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고방식은 내가 만든 것일까?

 

 올해 바깔로레아 시험에 출제된 문제 중에 개인의 의식은 단지 그 개인이 속한 사회의 반영인가?”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인문계 질문 중에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온 나의 결과인가?”라는 질문과 위의 질문이 어쩌면 같은 계열의 문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문득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홀의문화를 넘어서입니다. 그 책에서 서구인은 소크라테스 이래 사용해온로직(logic, 논리)라는 선형의 사고방식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 한다고 했습니다. 서구인은 자신의 논리체계를 진리와 동의어로 간주한다고 말합니다.

이 얘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만해도 동네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기가 허하다거나 수맥이 흐르거나 느닷없이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프로이트가 등장하고 그의 추종자가 늘었을 때는 꿈이 내 생각의 방식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아프리카 다큐멘터리에서는 주술사가 머리 가죽을 벗겨내고 두개골에 구멍을 내어 뇌와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시술을 합니다. 동양의 무당은 귀신을 불러내고 조상이 노해서 그 화가 사람에게 닥친다며굿을 합니다.

무슨 쇼킹 아시아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주변이나 세계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명 무의식적 문화의 뒷 면을 알아야 합니다. 지구라는 세계는 이리도 서로 다른 문화가 만든 사고방식에 놓여있기 때문이지요. 분명 이야기 하지만 내 사고 방식 또한 시대가 준 선물입니다. 문화적 소산의 혜택을 많이도 받은 것이지요.

과학적 사고가 하고 있는 현상의 의식적 증명, 지식의 정량화, 지식의 반증, 합리적 세계관의 확립은 오류를 줄이고 예측을 가능하게 하며, 혼란을 줄입니다. 보편적으로 과학적 사고가 이 시대의 방식이 되는 데는 분명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논리, 종교, 과학, 토속 신앙, 등의 수 많은 사고 체계 속에 살아 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들어나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과학적 사고 또한 현상의 오류를 가져오게 하기도 합니다. 죽음을 앞 둔 이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것으로는 감정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이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과학적 사고방식 또한 여러 방식의 하나일 뿐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과학도 선택 받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아는 지인과 함께 수림문화재단에서 주체하는 인문학 아카데미 공명을 들으러 갔다 왔습니다. 주제는 생명공학과 미래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라는 주제로 서울대 홍성욱 교수의 강의였습니다.

내용은 유전자 가위, Crisper 기술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유전자 가위는 특정 유전자를 선택하여 필요한 유전자를 골라 내는 것이 핵심인 기술입니다. 특정 유전자를 선택하여 gene silencing이라는 없애기, gene editing 붙이기가 기본적 유전공학입니다. 201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과거에 천문학적 금액이 들어갔던 것이 대학원생이 시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해지고 보편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YTN에서 방영한 자료를 보여 주었습니다. 광저우 증산대학에서 인간 배아의 유전자 배열을 조정에 성공했다는 기사입니다. 이것은 영화 가타카에서 인간 배아가 가지고 있는 위험 유전자인 암, 심장병, 등등의 유전자를 삭제하여 아이를 낳는 내용과 흡사합니다.

그 다음 내용은 영화 가타카를 통해 앞으로의 미래가 유전자의 기준으로 서열과 격차가 나뉘어질 수도 있다는 내용입니다. 신혼부부가 결혼하기 전에 건강진단서를 교환하는 것처럼 유전자 스캔한 정보를 확인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유전자 지도에 스캔 비용이 1,000불 정도라고 하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지요.

제가 주목한 내용은 영화 가타카 이후로 나오는 프랑켄슈타인, 모로 박사의 섬 등을 통해 보여지는 과학에 대한 책임성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설문조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아이의 DNA를 조작하여 아이를 낳고 싶은가라는 설문과 질병에 대한 유전자 조작은 어떠한가라는 각기 다른 설문 내용의 결과였습니다. 배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은 반대 15%, 찬성 83%라는 결과와 질병에 대한 유전자 조작 반대 46%, 찬성 50%라는 내용에 주목했습니다.

홍성욱 교수는 이런 설문에 내용처럼 앞으로 질병에 대한 유전자 조작에서부터 시작될 거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 시대의 과학적 윤리는 지금의 사람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되겠지요.

앞으로의 유전자 조작과 같은 첨단 생명 공학 기술은 또 다시 새로운 문화를 탄생 시킬 것입니다. 천체 망원경이 137억년 우주를 찍으면서 우주의 나이를 증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분명 자기 시대의 산물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과학도 선택 받고 있습니다. 서로가 공진화의 형태로 새로운 선택을 하게 합니다. 시대적 압박에 따른 변화로 윤리와 도덕의 기준점의 이동이 이루어 진다는 의미입니다. 유전자의 의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노화에 작용하는 텔로미어와 같은 유전자의 조작으로 노화와 죽음이 없는 사회에서 종교적 가치는 다른 형태로 바뀔 것이며 과학적 사고라는 형태도 변화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요.

 

 

나는 이미 사회 속의 나입니다.

 

처음 질문  개인의 의식은 단지 그 개인이 속한 사회의 반영인가?”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온 나의 결과인가?” 어쩌면 같은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분명 역사와 문화, 문명 속에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이미 사회 속의 나입니다.

신영복 교수는 담론에서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being)입니다. “라고 말하며 관계가 과연 존재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사물이 맺고 있는 얼개 자체에 존재성을 부여 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던집니다.

저는 인간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인간이라는 현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에 이르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의 흐름, 분자생리학을 통해 확장된 진화학의 내용, 뇌과학, 대기역학, 지질학 등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 같습니다. 시간 단위대가 지구 역사는 46억년, 우주는 137억년, 고생대만 해도 5 5천 만년, 신생대가 6 5백 만년, 영장류와 불의 사용도 몇 백 만년 단위입니다. 몽골에서 원시인이 살았다는 수정동굴이 80만년입니다. 숫자로 이미 감각을 벗어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공부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 사이에 살아가고 문화의 현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의식적 문화 이면에 숨겨진 다층의 차원 인지와 수용이 사람을 알게 하는데 필요합니다. 문화는 인간이 만든 연장이며, 그 연장 속에 살아 갑니다.

요로다케시의 말처럼 우리는 뇌가 만든 가공의 세계, 바보의 벽에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시간관념 또한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역사책을 읽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바라볼 때 이상한 애잔함이 있었습니다. 그냥 읽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한 사람의 관점이라 생각하지만 역사와 문화라는 같은 그릇에 담겨져 생각 또한 학습된 시대적 산물입니다. 나 홀로 어찌 시간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나는 시대가 낳은 산물입니다. 시대는 역사에 흐름에 있고, 역사는 문화, 자연이 엮여 탄생합니다. 구름 위 하늘은 몇 천년 간 변함 없건만 나는 그 아래에서 흩날리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 사이에 살아 갑니다. 소통은 결국 자기 성찰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세익스피어의더 많이 알아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자폐증이 아이가 그네를 미치도록 타고, 한 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뛰어다니는 이유는 자신이 사라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좀처럼 알기 힘들기에 몸의 고유수용기, 전정감각 등의 감각입력을 통해 자기 위치를 공간에서 확인하려 합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 GPS 기능이 필요하다.

 

비약이긴 합니다만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사고와 역사적 흐름, 시대적 성찰은 내가 어디 있는지 GPS 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세상에 존재로 확인되리라 봅니다.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라는 현상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고 방식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대가 만든 공론과 거대 담론이 과학을 선택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사실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사고방식 혹은 현상 너머에 있는 시대의 흐름 또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 또한 그 흐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고 방식이 전부가 아님을 알 때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우재라는 말을 좋아 합니다. 사람이 어리석어지는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어리석다고 느끼는 순간 깨닫게 되고, 알았다고 하는 순간 어리석음에 갇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단편적 사고를 하는 순간 나는 바보의 벽에 갇히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이 흐름이 다음 시대의 사고방식과 공론, 거대 담론을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탄생, 지구 46억년의 고독, 생명 진화사, 생명을 낳은 지질학적 현상, 생명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대기, 인간의 역사, 역사적 배경에 숨겨져 있는 자연 현상, 그리고 문화적 배경 너머의 무의식적 사고 방식, 문화인류학적 사고방식 등의 이해가 바로 옆 혹은 인류, 인간이라는 현상을 알게 할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만든 사고 방식은 유전자가 만들고, 시대에 교육받고 길들여진 소산입니다. 인간 고유의 감각과 정서가 형성한 욕구와 요구의 결과물입니다. 분명 문화가 내 욕구를 결정하게 했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음식 등을 떠올리면 내가 경험한 인식의 세계내에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선택이라는 확장성이 존재합니다. 여러 욕구들 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의 모음집이 있습니다. 수 많은 책의 내용도 다른 정보의 집합체이듯, 나 또한 수 많은 선택의 집합체입니다.

화이부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해와 인정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살아갑니다. 어떤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인정할 수 없고, 어떤 것은 인정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보의 폭을 확장시키고 지식의 양을 증가시켜 농축된 지식에서 창의가 튀어져 나옵니다. 다음 시대의 사고방식 또한 이러한 현상의 연속을 통해 형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