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위가 너무 시끄럽다. 온갖 욕심으로, 아니면 덩달아서, 아니면 출발점도 종착점도 모른 채 무한 질주하는 그래서 사람의 마음도 그 주위도 시끄럽고 번거롭기만 하다. 무엇인가 나사가 빠진 탓인지 오히려 더 시끄러운 데로 죄다 몰려다닌다. 시끄러울수록 더 인기폭발이다. 그런 탓인지 죄다 자기가 더 시끄럽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또한 바쁘기도 하다.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은,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이것도 가져야하고 저것도 가져야하며, 이것도 배워야 하고 저것도 배워야 하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찬 우리네 마음과 주변은 온통 바쁘기만 하다. 안 바쁘면 또 계획하고 더 바빠지려고 작정하며, 바빠지면 남들보다 더 바빠지려는 세상이다. 답이 안나온다.

 

언제쯤 우리는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 갈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 같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잠은 내일 일로 분주하다. , 내일의 시간과 세계가 나의 고향이라면, 마치 억천 겁을 그 자리에서 살았던 듯 편안한 둥지라면, 오늘 꾸는 꿈은 달콤할텐데. 한없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냥 낮의 연장이다. 반복이다. 그렇다면 다음 날도 역시 같은 것의 반복. 역시 답이 없다..

 

문제는 너무도 바삐 움직이는 세상이기에 어디에다 정을 둘 데가 없다는 것이다. 죄다 바쁜 듯한데 나도 덩달아 바쁘다면, 세상은 아마 더 바빠지리라. 마치 엑셀라이타를 밟은 것처럼. 그렇다면 이제는 동의 세계가 아니라 정의 세계, 즉 고요함의 세계를 찾아야 하리라. 그리고 고요함과 교감을 시작해야 하리라. 마치 영원한 고향이듯, 억겁년의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을 듯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움직임, 즉 운동의 세계에서 고요함은 어찌 보면 마이나스인 듯하다. 실상은 그렇지만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운동시스템을 안다. 신경세포는 비록 움직임을 요구하나, 그 움직임은 막연한 혹은 맹목적인 움직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정교한 움직임을 위해 억겁년의 세월 동안 진화하여 왔다는 것이고, 그래서 제어시스템을 정교화 하였다는 것이다. 즉 피드백 제어체계를 통해 보다 정교한 운동을 한다.

 

세상이 더 바쁠수록 내 맘이 더욱 번다할수록 오히려 바쁨과 번다함의 뒷면, 즉 고요함의 세계를 지탱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마치 산산조각나는 것처럼 아찔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략 이런 것 같다. 고요함을 가질 때에만 그 후에 움직임의 세계가 역동적으로 다가온다. 역동적인 세계를 느끼는 만큼 더 고요함의 세계가 그리워진다. 마치 일란성 쌍둥이인양. 그럴 때에 보다 잘 돌아가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제 간단히 예술이야기를 해보자. 침묵의 바다 동영상을 보면 마치 고요함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하다. 거기에는 움직임이 없고 오로지 애초부터 고요함만이 있었다는 듯... 그래서 편히 고요함을 관상할 수 있겠다. , 맞아. 내맘 어느 한 구석에 움츠리고 있던 거시기가 반갑게 뛰어 나온다. 모든 것이 정지해있는 마냥. 그리고 오로지 움직이는 것은 나만인양. 모처럼 온갖 것이 편해진다. 어린 시절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결국 예술에 대해 야기하려다 끝마무리가 어린시절이야기다. 민망하다. 어쨌든 지금은 고요함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그런데 그 고요함을 잡아당길 수 있는 것이 드물다. 하지만 고요함을 모처럼 맛봤다. 그런 탓인지 그 고요함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더구나 그것으로 고요함을 담은 이가 작가라 한다. 따라서 그것을 예술이라고 말하면 안될까. 하긴 예술이 별건가. 필요한 포인트를 선과 형 그리고 빛으로 적절히 잘 잡아 땡기면 되는 것이지...

물론 그것을 잡아당기는 일이 힘들겠지만...

 

요즘 부쩍 예술사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서 주저리 주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