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아홉째날

- 사람, 사람, 사람의 변주곡

 

 

              제 1악장 : 김기영선생님과의 협주곡

호주행 비행기. 우리는 나란히 그리고 조금은 어색하게 앉아 있다. 선생님이 세계 유기농대회를 아느냐 물으신다. 웬 유기농? 알고보니 70년대 농민운동의 선구자시다. 국립호텔 즉 감옥에도 묵으셨다. 무서운 분이다. 삼년간의 도망자 생활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식사는 하루 두 번, 아침 열시와 오후 다섯시. 몸이 가벼워야 하므로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언제 거처를 옮길지 모르므로 짐도 많아서는 안 된다. 한 편의 액션스릴러물이다. 도망생활 도중 부인을 만나셨다. 함께 도망을 하다 사랑이 싹텄다. 이번엔 로맨스물이다. 농사가 사람의 근본이라 믿고 계신다. 바르게 길러 바르게 먹어야 바르게 자란다. 어린이들에게 주입식 교육이 아닌 진짜 꿈을 찾아주기 위해 유기농교실을 열고 계신다. 이제는 다큐멘터리다. 나이를 잊은 순수한 꿈과 열정에 옆에 앉은 나도 덩달아 푸르러진다. 

             제 2악장 : 김승수선생님과의 협주곡         

백두대간을 종주하셨다는 선생님은 산처럼 말이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묵묵히 일하고 계신다. 다가서기가 쉽진 않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정이 깊으시다. 따스하고 든든하다. 우리 아빠와 연세가 같다. 어느새 나는 선생님만 보면 아빠!'하며 졸랑졸랑 쫓아 다니고 있다. 그때마다 아빠는 뒤를 돌아보며 딸내미! 하고 따뜻하게 웃어 보이신다. 하루는 주머니에서 초콜릿 세 개를 꺼내 손에 쥐어 주신다. -'아껴뒀어!'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폴짝폴짝 뛴다. 아, 선물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를 위해 작은 것이라도 주머니에 따로 챙겨 두는 것. 기회를 살펴 그 사람 앞에 움켜쥔 주먹을 불쑥 내미는 것. 나는 왼 손이 주머니를 스칠 때마다 아빠의 마음을 기억한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까워서 초콜릿은 먹지도 못한다.

             제 3악장 : 김제수선생님과의 협주곡

정오의 벙글벙글레인지. 우리는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산책을 나선다.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느냐 물으신다. 우리는 햇빛 살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날에 이해할 수 없었던 뫼르소의 행동을 이제는 이해한다 하신다. 젊은 날에 사회적 법칙과 관습에 너무 갇혀 살았다고, 이제 와서 보니 그것들이 생각보다 그리 중요치 아니하다 하신다. 내 날개에 묶인 긴 밧줄을 살짝 풀어주신다. 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에게 며늘아기를 제안하여 아드님의 날개를 묶으려 하신다. 아들 인생에 관여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관여하고 싶다 하신다. 이렇게 멋진 선생님이 시아버님이라면 참 좋겠다. 아드님은 제외하고라도 우리끼리 시아버님과 며늘아기가 되기로 한다.

             제 4악장 : 김향수선생님과의 협주곡

로드하우스에서의 휴식시간. 뙤약볓을 피해 우리는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다. 창밖에 새까만 애보리진들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피부병을 앓는 검은 엄마가 검은 아기를 안고 동전을 구걸하고 있다. 선생님의 검고 큰 눈동자에 그림자가 진다. 그 눈동자로 꼼짝 않고 나를 보며 말하신다. 여자의 삶에서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만, 아이는 어쩌면 전부일지 모른다고. 종족 번식은 모든 동물의 기본적인 사명이라고. 인간이 동물이기를 거부할 때, 열심히 살고 났는데 결과가 없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고. 선생님의 눈동자가 내 가슴 속에 봉인된다. 마법의 주문에 걸렸으니 아이를 넷은 낳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제 5악장 : 김현미선생님과의 협주곡

야생화 만발한 들판에 아침이 오고 있다. 풀잎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 풀내음을 헤치고 산책을 떠나는 현미이모.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말없이 반 걸음 옆에 선다. 우리는 속도를 맞추어 걷는다. 맨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새벽강의를 듣지 못하는 게으른 나에게 강의 내용을 전해주곤 하는 이모. 우리는 감정과 기억에 관한 오늘 새벽의 강의를 곱씹어 본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뼈다귀에 대해 생각한다. 이모가 되뇌인다. 이것만이 인간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차마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걸로도 우리는 충분한거야. 드디어 충분해진거야. 오랜 방황 끝에 인류가 조금씩 충분해져가는 이 시간에, 이 공간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오늘 아침 이모는 특별히 행복해 보인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는 이모의 눈가에도 입가에도 발자욱에도 옅은 미소가 서려 있다.

             제6악장 : 남원직선생님과의 협주곡

식곤증이 몰려오는 나른한 오후. 차 안은 서로 기대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만 오르락내리락 한다. 운전석의 선생님도 조금 졸리웁다. 조수석의 나는 간간이 아몬드와 피스타치오와 마카다미오 따위를 집어 선생님에게 쥐어주며 잠을 쫓아 본다. 그래도 몰려드는 잠을 멀리멀리 보내기 위해 꼬치꼬치 살아온 이야기를 물어 본다. 자는 이들이 깰까 낮은 목소리로 운전자와 조수가 시간여행을 떠난다. 대학시절 품었던 너무 크고 막연했던 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세계평화를 꿈꾸던 젊은이는 세상의 책을 다 읽을 심산이었다. 사방으로 팔다리를 내저으며 세상을 헤엄쳤지만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구체적인 형체를 가진 꿈을 빚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청년은 이제 작지만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들로 꿈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호주의 붉은 흙과 바람과 별과 코알라똥도 멋진 재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제7악장 : 노복미선생님과의 협주곡

벌판을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도, 선생님은 김기영선생님과 열심히 주기율표를 외우고 계신다. 저 많은 원소를 언제 다 외우나 싶었는데, 어느새 마지막 원소를 외우고 계신다. 드디어 끝났구나 싶자, 이번에는 남반구 별자리를 외우기 시작하신다. 텐트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옆에 누우신 선생님이 지나가던 박종환선생님을 불러 세워 양자역학의 기본원리에 대해 질문하신다. 그 열정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다홍빛 숄을 두르신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나 지적 호기심과 우아함을 잃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즐기고 있다 하신다. 무슨 복을 지었길래 이렇게 좋은 시간을 선물 받았는지 모른다 하신다. 선생님의 말씀에서 삶의 여유와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제8악장 : 문상호선생님과의 협주곡

새롭게 차량이 배정되었다. 4호차는 모이자마자 서로가 너무 궁금하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기로 한다. 문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듣고 있던 모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형편이 어려웠으나 더 공부가 하고 싶었던 선생님은 달랑 비행기표만 끊어 미국으로 날아간다. 낚시대회 상금으로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아버지의 구식 낚싯대를 빌려 출전하지만 어림 없다. 우승이면 영화가 되지만 갑작스레 현실이 된다. 구두닦이로 시작해 막노동에 영업사원까지 발로 뛰면서 대학원에 진학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기까지 시행착오가 계속되고 대학원을 다섯 번 바꾼다. 은사님의 소개로 처음 만난 여인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새벽동이 틀 무렵 청혼을 한다. 그 날 아침 두 사람은 은사님댁 거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지금 그는 다섯 번째 대학원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다. 그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은 것 같다. 그는 네 아이의 아빠다. 그는 열정이 있어 부자이고 사랑이 있어 부자이다. 털복숭이 코알라인형과 캥거루인형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내민, 그의 배낭이 말해주고 있다.

             제9악장 : 문순표선생님과의 협주곡

우리의 대화는 언제든지 유쾌하다. 동그란 눈망울과 톡톡 튀는 목소리. 선생님은 주위 사람까지 달콤하게 만드는 별사탕같은 사람이다. 비결을 묻는 나에게 살짝 귀띔하신다. 나는 매일 매일을 새롭게 태어나려 해요. 고정된 我想을 없애고 매 순간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자기는 아직 젊으니까, 마음을 더 활짝 열어 봐요. 편식하려 하지 말고 모든 경험,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 해봐요. 그러면 나는 온전하게 상대방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이 진짜 커뮤니케이션이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예요. 선생님의 눈을 통해서 나는 얼핏 행복이란 도둑고양이의 실루엣을 본다. 행복의 열쇠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선생님은 알고 계신 것만 같다. 선생님의 웃음소리에서 짤랑짤랑 열쇠소리가 들려온다.

             제10악장 : 문장렬선생님과의 협주곡

공포의 오프로드, 우리는 길가에 납작 붙어서 엉금엉금 기고 있다. 1호차에서 현역 육군 대령 문삼촌이 진두지휘를 하신다. 무전기로 흘러나오는 절도 있는 지시사항과 이상! 하는 씩씩한 목소리가 듣기만 해도 든든하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보면 딱딱함은 온데간데 없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활짝 웃는 삼촌이 서 있다. 물리학박사인 삼촌은 사람이 왜 걸리버처럼 거인이 되거나 난장이처럼 작아질 수 없고 딱 우리의 크기여야만 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재미나게 설명해 주신다. 나에게 인간이 만든 자연법(natural law)만 아니라 우주가 만든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도 공부하라 하신다. 물질이 물질을 생각하는 놀라운 현상에 대하여 인간이라 이름 붙이고 매번 감탄하신다. 밤이면 별들만 놓고 잠들기가 미안하다며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신다. 그런 삼촌의 정체가 신기해서 나는 한 번 더 올려다본다. 

             제11악장 : 박종환선생님과의 협주곡

선배님은 오늘도 야외취침 준비중이다. 틈만 나면 텐트를 마다하고 밤하늘을 보며 잠들 수 있는 들판에다 자리를 깐다. 벙글벙글에서도 혼자 트래킹을 가서 방향감각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길을 잃었다는 배짱가다. 한 마리 야생동물처럼 거의 호주 벌판에 적응을 마치신 것 같다. 화성에 내려놓고 다시 가보면 오히려 화성이 지구로 바뀌어 있을 것 같다. 선배님은 책을 읽을 때에도, 수업을 들을 때에도, 스폰지처럼 있는 그대로 흡수한다 하신다. 자꾸 나의 자아를 투영하려 하지 말고 일단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들으라 하신다. 박사님께서 어떤 강의를 하시든지 놀라운 속도로 많은 정보를 흡수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 어떤 야생동물인가 했더니, 무지개빛 카멜레온이었다.

             제12악장 : 서지미선생님과의 협주곡

매일밤 우리 넷은 한지붕 아래 잠이 든다. 찬바람이 파고드는 통에 침낭을 턱끝까지 끌어당겨 돌돌 말고 얼굴만 내 놓은 우리는 네 마리 애벌레가 되어 소곤거린다. 천상 소녀같은 선생님은 말도 참 예쁘게 하신다. 광자이모를 부를 때면 언제나 조용히 포톤! 하고 말을 꺼내신다. 한참을 안 보이셔서 찾아보면 어둠 속에서 포톤이모와 함께 삼각대를 세워 놓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빼다 카메라 속에 담아 놓고 있다. 아침이면 함께 차를 타고 떠날 사람들을 위해 향긋한 들꽃을 꺾어다 차 안에 담아 놓는다. 오늘밤이면 지미선생님의 애벌레는 누에고치를 벗고 어여쁜 나비가 되어 그 들꽃의 향기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제13악장 : 송영석선생님과의 협주곡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달려오는 사람, 바로 송삼촌이다. 가스불을 붙이려고 낑낑대면 라이터를 들고 달려오고, 5호차가 비포장도로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 때에도 구조대를 이끌고 달려와서 조카, 삼촌왔다! 하신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사회를 이루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 때문이라 믿으신다. 어른이 진정 어른스러운 것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 때라 하신다. 그는 아름다운 어른이 어떤 모습인지를 조카에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멋진 삼촌이다. 단지 우리 외삼촌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삼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니다. 여행 내내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삼촌을 외치고, 고민이 생기면 삼촌과 의논했다. 이제는 나도 삼촌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 조카는 삼촌처럼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 때 조카도 어느새 어른이 될 것이다.

             제14악장 : 신양수선생님과의 협주곡

카리지니의 오프로드에서 5호차 운전대를 잡은 신선생님, 중학교 삼년간 홍성에서 비포장도로 통학 경험이 있으시다. 다양한 실험 후, 빨리 가야 승차감이 부드럽다고 결론내린다. 쌩하니 4,3,2호차를 추월하고서 유유히 기다기를 수차례. 1호차에서 경고성 무전이 온다. “5호차, 무슨 일 있습니까?” “아무 일 없습니다! 제가 홍성에서 삼년간 통학 경험이...” 5호차는 신이 났다. “자, 이륙합니다!” “오빠 달려!” “여러분, 재밌죠?” 혼미해진 홍경화선생님, “내 리모콘 아니, 무전기 어디갔지?” 신선생님 답이 압권이다.“그냥 무전 올 때까지 놔두면 되지.” 가지에 부딪혀 백미러가 접히자, “그냥 둬요, 제 얼굴도 보이고 좋은데요.” 신바람 난 나, 무전기 들고 전차량에 장난무전 날린다. “아아, 여기는 5호차. 여러분 드디어 화성에 도착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김기영선생님도 한마디, “먼지때문에 저렇게들 기어가는 것 같은데, 그냥 빨리 가서 닦는 게 낫지. 천천히 가면 천천히 묻어. 골고루 빠짐없이 묻어. 곱게는 묻겠지. 여성들 화장할 때랑 똑같잖어. 천천히해야 잘먹지.” 5호차는 데굴데굴 구르며 만담삼매경이다. 어디선가 정체모를 폭발음이 난다. 원체 덜컹대던 터라 그냥 가는데, 기분이 찜찜하다. 내려보니 뒷바퀴가 형체도 없다. 요컨대 우리는, 조난당하고 말았다! 한참을 기다려 극적으로 구조되기까지, 5호차 사람들은 더 애틋해져버렸다. 신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자기!”가 되었다. 자기 자기 하다보니, 너도 자기, 나도 자기, 탐사가 끝날 때까지 5호차의 귀 간지러운 “자기야~” 타령은 계속되었다.               제15악장 : 이 경선생님과의 협주곡

처음 보았을 때 하얗고 투명했던 선생님에게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영롱한 빛이 났다. 말없이 앉아 계셔도 존재감이 느껴졌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어느 날, 나의 마음은 설레었다. 의사이신 선생님은 우리의 신체는 신이 아닐까 할 정도로 완벽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참으로 불완전해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허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하셨다. 그 이유가, 인간이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일거라 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인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바깥을 생각하는 것. 그게 전부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지 모른다고. 치열하게 공부를 하든, 치열하게 현실에 맞서 살아가든, 모두 같은 거라고. 과연 치열한가가 중요하다고. 아, 나는 이 여행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을 얼마나 더 받으려 하는가.

             제16악장 : 이언희선생님과의 협주곡

누군가는 텐트를 치고, 누군가는 식사를 준비하는 저녁시간. 매일매일 식사당번은 정해져 있지만, 선생님은 열이틀 내내 당번인 것처럼 보인다. 나도 옆에 붙어 잔심부름이라도 하려 노력하지만, 썩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데 선생님께서 자그맣게 속삭이신다. 슬아야, 막내라고 사람들이 이것저것 시켜도 이해해야 해. 막내는 원래 그런거야. 참 잘 하고 있어. 알지? 냄비 속을 살펴보느라 바쁜 와중에도 선생님은 내 마음까지 살펴보려 하신다. 호주로 오며 스스로 다짐 했었다. 어른들보다 무조건 먼저 일어서고 나중에 앉자고.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자고. 입은 열지 말고 몸부터 움직이자고. 그러나 밥이고 운전이고 어설픈 나는 무얼 해도 스스로가 내내 부끄럽기만 하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한 줄기 바람처럼 살짝 내 곁을 다녀 가신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처음 마음처럼 새로워진다.

             제17악장 : 이원구선생님과의 협주곡

야영지에는 화장실이 없으므로 볼일을 보려면 먼 데까지 걸어 나가 몸을 숨겨야 한다. 캄캄한 들길을 걸어가다 이쯤이면 되었나 주위를 살피는데, 인기척이 들린다. 선생님이 홀로 별을 보고 계셨다. 어둠 속에서 우연히 조우한 우리는 못다한 이야기를 꽃피운다. 선생님께도 첫 탐사인지라 조금은 이방인같은 느낌을 공유한다. 여기 온 사람들이 참 순수하다 하신다. 눈 앞의 이익만 좇기에도 급급한 세상에 참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다. 당장 이익이 되는 일만 하며 사는 것이 결코 지름길은 아니다. 법조인이 된다 해서 법에만 코를 박고 살지는 말라 하신다. 옳다고 믿는 길을 가다보면 거기서부터 다시 길이 생겨날 것이다. 한편으론 걱정스럽다. 비현실적인 사람들은 보통 돈이 없다. 대원들이 현실도 야무지게 챙겨서 오래도록 지금처럼 공부할 수 있기를 소망하신다. 선생님의 세심한 마음이 나를 울리려고 한다.

             제18악장 : 이은호선생님과의 협주곡

로드하우스에 내리며 어쩐지 이곳이 낯익다 하신다. 지난 번 탐사 때 거쳐가신 모양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저기 저 나무 밑에 외롭게 서 있었어... 선생님의 말끝에선 언제나 바람소리가 난다.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며 살아오신 분이다. 수많은 곳을 스쳐지나며 깊어가는 바람처럼, 선생님의 목소리엔 대륙에서 불어오는 모래냄새, 바스락거리는 낙엽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사람들이 그려놓은 하늘의 지도이다. 길 위의 사람들은 이 지도를 펼쳐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가늠한다. 진정으로 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별 하나마다 자신의 서정이 묻어 있다 하였다. 우리들의 밤하늘은 저녁마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서정으로 함께 물들어 간다. 선생님이 돌아서 오신 먼 길이 밤하늘의 별들 사이, 그 골목골목마다 애틋하게 펼쳐져 있다.

             제19악장 : 이홍윤선생님과의 협주곡

어느 밤에 우리는 양주 한 병을 놓고 둘러 앉았다. 처음에는 술잔에 술이 찰랑찰랑 후하게 돌아가더니, 남은 양이 줄어들수록 술이 점점 잔 바닥으로 깔린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병권을 쥔 송삼촌의 엄격한 평등분배가 잇따른다. 옹기종기 티격태격 마시니 맛이 아주 일품이다. 이홍윤선생님께서 한 마디 하신다. -별들이 안주로 보이니, 아까워서 그냥 잠들 수 있나. 내가 어른들 앞에서 편히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있자, 다시 한 번 명대사를 날리신다. -우주 137억년 앞에서, 40살 차이가 대수냐? 삶의 여유와 위트가 가득한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다. -“아이구, 별이 도네!” “별이 도나? 취해서 당신이 도는 거지!” “아, 별이 돌든, 내가 돌든, 누가 돌든!”. 밤은 저벅저벅 깊어가고, 별 하나에 농담 한마디, 별 하나에 술 한잔, 쥐꼬리만한 평등분배 앞에서도 우리들은 찍소리 못하고 주거니 받거니. 우리는 빙글빙글 돌며 별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꿈으로 향하였다.

             제20악장 : 진광자선생님과의 협주곡

옆사람 얼굴들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밤. 별들을 올려다보는 내 어깨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나는 광자이모와 팔짱을 끼고 별을 헤아리고 있다. 남반구의 별자리지도를 동화같은 이야기로 줄줄이 엮어 외운 이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동화를 들려준다. 직녀가 흠모하는 헤라클레스 아래에는 페가수스가 달리고 백조가 날고...... 이모의 목소리가 체온 만큼이나 따뜻하다. 이모는 이름만큼이나(광자, photon, 빛 알갱이) 햇살같은 사람이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현미이모와 광자이모, 호주가 이렇게 멋진 이모를 두 명이나 선물해 주었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이번에는 둘이 함께 다시 찬찬히 줄거리를 되새김질 한다. 나는 이모 팔을 더 꼬옥 붙잡아 본다.

             제21악장 : 홍경화선생님과의 협주곡

한국행 비행기 안, 홍언니 옆에 압둘라가 앉아 있다. 나의 단짝 홍언니를 사수하기 위해 압둘라를 몰아내고 좌석을 바꾼다. 압둘라는 석유왕자였을지도 모르는데. 괜시리 언니의 앞길을 막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구름바다에 둥둥 떠서 와인을 마신다. 일단 연애상담부터 시작한다. 탁 트인 호주의 들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시원시원한 언니의 해결책에 속이 후련하다. 그런데 대화가 우리답지 않게 점점 학구적으로 흘러간다. 아이비리그의 물리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부터, 미적분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까지, 여러 가지 정보를 줄줄이 알려준다. 언니가 새삼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놀 때는 화끈하게, 공부할 때는 더 화끈하게 하는, 진짜 멋쟁이 언니였다. 양파처럼 알면 알수록 더욱 매력적인 언니일 것 같다. 이 언니, 호주에서처럼 한국에 가서도 졸졸 쫓아다녀야겠다.

             제22악장 : 홍종연선생님과의 협주곡

퍼스로 들어가기 전날 밤, 야영은 오늘밤이 마지막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두 시, 모닥불을 지펴 놓고 세 여자가 모여 앉았다. 두 명의 홍언니와 나. 마지막으로 보는 밤하늘이 못내 아쉬워, 별들에게 작별 인사만 두 시간 째다.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탐사 오기 전부터, 탐사 중, 그리고 아마 탐사 후에도, 발로 뛰어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챙기느라 본인을 깜빡 깜빡 잊어버릴, 천사표 총무님. 한숨 한 자락, 웃음 두어 자락이 모닥불과 함께 나부낀다. 복숭아꽃 흩날리는 아래는 아니지만, 별꽃이 가득한 하늘 아래 의자매가 되어, 쪼르르 모여 있는 세 별을 가리키며 우리 셋의 별자리로 임명한다.

             제23악장 : 척추동물심포니오케스트라

탐사 전 마지막 모임, 박사님이 탐사에서 중요한 것 세 가지를 꼽겠다 하시며 칠판에 1번, 2번, 3번을 적으신다. 그러더니 1번 옆에 사람, 2번 옆에도 사람, 3번 옆에도 사람이라 쓴다. 탐사를 떠나며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어른들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탐사 첫날 혼자 어색하게 서 있던 나는, 격의 없이 대해 주시고 살아온 날들의 경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주시는 어른들 덕분에 하루가 갈수록 더 행복하고 풍요로워졌다. 광막한 우주의 서로 다른 시공에 무목적적으로 흩어져 있는 물질들.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서로 다른 두 물질이 그저 우연히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인연이란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아닌, 그 엄청난 우연 자체일지도 모른다. 박사님은 절지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오면서 일어난 드라마틱한 사건에 대해 알려주신 적 있다. 단단한 뼈가 안으로, 부드러운 근육이 밖으로 나오면서, 동물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생물은 오직 척추동물뿐이다. 사람, 사람, 사람의 변주곡을 멋지게 연주해낸 우리는 바로, ‘척추동물심포니오케스트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