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공간 위에 놓인 사건이다. 순차적으로 들어오는 사건을 기억한다. 밥을 먹는 것도 순서이고, 빛도 순서이다. 시간의 1차원 위에 3차원의 공간의 서열을 추억이라 하고 기억이라 하여 되새김질 하는 것이 우리 삶이다. 몸에 감각 기관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에서 들어오는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은 각기 다른 속도로 되어 있다. , 소리, 냄새, , 촉각은 모두 다른 시간을 갖는다. 이 다른 시간이 뇌 속에서 속도의 지연, 시간의 지연 현상으로 동시라는 착각을 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지 않다면 상대방의 목소리보다 상대의 입술의 움직임이 먼저 인식되어야 한다. 마치 싱크가 맞지 않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뇌의 감각 지연 현상이 예측을 만들었다. 구르는 사과를 영원히 볼 수 없다. 구르는 사과를 보기 위해 빛이 튕겨야 하고, 망막은 튕겨진 빛을 모야야 하며, 모인 빛이 로돕신과 G-protein이 만든 세포막의 활동전위는 외측슬상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일차 시각영역으로 분산되고 분리된 감각 정보를 전달한다. 그 빛의 정체를 알기 위해 등쪽과 배쪽의 루트를 통해 사물의 움직임과 색깔을 구분한다. 기억 속에 있는 사과와 비교하여 사과가 굴러간다고 아는 순간까지 어쩔 수 없이 시간은 지연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과의 과거를 보고 있지 않다. 하나의 자극 다음에 다음 자극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면 영화 필름처럼 끊겨진 영상을 보아야 한다. 끊김 없는 영상을 내가 보고 있다면 나는 이미 구르는 사과의 미래를 예측하여 영상을 미리 만들어야 한다. 이런 뇌의 작용으로 우리는 영원히 미래를 본다. 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으로 우리는 예측하는 삶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언어를 탄생시켜 물건을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물건을 설명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설계도면은 예측이 만든 놀라운 작품이다. 원시인이 돌화살촉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 돌화살촉의 이미지를 내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기억은 돌 속에 돌화살촉을 끄집어내면서 실체화된다.


이런 예측 능력으로 우리는 지금 살고 있으면서 앞을 내다보며 산다. 일주일을 걱정하고, 1년을 걱정한다.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10년짜리 적금을 들며 10년을 내다본다. 무덤을 만들고 장례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공존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이런 매장풍습은 고대인에게 상징의식과 사후 세계관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죽음이 종교를 탄생시켰다.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모두 사후세계라는 예측과 상상에서 등장했다.


자연에서 온 감각신호를 인간의 본능적 욕구로 새롭게 구현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철학자 토마스 메칭거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누구도 아닌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누구도 아닌 존재로 죽으며,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겪는 혼동 때문에 누군가로 착각하게 된다.’ 존 오키프가 발견한 장소세포로 우리는 장소와 공간이 뇌에서 재구성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음을 아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나 세계의 어느 공간에 GPS를 찍으며 어디 있는지 알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에 살라고 말하지만 지금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 문화라는 시간에 불시착하여 그 범위를 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간다. 뇌가 만든 가상의 세계에 살고 있고, 빅뱅에서 나에게 이르기까지의 일련 과정이 멈추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다른 측면을 볼 수 있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 적어도 내가 어느 역사의 틈바구니인지, 내 사고방식을 만든 문화, 문화를 넘어서는 감각 너머의 세계를 한 번쯤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나 뇌가 만든 세계를 확장시켜 자연이 가진 모습을 접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며, 신나는 일이다. 이것이 뇌과학, 자연과학 공부가 무슨 쓸모가 있냐고 묻는 이에게 말하고픈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