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그리고 가랑잎

 

 

 

 


오락가락하는 가을비가 땅을 적신다. 내리는 비를 타고 떨어진 잎들이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해가 나오면 힘을 받아 고개를 들고 뒹굴러 다닐 게 분명하다. 그때부터 낙엽과의 전쟁이다.

낙엽은 낭만을 부른다. 구르몽은 시몽 너는 좋아하니, 낙엽 밟는 소리가라고 읊었고,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엘비스 프레슬리는 그가 부른 노래처럼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낭만과는 달리 절에서는 낙엽이 일거리다. 놈들을 쓸어내느라고 스님들뿐만 아니라 대빗자루도 여간 고생을 하는 게 아니다. 이래저래 가을은 가랑잎들과 씨름을 하기 마련이다. 떨어지면 쓸어내기를 계속하며 누가 이기는지 내기라도 하듯 말이다.

낙엽은 가을에만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태산목泰山木이란 상록수는 이른 봄에 잎이 진다. 새로 나올 싹을 위해 겨우내 달려있던 묵은 잎들이 먼저 떨어지는 희생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갈색의 농도가 잘 어우러진 커다란 잎은 그림엽서처럼 멋있게 보인다. 여고시절, 교정에 떨어진 태산목의 잎을 주워 좋아하는 시를 써서 편지봉투에 넣어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도 질세라 같은 또래의 펜팔 친구에게 낙엽통신을 보내자, ‘가랑잎에 글을 적어 보낼 줄이야라고 이내 답장이 왔다. 아무튼 즐거웠던 추억의 한 토막이다.

가을이 오면 아침마다 도량을 청소하는 것이 일과이다. 쓸어놓은 낙엽들은 한쪽으로 모아놓고 태운 뒤 거름더미에 갖다버린다. 불 때는 이궁이가 있으면 가랑잎들이 편히 쉴 수 있으련만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부르던 동요가 생각난다.

 

가랑잎 떼굴떼굴 엄마무덤 찾아서

엄마엄마 불러 봐도 대답이 없어

따뜻한 부엌 속을 찾아갑니다.

바람이 약간 일렁이는 날에 가랑잎을 사르면 구수한 내음이 도량에 넘친다. 그러나 안개가 끼거나 바람이 없는 날은 매캐한 연기가 온 도량에 자욱하게 깔려 옷뿐만 아니라 몸에도 밴다. 불교에서는 익혀야 할 덕목을 연기가 스며들 듯 몸에 배게 하라고 한다. 훈습薰習이라는 가르침이다. 오랫동안 연기를 쏘인 훈제고기가 깊은 맛을 내듯이 훈습을 많이 한 이는 높은 덕을 고루 갖추게 되어서다.

백세를 몇 년 앞둔 은사 스님은 낙엽을 다 쓸지 말고 조금 남기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젊은 스님들은 늘 귓등으로 넘기고 남김없이 싹 없애버린다. 하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니 어쩔 수 없이 그러는 줄 알지만 내심 섭섭하신 모양이었다. 때론 어른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좋으련만.

어느 가을날, 설총이 마당에 흩날리는 가랑잎을 깨끗이 쓸어놓고 원효스님께 말했다.

스님, 도량을 말끔히 치웠습니다.”

그래.”

원효 스님은 한쪽에 모아놓은 낙엽더미로 성큼성큼 가더니 한주먹 쥐고 마당에 흩뿌려 놓았다

가을은 이런 거란다.”

옛 선인들의 여유로운 살림살이가 부럽다.

밤새 바람이 불어 가랑잎 굴러다니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이리 저리 몰려다닐 때마다 풀 먹인 광목치마처럼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아침이 오자 그때서야 피곤한지 한쪽으로 몰려 잠에 취해 조용하다. 파란 잎으로 태어났다가 돌아갈 때는 노랑, 빨강, 갈색, 주홍 등 갖가지 옷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부럽다. 하지만 마른 가랑잎은 만지면 바스락 하고 가을 소리를 내며 부서져버려 안타깝고, 태우면 연기를 날리며 이별의 재를 남기고 떠나버려 아쉽다.

꽃의 제국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두뇌도 없는 식물이 어떻게 수억 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을까라는 의문에 더불어 살기 위해 죽음도 기꺼이 맞이하고 종족번식을 위해 달콤한 꿀과 맛있는 꽃가루를 기꺼이 바치는 과감한 삶을 선택했기 때문일 거라고 답하고 있다. 가랑잎도 그런 정신을 이어받았을 성싶다.

발밑에 떨어진 잎을 주워 꼼꼼히 들여다본다. 잎사귀의 일생을 마무리한 가랑잎이다. 내년에 다시 나올 푸른 새싹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