

 

 

- 이유 있는 여유

 

 

우리는 회군하기 시작했다.

돌아갈 거리가 빠듯한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여유로웠다.

우리는 더 마음 놓고 웃고, 떠들고, 농담을 주고 받았고,

멋진 곳이 나타나면 차를 멈추고 마음껏 거닐기도 했다.

그러고나서 길에 오르면 이미 조금 전의 길이 아니었다.

차창밖의 들꽃에게 속삭인다.

이젠 너의 향기를 알아. 보기보다 네 잎사귀가 부드럽다는 것도.

누군가는 이미 탐사의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일거라 했고,

누군가는 마음만 먹으면 달릴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을 알기 때문일거라 했다.

고민해오던 한 덩어리의 실타래가 풀리고 있었다.

 

나는 욕심이 많아서, 미래의 꿈도, 순간의 행복도, 놓치기가 싫었다.

허나 두 가지는 양립불가능할 때가 많아서, 자주 나를 고민스럽게 했다.

고시공부를 할 때는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참아야 했다.

소중한 이들에게 소홀했고, 스물 두셋 대학생으로 하고 싶던 많은 일들,

세계일주같은 거창한 것부터 화장하고 예쁜 옷 입기 같은 사소한 것까지,

공부를 빼면 내게 남은 것은 무얼까하는 공허감이 밀려왔다.

스스로의 등살에 떠밀려 매일밤 악몽을 꾸었고, 수업을 듣다 여러 번 쓰러졌다.

죽었으면 속 편하겠다고 울며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목부터 등허리 팔목까지 뒤덮은 파스와 하루 너댓 병의 박카스.

시험을 마치고 걸어나오던 날, 결과를 떠나 시험을 마친것 만으로도 다행이라 자위했다.

시간을 돌리더라도 더 할 수는 없을만큼 최선을 다했기에,

떨어져도 핑계는 오직 나의 능력의 부족이기에, 억울하지는 않으리라 여겨졌다.

합격자발표날. 소리도 못내고 얼굴을 감싸고 울던 순간부터,

종로부터 광화문까지 뛰어다니던 순간까지, 이제는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 박자세를 만나버린 것이었다.

 

이번엔 과학이라니. 교수님 강의를 따라가려면 물리학을 해야 했고,

그러려면 수학을 해야 했고, 화학, 생물학, 지질학, 진화학, 도무지 끝이 없었다!

게다가 박자세의 놀라운 회원들은 직업 불문, 전공 불문, 나이 불문,

그 많은 공부를 열정적으로 소화해내고 있었다!

우주의 폭발로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두루마리처럼 펼쳐지고,

물질들이 뭉쳐 지구를 만들고, 지구의 품 안에서 물질은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체는 복잡해지며 인간이 되고, 인간의 뇌에 의식이 출현하여

결국은 물질이 물질을 스스로 의식하게 되기까지의 긴 여정.

이 세상 모든 것의 역사를 추적해 보자는 것이, <137억년 우주의 진화>강의다.

매주 일요일 네시간씩 삼년째 모여 긴 여정에 동참해 온 회원들이, 공부한 내용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떠난 것이 바로 <서호주 학습탐사>다.

지구가 생명의 보고가 되기 위해 거쳐야 했던 가장 결정적인 사건,

산소혁명의 잔해로 남은 것이 바로 <벙글벙글레인지>의 처트층이고,

그 혁명의 주인공들이 바로 <샤크베이>의 시아노박테리아다.

오랜 공부 끝에 이 곳에 온 어른들의 감격은, 어렴풋한 나의 느낌보다 훨씬 진해 보인다.

여섯번째 탐사, 더 많이 공부하고 올 때마다 더 진한 풍경이 보인다고 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어른들은 함께 주기율표와 별자리를 외우느라 여념이 없다.

내 마음 속만 아직도 시끄러웠다.

 

오늘, 여행의 5부능선을 넘는 내리막길에서 나는 처음 완연한 여유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목표지점에 도달했다는 결과때문이 아님을 직감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이제는 편히 쉬어도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었다.

이틀 전 이 여유를 가불받았다면 지금처럼 편안한 마음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삶의 여유는, 가지고 싶다고 가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때가 있는지 모른다.

그런 것은 훗날 언덕을 넘는 순간, 자연히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 전까지는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가는 데까지 한 번 가 보는 거다.

어느 날 수업, 박사님의 마지막 말씀이 문득 귓가에 메아리쳤다.

 

어린왕자의 별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천문학자의 별을 거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