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열흘째

- 서랍을 정리하다

     (박사님과의 동승)

 

가끔가다 나는 무엇을 꿰뚫어 볼 적이 있다. 그럴때면 내가 혹여 대단한 사람은 아닌가 잠시 의심을 해본다. 이를테면 바오밥나무 생긴것을 보고 욕심꾸러기같다고 말한 적 있는데, 어린왕자를 기억하는 이가 실은 소혹성B612를 위협하는 나쁜나무라고 귀띰해줬다. 몽골 고비사막에 서서 왠일인지 하늘에 깔려 죽을것 같다고 했더니, 누군가 여기는 정말로 해발고도 1600m라고도 말해줬다. 그래도 나는 실은 헛소리를 더 잘한다. 타율로 치면 9할은 엉터리다. 무언가 직감이 드는 날엔 시를 쓴다. 그럴듯한 것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길 살짜기 기대해 본다. 나도 모르던 멋진 풍경이 내 안에 숨어 있었기를. 이건 거의 강도다. 나는 너무 게으르거나 무책임한지도 모른다.

 

탐사 내내 박사님은 장기기억장치 어쩌고 뭐라카노 하셨다.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차이는 검색엔진에 있다. 방금 보고 들은 것만 생각하면 아마추어다.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합하는 시스템을 세워, 새로운 정보는 정확한 위치에 넣고,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도록 머릿속 서랍정리를 잘 해두면 전문가다. 서랍정리를 해버리고 나면, 내 안의 풍경은 너무 말끔해질 것이다. 더이상, 눈을 크게 뜨고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일은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겁이 났다.

 

박사님과 동승하던 날, 석양이 가라앉는 벌판을 달리며 나는 물었다. 직관을 믿지 않으시냐고 묻는 나의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다. 박사님이 읽던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직관이란 많은 공부 끝에 오는 어떤 것이라고. 축적된 지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 닥쳐왔을 때 스스로의 검색엔진을 가동해 자신이 가진 정보들을 새로이 결합하는 것. 그것이 직관이라고. 인간은 그 이상은 할 수 없다고. 인간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하지 않아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는 없기에, 창조를 위해서는 그 이전에 배움의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다. 유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가 영원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인 것 같다. 그러나  마음먹는다고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 머리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많은 생각들이,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파편들이다. 인간이 경이로운 이유는, 시점을 가졌다는 데에 있다. 물질들은 아무런 객관적 의미 없이 검은 우주를 떠다닌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이 스스로의 중력으로 물질을 끌어모아 의미를 만들어낸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릇이 특별해지는 방법은 세상에 없던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재료를 모아 세상에 없던 레시피로 요리하는 것이다. 새로운 레시피란, 하나의 시점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릇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음식을 담고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저 살아있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인간이 존재하는 의의는 세상에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들을 처음으로 관계맺어 주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아교풀과 같다.

 

나는 서랍정리를 하지 않으려 했다. 내 안을 미개척지로 놓아두려 했다. 각각의 서랍의 총합에 불과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릇이 되기가 두려웠다. 그릇이 그릇을 위해 존재하려 했다. 그래서 빈 그릇이 될 뻔 했다. 이제 나는 믿는다. 반듯한 서랍들을 가진다고 책상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책상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는 서랍을 열고 필요한 것들을 꺼낼 것이다. 그리고는 책상 앞에 앉아 그것들을 이리저리 조립할 것이다. 세상에 없던 물건을 발명할 것이다. 그 물건으로, 출구가 없는 세상에 작은 구멍을 뚫을 것이다. 우주보다 무거운 별은 끝내, 우주에 구멍(black hole)을 낸다.

 

끝이 보이나요? 박사님을 만나 드린 나의 첫 질문이었다. 한줌 재가 된 형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는 박사님이다. 그 답을 찾으셨는지 알고 싶었다. 박사님은, 해결되는 질문이 아니라 해소되는 질문이라 하셨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은 채 평생 같은 질문만 되풀이한다셨다. 그러나 과학이 과연 어디까지 알려줄 수 있나요? 나는 다시 물었다. 박사님은 한계를 묻기 전에, 과학이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알려 주었는지 보라셨다. 간밤에 나는 별들 아래서, 도대체 인간이 왜 저들을 보며 감탄하는지 질문했었다. 필요에 의해 진화했을 터인데,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는 물음이었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자신의 한계로 슬퍼하는 일도 없었을테니까. 답이 없을 거라 여겼던 나의 질문에, 뜻밖에 한 마디로 답하셨다. 감정은 기억을 위해 개발된 것이라고. 인간에게 무기는 이성뿐이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기억해야 했다고. 그러나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기억할 수는 없으므로 동물이 자연에 체취를 남기듯, 인간은 자연에 감정을 뿌렸다고. 별들의 기억에 가려, 달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던 이 경선생님이 떠올랐다. 동물로서의 인간을 알고 나면 그렇게, 어떤 질문들은 사라져버린다. 해결이 아니라 해소된다는 것은, 질문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과학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인문학 이전에 자연과학을 먼저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창발을 위해서는 환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집을 지으려면 벽돌을 빚어야 한다. 사람은 뼈 없이는 바로 설 수가 없다. 물렁하게는 살고 싶지 않아졌다. 무척추동물로부터 등뼈를 만들어 일어서기까지, 태어나고 사라져간 수많은 친구들에게 미안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