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시계와 해시계 그리고 시간






나는 때때로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혼동을 갖는 아이들을 본다. 학교 등교 시간을 위해 밖에 나왔다가 길을 헤매고 다니는 아이와 점심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하는 아이도 있다. 시간은 분명 언제 어떤 공간으로 자신의 몸을 옮기느냐를 결정한다. 문화적 시간은 모든 것이 순서가 있다. 화장실, 식당, 학교, 관공서, 심지어 방 안에서 TV를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 순서를 알아야 한다. 이 수 많은 시간을 문화적 시간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홀은 인간을 우리는 모두 문화적 시간에 불시착한 존재다.’라고 정의 하였다. 이 시각으로 보면 시간에 혼동하는 이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문화적 시간에 치인 사람이 된다.

 기원전 2세기 후반부에 로마의 극작가 플라우투스는 한 희곡의 등장인물을 통해 시간의 폭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야기인 즉슨 해시계를 만드는 통에 세상이 혼란에 쌓였다는 이야기이다. 잠깐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시계를 만들어 나의 나날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조각조각 자르고 난도질한 자도 혼란에 빠트렸다. 어렸을 때는 나의 배가 나의 해시계였다. 그것은 어떤 시계보다 더 분명하고 더 진실하고 더 정확했다. ‘ 그 뒤의 이야기는 배가 알려주는 시간에 밥을 먹었는데 배가 아무리 고파도 해(해시계)가 허락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다. 는 내용이다. 나도 이 이야기에 동조한다. 문명권에 사는 우리의 시간은 이외수의 말처럼 시계에 멱살을 잡혀 살고 있다. 애드워드 홀이 그의 책 생명의 춤에서 구미인에게 시간은 채워지지 않은 상자이다. 매 순간 따지면서 지낸다. 매 순간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자는 시, 분 그리고 초까지 나누어져 있다.고 하였다.

 전우용이 쓴 서울은 깊다에는 학교종이 땡땡땡이라는 챕터가 있다. 거기에는 평민이 시계를 보기 시작한 것이 100년이 채 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어렸을 적 부르던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하던 노래의 종은 말 그대로 시계를 모르던 시기에 시계 대용으로 썼던 장치이다.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보낸 이들 중에는 학교 가기 전에는 시계를 볼 줄 모르던 사람도 태반이었다. 종각에 있는 종은 궁궐을 드나들던 내시와 벼슬아치에게 필요한 장치였지 일반 평민에게는 배꼽시계가 훨씬 중요했다.


우리의 생체시계는 문화적 시계에 점령당했다.


 우리의 생체시계가 문화가 만든 시간 속에 점령당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가본 사람은 충분히 경험하는 이야기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시차적응을 하지 못해 성적이 저조했다는 뉴스는 종종 접하는 내용이다. 만약 벽시계, 손목 시계의 시간에 인간이 적응했다면 아침마다 일어날 때 전혀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침이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장이나 학교, 일을 하러 일어나야 한다. 인류사회가 문명 사회로 진화한 것은 유전적 진화가 아니라 분명 문화적 진화이다. 해시계가 만들고 지금의 핸드폰 시계가 대체하고 있는 문화적 시계가 만든 현상이다.

문화적 진화는 많은 시간의 규칙을 강요한다. 각 나라마다 시간의 대한 개념이 다른 것을 에드워드 홀은 일례를 든다. 미국에서 비즈니스상 약속을 정하면 그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일의 중요도를 알리는 척도가 된다. 에드워드 홀은 그가 남미에 갔을 때 시장을 만나기 위해 2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다. 그리고 매우 화가 났다고 말을 한다. 그가 생활한 미국에서는 이런 일은 분명히 상대를 모욕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미에서는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일이다.

일요일이 없는 인디언은 일요일에 물건을 팔지 않는 식료품 가게와 싸움을 벌인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는 푸에블로의 한 인디언 부족은 일을 하다가도 자신이 오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그만 두고 그 일을 한다. 아랍에서 동생을 찾기 위해 몇 일을 시장을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언제 동생을 만나기로 했냐고 묻자 그는 그 시장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몇 일을 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런 일이 그 곳에서는 일상다반사이다.

실재로 우리가 처한 상황은 내가 만든 시간이 아니라 문화가 만든 시간과 공간이다. 처칠의 말대로 우리가 건물을 만든 이후에는 건물이 우리를 만들어 왔다. 우리는 그저 지금이라는 시간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미약한 존재이다. 문화적 진화가 아니라 유전자의 진화로 살았다면 석기시대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정의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은 자신의 취미를 바탕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칸트가 이야기한 대로 취미는 내가 어떤 아름다움을 선택하고 있느냐이다. 자동차가 좋다. 술이 좋다. 피카소의 그림을 좋아한다. 약속 잘 지키는 것이 바른 일이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식사 시간에는 식사 예절을 지켜야 한다. 등등 이외에 많은 사건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처칠이 말한 것처럼 그저 우리가 만든 건물(문화)이 우리를 만든 결과이다.

자폐증 아이와 우리의 차이는 유전학적으로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100년 전만해도 시계를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그 문화적 시간에 점령당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구분하는 것뿐이다.


우리 스스로가 문화를 만든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팀 문화 형성을 위한 아이디어로 월요 기도 모임을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기독교 재단이었고 모두 찬성하였다. 그 당시 4명이서 시작하던 모임은 팀이 커지면서 14명의 아침 기도 모임이 되었다. 아침 810분에 시작하는 모임은 분명 자발적이었고, 말 그대로 기도를 위한 모임이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질책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팀원이었다. 질책의 내용은 왜 아침 기도 모임에 늦었느냐, 기도 내용을 왜 준비 못했느냐, 찬송가를 부를 때 크게 못 부르냐는 내용이었다. 팀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모임은 이미 서열우위와 위계 질서라는 명분의 이용 수단이 되고 있었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변질된 이 현상은 비단 여기서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책 위대한 정복자에서 문화의 보편적 성향을 이야기한다. 친숙한 유대 관계로부터 본능적 위안과 자긍심을 이끌어내는 집단을 형성하고 경쟁 집단에 맞서 자기 집단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인간 본성, 따라서 문화의 절대 보편적 성향이다. 라고 하였다. 목적의 집단을 형성한 후에 집단의 경계를 조정하기 시작하며 각 구성원의 권리를 나눈다. 내편 네 편을 가르고 사람과 사람을 구분한다. 인간은 여전히 편협한 부족주의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존재다. 장애와 비 장애, 정규직과 비 정규직, 외국인과 내국인, 임원진과 노동자 등의 구분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날 만들어진 규칙은 경계와 틀을 제공하고 규제와 구분을 탄생시킨다. 좋은 의도가 있었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만들어진 시간에 우리는 툭하고 떨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자신의 문화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미 내가 그 문화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평가하는 자체가 문화권만의 이야기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을 보고 경험하고 학습했을 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문화를 바라 볼 수 있다. 유전자적 시간과 문화적 시간 속에 갈등하며 인간은 문명을 만들었다. 그 중에는 문화의 시간을 떠나 산이나 오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여전히 문화적 시간에 살아간다.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언뜻 잘 못 바라보는 순간 조잡한 진화를 한 존재가 될 뿐이다. 대부분의 갈등은 문화가 만든다. 문화가 만든 시간의 규약과 부족주의를 표방하는 문화를 만드는 보편적 성향에 내가 놓여 있다. 우리는 모두 문화적 시간에 불시착한 존재이며 잠시 거닐다 가는 존재이다. 너도 나도 우리도 그저 조금 차이가 날 뿐이다. 그 차이를 부풀릴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