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황동규-비코츠키-초월명상-감정표절

왜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크 로스코 작품을 관람한 후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할 수 없는가?

평소 꽃 사진 한 장을 놓고도 수많은 감정과 감성을 분출하듯 표현하던 친구들이 왜 그의 작품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그저 전시기획에 대한 평가를 하거나, 의미도 없어 보이는 타인의 작품관람후기만을 힐끗거리며 안주거리 삼아 이야기 하고 마는가? 미술 평론가라는 친구도 여느 미술작품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색채추상의 장르를 열었다는 미술사적 의미만을 설명하고 작품자체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마크 로스코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전시와 감상하는 법을 굳이 설명하고 강요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작품에 대한 유명 인사들의 평가와 감상후기가 공감되기는커녕 아예 아무런 느낌조차도 떠오르지 않아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뭔지? 마크 로스코 작품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평가나 느낌이 진실일까? 그 누구도 선뜻 말해주지 못하는 이런 평범치 않은 상황이 궁금하지 않는가?

난 마크 로스코란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황동규 시인에게 들었다. 박자세 천뇌를 마치고 아내와 황동규 시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그림을 좋아하는 아내와 황동규 시인과의 대화 도중에 이름을 설핏 들었고, 그 후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이번 전시회 초대장을 선물받아서 가족들과 함께 관람을 하였다. 황동규 시인이 마크 로스코 작품에 감동해서 쓴 시도 처음 읽었다. 황동규 시인의 시어마저도 마크 로스크의 작품세계를 표현하지 못한 듯 했다. 아니 진정으로 감상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나 역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며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런 느낌을 가질 수 없는데 이건 뭐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지? 질문에 답을 찾고 작품의 의도성을 찾기 위해 더욱 작품에 몰입해 보았다. 하지만 기존에 학습했던 예술과 인문학에 관한 기억으로는 답을 구할 수 없어서 결국 뇌과학 지식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작품을 관람한 후 차한잔 마시며 아내와 여동생은 관람소감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내가 대뜸 뇌의 작용부터 설명하기 시작하자마자, 아내가 핀잔을 주며 입을 막아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못했다. 그때 억울하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쓴다.

도대체 마크 로스코는 무슨 짓을 한 건가? 그가 미술이란 예술적 행위를 하기는 한 건가?

자연이 있고, 사물이 있고, 인간이 있고, 인간의 움직임과 행위가 있고, 그 중에 인간의 언어가 있고, 언어로 인하여 사물과 분리된 의미의 세계가 있고, 의미의 세계를 표현한 인간의 상징의 세계가 있고, 의미와 상징의 집합체인 추상의 세계가 있다. 자연의 존재로서 생각하는 인간이 출현했다는 말은 뇌가 언어를 사용하여 의미의 추상공간인 가상세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잠시 뇌과학 공부를 해보자. 자연에서 동물이라는 생명체는 외부의 감각입력이 들어오면 반응을 한다. 단순한 동물은 감각입력에 자동화된 감각 반사적 움직임을 한다. 하지만 고등동물로 갈수록 감각입력에 대한 반응을 지연시켜 자신이 경험학습 했던 기억을 참조하여 목적지향적인 움직임, 행동 혹은 행위를 하게 된다.

2-3세 어린 아이는 감각적 사물의 명령에 따라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어린 아이가 자라며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움직임과 말을 동시에 하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움직임과 말은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동일선상의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말과 행위가 분리되고 말은 속으로 말하기를 통해 내면화되어 더 이상 중얼거림은 멈추게 된다. 이렇게 내면화된 말이 곧 생각이다.

한편 인간은 말을 배우게 되면서 사물과 의미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사물에서 분리된 의미가 독립되어 다른 사물로 의도적으로 옮겨질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역할이 부여된 놀이를 시작하게 되며, 놀이의 역할을 통해서 사물과 의미를 분리한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의미의 집합인 추상은 생각의 연쇄를 불러일으키고, 생각은 사물에서 벗어나 끝없는 자유를 구가하며 확장하게 되어 의미로 가득한 가상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인간은 그렇게 자신이 구축한 가상세계인 의미장에 갇혀 일평생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사물과 분리된 의미장에 갇히게 되자, 더 이상 자연을 직접 만나기 어렵게 된다. 인간이 지각하는 자연은 경험학습 기억에 의해 해석된 자연이다. 따라서 인간은 가상세계가 흠집이 날 때만이 자연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실체를 감각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현의 영역은 언어를 비롯한 상징기호의 체계이기에 표현하는 순간 다시 가상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이를 두고 종교적 성찰을 한 대가나 선사들이 입 밖으로 꺼낸 순간 진리의 세계는 사라진다고 표현한다.

상징기호를 사용하는 정상의 인간은 스스로 끊임없이 의미를 만든다. 만들어진 의미장에 철저히 갇힌 인간은 의미를 통해 주변 환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의미란 추상적 개념공간에서 목적지향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의미장은 가치, 의미, 목적지향성을 가진 의도적인 행동을 함축하고 있다. 의미장은 기억이란 현상을 통해 형성된다. 인간의 기억력은 무한대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무한의 감각의 입력이 무한대의 의미장인 기억과 연결되어 지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기억이 없으면 지각할 수 없다. 상징의 도구인 언어가 만든 생각이란 과정을 통해 인간이 지각하는 건 구체적인 “대상”이다. 언어와 생각이 개입되기 이전에는 감각 자극밖에 없다. 감각이 모여서 의미로 채색된 기억과 결합하고 상징으로 다시 채색된 순간 “대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대상이란 구체적으로 이름붙일 수 있는 사건과 사물이다. 이게 바로 비코츠키 철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뇌가 만든 가상세계는 본능적인 욕구에 의해 가치 평가된 의미의 세계이고, 현재 입력된 감각은 우리가 학습한 모든 기억의 가상세계에 따라 재해석된다. 또한 인간의 뇌가 감각을 지각하고 기억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특정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의 시간적 순서와 특정한 공간상에서 존재하는 사물의 변하지 않는 상대적 위치의 관계를 기억하는 것이다. 시공간상의 변하지 않는 상대적인 관계와 시간의 순서를 패턴 또는 불변표상이라고 한다. 인간이 기억한다는 건 패턴의 순서, 서열을 무한대로 인코딩하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설명하는 건 마크 로스코가 한 행위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뇌가 인지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미술 행위를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크 로스코는 관람객으로부터 지각해야 할 대상을 빼앗아버렸다. 즉 지각하고 인지해서 정신적 프로세스를 진행해야 할 형태의 패턴을 주지 않은 것이다. 관객이 시각적으로 지각하고 인지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간이 시각적으로 대상을 인지하게 되는 건 구체적인 선분과 각도로 이루어진 모양, 움직임, 색깔 등 다양한 시각정보가 결합해야만 가능해진다. 뇌는 외부의 시각적 감각입력을 모양, 움직임, 색깔 정보를 따로따로 구분하여 1차 시각피질에 저장한다. 1차로 따로 분리하여 저장한 정보를 다시 불러 모아 연합 처리하여 형태-색깔을 결합하여 공통 패턴을 인식하고 범주화한다. 이렇게 시각적 대상으로 인지 처리하는데 100msec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뇌에서 부지불식간 찰나의 순간에 대상 인지작용이 일어나기에 우리는 그 과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움직임에 관한 시각적 정보는 공간지각 정보와 결합한다. 이렇게 연합한 시각정보를 2차 시각 연합피질에 저장한다. 이렇게 분리와 연합과정을 거친 시각, 청각, 체감각 등의 외부 개별 감각은 다시 다중감각연합영역에서 모두 통합된다. 이렇게 모든 감각이 통합되었기에 사과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사과 모양, 색깔, 냄새, 맛, 아삭한 식감, 글씨가 동시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과의 모양, 색깔, 냄새, 맛, 식감, 글씨는 서로 인과적 연결에서 자유로운 독립된 정보다.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프로세스를 고려하면, 분리되어 입력된 선분과 각도를 지닌 형태와 색깔이 결합되어야 공통패턴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지하여 다른 감각과 기억과 결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색깔 하나로만으로는 결코 대상으로 인지할 수 없다. 그래서 마크 로스코의 선이 없는 색채작품을 감상한 관람객의 뇌는 대상으로 인지할 만한 시각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 없었기에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른 여느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는 달리, 경험 학습하여 범주화한 기억의 패턴을 찾지 못했기에 결국 지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대상으로 지각하고 인지해야 대상과 결합된 과거의 무한한 기억 창고의 문을 열어 감정, 욕망, 정서, 감성, 의미와 결합된 기억을 불러오고 이를 토대로 현재 입력된 감각입력을 비교 판단하여 표현하고 행동 하게 된다. 하지만 마크 로스코가 빼앗아버린 형태로 인해 관객은 대상 지각은 물론 기억과 결합된 감정의 인출도 당연히 못했을 것이다.

시각적 형태 정보를 충분히 준 다른 여타의 추상 화가들의 작품이나 마크 로스코의 초기작품과 비교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어릴수록 추상 화가들의 작품을 이해하는 건 매우 어렵다. 의미로 가득한 추상의 세계는 경험 학습한 의미기억이 풍부한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완성되기에 그렇다.

일반적으로 미술이라는 고도의 예술적 행위는 상징적 시각정보로 의미와 감정, 감성이 결합하고 함축된 추상의 세계를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며 표현 전달한다. 하지만 마크 로스코는 표현의 대상을 없애는 자기 파괴적인 미술행위를 한 것이다. 즉 대상과 링크되어있는 의미로 가득한 추상적 기억인출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꽃 사진 한 장에서도 무한히 인출되던 그 기억의 고리가 차단된 것이다. 그렇다면 통상적인 미술의 영역을 파괴하며 마구잡이로 색칠한 작품을 통해 그가 전달하려는 세계는 무얼까? 이는 뇌과학 지식을 통해 마크 로스코의 말과 일련의 행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복원해 볼 수밖에 없다.

마크 로스코는 여느 화가들과 달리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감상하는 상세한 방법을 강요하다시피 한다. 보통의 미술작품이라면 당연히 이런 걸 관람객에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는 것들이다. 이는 그가 통상의 미술작품이 주는 예술적 감성과 감정을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가 그의 장르파괴적인 색채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건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한 현상에 관한 체험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라고 추측한다. 


그 세계는 명상의 세계다. 색채에의 몰입을 통해 초월명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실현가능함을 알리고 체험하게 하고 싶었던 거다. 색채와 결합된 통속 심리적인 인간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은 각기의 문화와 삶의 체험에 따라 다르기에 보편적인 추상의 세계를 형성하기는 어렵다. 색깔은 개인적인 취향과 느낌을 형성하여 문화적 심리적인 영향을 주는 정도다. 하지만 색채에의 몰입을 통해서 다른 감각을 일절 차단하여 인간의 뇌를 명상상태로 몰고 가는 건 보편적일 수 있다. 또한 이는 종교적 환각의 추상세계와 강하게 결합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의식에 관한 뇌과학의 지식을 알아보자.

인간의 뇌가 만들어내는 의식 상태는 수만 가지다. 심지어 매일 겪는 기분이라는 미묘하고 다양한 감정의 상태도 뇌가 만든 의식 상태의 일종이다. 하지만 대표적으로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뇌의 의식 상태는 램수면의 꿈 상태, 정상적인 인지작용이 일어나는 의식 각성상태, 초월적 의식상태 이다.

꿈이란 의식의 상태는 램수면시 인간의 뇌가 일부는 작동하지만, 전두엽은 작동을 하지 않고, 뇌의 운동회로의 클러치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각적 이미지가 정서적으로 분출하는 의식의 상태를 말한다.

각성상태에서는 외부세계가 시각, 청각, 체감각의 감각기관을 통해 입력되면, 시상과 해마를 비롯한 변연계의 상호 연결된 회로가 감정으로 평가된 기억을 만든다. 이렇게 해마에서 감정과 욕망과 결합되어 형성된 일화기억은 대뇌 신피질의 감각연합피질에 장기 기억된다. 각성상태에서는 전두엽이 행하는 작업기억이 작동하여 신피질에 저장된 장기기억을 인출하여 매순간 외부의 환경입력에 대응하여 반응한다. 따라서 작업기억이 작동하는 각성상태의 의식에서는 신피질의 의미기억과 해마의 일화기억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런 정상적인 각성상태의 작업기억은 인간이 인식하는 현재 그 자체이다. 따라서 각성상태에서는 경험학습 기억을 참조하여 세계상을 지각하게 되면서 자아의식과 더불어 바깥 세계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구분하게 되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경험기억을 되풀이하며 회상하면서 개인의 고유한 내면의 세계가 형성되고 타인의 관계를 비롯한 외부세계 속에서 자기를 보게 된다. 자아와 자기 역시 뇌가 기억이라는 현상을 통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아가 파괴되거나 초월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에 빠진다거나 예술적인 작품이나 아름답고 압도적인 경관의 자연을 만날 때 그 순간 자아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더 큰 존재와 일체가 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때 척수를 타고 순식간에 서늘한 느낌의 전율하는 울림이 흐른다. 경외감이 온몸을 감싸게 되고 자아는 사라진다. 이러한 자아 초월적 일체의 의식 상태는 종교적 의식을 행할 때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전 인류가 행하는 초월적 의식 상태를 유발하는 행동을 보라. 호흡에 집중하거나, 주문을 리드믹컬하게 반복하여 암송하거나, 십자가를 보면서 기도에 몰입하거나, 촛불 혹은 면벽을 하며 기도에 몰입하면 초월적 절대자의 환영을 보거나 환청을 듣기도 하고, 지각하고 인지하는 주체와 객체가 사라지고 공간지각마저 사라지고, 우주와 합일된 초월적 절대자와 일체가 된 상태를 느끼는 뇌의 특이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원시부족의 종교의식처럼 타악기의 반복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섹스할 때 리드믹컬한 몸동작이 끊임없이 신경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면 몰입된 상태에서 모든 감각작용이 차단되고 자율신경이 억압되다가, 마침내 서서히 자율신경계가 흥분을 일으켜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과도한 억제작용의 한계를 초과하여 폭발적인 흥분의 방출작용이 일어나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전두엽의 의지적 명령에 따라 감각입력이 극단적으로 차단되면 뇌가 특이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방출하는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이 초월적이고 전일적인 의식 상태를 만든다.

전일적인 의식 흐름의 상태를 만들고 유지하는 건 전두엽의 강한 의지적 명령에 의해 실행된다. 전두엽의 강한 의지만이 명상에만 주의를 집중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온갖 잡음과 잡념을 제거하여 몰입의 상태로 의식을 변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각성상태의 의식은 끊임없이 무한히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 감각입력에 대하여 작업 기억을 작동하여 반응하여야 하기에 끊임없이 잡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 상태에서 초월명상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다.

이쯤 되면 마크 로스코가 구체적인 사물과 의미의 상징인 추상적 대상을 그리지 않고 오직 색채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그토록 금기시 되는 전시방식과 감상법을 강요한 이유를 짐작할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사물을 떠올리고 이로 인해 무한한 기억의 창고의 문을 열어 배경잡념을 유발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킨 것이다. 의식이 각성된 상태에서 선은 일정한 표상을 만들고 그 표상을 대상으로 인지시키고 대상과 연결된 단서가 수많은 연관된 기억인 잡념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두엽의 강한 의지적 작용으로 전일적인 의식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단순히 색채에만 몰입하도록 전시방식을 정하고 감상법을 강요한 것이다. 체험실에 단순하고 느리게 반복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조명을 어둡게 한 상태에서 벽면에 희끄무레한 작은 색채덩어리들을 떠다니게 하는 것 역시 잡념이 떠오르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초월명상 수행시 수입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사용한 거다.

마크 로스코는 색채란 명상의 도구를 이용하여 인간의 희망이자 꿈의 세계인 종교적 초월명상상태에 이르는 체험을 전하고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본래의 미술이 추구하는 예술적 감성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가 종교적 초월적 명상상태에 이르고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초월명상 상태에는 이르지 못한 걸로 짐작하는 건 초월명상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이 그 상태를 묘사하기위해 토해내는 말을 마크 로스코에게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크 로스코의 인터뷰를 참조해 볼 때, 그가 처음에는 통속적인 색채심리적인 접근을 하다가 점차 색채에의 몰입을 통해 감각입력을 차단되자 그의 뇌가 환각상태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초월명상은 이름난 선승조차도 일평생 한 소식 하기조차 어려운 의식의 상태다.  한번 경험했다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 현상이다. 초월명상에 이르지 못한 좌절의 과정에서 그는 정신분열의 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속칭 말하는 주화입마의 정신분열 상태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감정의 극단적 상태가 강한 색채의 기억과 결합했을 것이고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속에서 인간 정신현상을 한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마크 로스코는 미술이라는 예술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선사처럼 색채를 통해서 초월적 종교적 명상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마크 로스코의 작품세계를 감상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넘쳐나는 감동어린 감상평과 후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초월명상과 정신분열의 세계는 일반인이 쉽게 공감하는 세계일 리가 없다. 어느 꼬맹이가 그의 작품이 살아있으며 충격적이라고까지 말한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깊은 울림의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말이 진실일까?

인간은 공감 능력이 탁월한 동물이다. 공감능력이 있기에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의 공감능력은 표절하고 흉내 내는 능력이다. 축구 시합에서 결정적인 찬스에서 슛을 하고 실패했을 때 장면을 떠올려보라. 축구선수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탄성을 지르며 안타까움을 표현할 때, 관중들의 몸짓을 보라. 관중들 역시 선수와 똑같은 몸짓 탄성으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인간의 공감능력은 단순한 행동과 행위를 흉내 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감정, 감성마저 인간은 학습하고 표절하며 흉내 낸다. 인간은 단순한 사건부터 초월의식 상태에 이르기까지 흉내 내기를 통해 표절하며 경험하고 학습하여 기억을 만든다. 이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교육현장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세계를 통해 전 인류가 서로 감정과 감성마저 표절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인간현상의 모든 건 뇌가 만든 현상이다. 아니 뇌가 만든 허구이다. 뇌과학이란 지식체계만이 그 가상세계의 본질과 전말을 밝힐 수 있다. 이글은 난해한 화두를 던진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아무런 느낌조차 가질 수 없고, 표절을 통해 공감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글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