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습관 가운데 3월부터

새롭게 길들이기 시작한 습관이 하나 있다.

주로 새벽 이른 잠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늦은 밤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쯤이면

감사 노트를 적는 것이다.

 

노트를 열면,

지금 여기 바로 현재의 즉시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고

'아!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자각이 물밀듯 밀려든다.

그 순간의 살아있다는 느낌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한번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일종의 종교의식처럼 감사말씀을 적어 내리곤 한다.

 

감사함은 내가 발견한 기도와 다름 없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과 문화의 수혜층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란 듯,

성년이 된 후부터는 바짝 시간다툼을 하며

시간사용의 황금비율을 늘상

꿈꾸며 바쁘게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져감도 모른채 살아왔다.

찾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는 자연한 이치 그대로

구하고 찾아야만 알게 되고 주어지게 되나 보다.

 

 

그러다 보니 바쁜 일상은 자연스레 몸과 마음의 긴장을 가져왔다.

사실은 그런 어떤 소인이 내재되었다고 할까.

 

과정 과정을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일과 사람사이에서 성과물을 내기 위한 긴장과 집중은 의무적 선택이었다.

긴장은 성냄과는 다르겠지만 사람의 몸과 마음에 작용하여 일으키는

메카니즘에 장애를 초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이 사람이 그 방면에 취약한 듯 보인다.

 

생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자율신경과 호르몬을 관장하는 뇌의 시상하부와

감정의 뇌인 변연계의 편도체에 이상이 발생하고

각 장부간 원활한 소통에 어려움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몸의 최소단위인 세포들 하나하나도 건강하지 못할 수 있으며

염색체들도 변형되거나 기능상실에 이를 수 있다.

 

 

나의 경우도 이처럼,

이완과는 반대로 치우쳤던 긴장으로 인하여 몸에 병이 생기게 되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바쁜 일상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기울어져 갔다.

경사각도가 더욱 더 비틀어지면 몸이란 걸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었지만 놔야했다.

쥐려고 했던 것을 펴야 했다.

황금분할을 찾으며 시간을 아끼던 치열함도 내버려야 했다.

주로 남보다는 내 자신에 대해 정해진 기준도 놓아야 했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더 이상 앞이 안보이기 시작했다.

바라보이던 지름길도 사라지고 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벽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기에 몽골의 사막을 부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형의 삶만이 아닌

무형의 삶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가해져 갔다.

생각이 내려놓아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보따리채 풀어서 얼키든 풀리든

내버려 두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접고 앉아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점점 내가 알지 못했던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이면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곳엔 일상의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언제나 그 자리인 존재가 항상 함께하고 있음도

감지되었다. 들뜨고 바쁘고 밖을 향하던 의식이었던 나는

단지 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도 느껴졌다.

 

사람만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몸의 여행,

마음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45억년 지구 행성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나는 누구인가,

나의 뿌리의 뿌리, 근원은 무엇인가,

참 삶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왔다 가는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있으면,

유형의 소리와 물질에 둘러싸여 가두어져 버리면,

관계와 관계의 울타리에 엮여 버리면,

그 이상은 질문해야 할 진정한 질문들은 하지 않게 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삶에서 성취하여

결실을 맺어야 할 부분은 크지 못하게 된다.

 

현생 인류의 최정점에 서 있는 역사성으로서의 나를 생각해 본다.

역사상 가장 발달한 문명문화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있다.

그 나를 단지 원시성으로 회귀하여 자연인으로서 살며

생명성을 회복하라고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에 서서

유형성과 무형성을 동시에 보며

나와 나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새롭게 정리하고 갈 타이밍이다.

 

  어제 강의에서 박문호 박사님은 앞으로 다가올 사회현상중 하나로써

'무연고 사회' 에 대하여 언급해 주셨다.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가 끊어지면 살아있어도 동물이나 다름없어

존재가치를 잃게 되고, 인간과 인간간의 스토리가 없는 삶의 피폐함은

방치된 죽음으로 내몰린다고 한다.

  땀흘리고 욕하고 싸우더라도 치열한 순간들을 함께 한 해병대원들이

해병대는 영원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끊임없이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자기 감정이 링크되기 때문이란 말씀을 해주셨다.

 

 

  8월10일 박자세의 몽골 해외학습탐사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가기 전 이 글을 통해 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보고 감정을 링크시켜 놓겠다.

그리고 다녀와서 그때의 스토리를 풀어내 보겠다. 

뉘앙스부터 다를 듯싶다.

 

  

  다시 처음 자리다.

습관, 작은 습관, 새롭게 시작한 나의 습관은

새벽 아침 감사노트와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절실하게 느껴 보는 것,

그리고 펜을 들어 적어 내려가 본다. 또는 앉아 본다.

그 때 내가 마주치는 나는 그저 알고 지내던 세상의 내가 아닌

내가 알지 못하였던 나와 만나졌다.

 

오늘은 어제 돌아가신 분들이 그토록 살기 원했던 내일이라고

얘기 들었다. 이 말을 뼈아프게 느끼는 사람은, 

생명의 절벽앞에 서 본 사람들,

그들이 절절히 느끼는 오늘의 소중함,

감사함, 외경스러움!

나도 그 하나이다.

 

주어진 생명 다하는 날까지,

지금 여기의 참 가치를 소중히 모시는 산삶인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