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 방식이 엿보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 경험에 기댄 해석은 한계를 지닌다. 개인적 경험이

감각을 매개로 하기 때문이다. 감각이라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세계는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 감각으로 만들어진 언어는 더 혼란을 만들 확율을 높인다. 나무잎 세포의 세계와 미토콘드리아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내 상상에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더 정확한 엿보기를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후버와 비젤의 실험실 이야기처럼 우리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 뇌에 특정 세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고양이의 꼬리만 보고 고양이임을 아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미 고양이의 기억이 있어야 고양이를 구분할 수 있다.

 역동적 기억에서 우리의 기억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동반한다고 하였다. 옅보기는 단순하게 사물이나 

사건으로 표현되는 것을 넘어서서 그 너머를 생각하는 노력이다. 


왜 같은 사물을 보는데 과거와 지금의 느낌이 다를까? 


자극은 그대로인데 자극을 해석하는 내가 계속해서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는 이것을 사물을 알아가는 지각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에는 주름이 있고 그 틈을 메꾸는데 노력을 하는 거라고 말이다. 


조각난 기억은 다른 기억으로 채워진다. 끊임없이 새로운 지각 능력을 만들지 않으면 틈이 생기기마련이다.

 그 틈은 세상을 보는 식견을 좁게 만든다. 때로는 잘못 알게 하여 아는 것만 못하게 하기도 한다.


자연과학의 엿보기는 더 많은 사실을 알게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책 '부분과 전체'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기초적인 개념을 변화 시킬 때 우리의 사고도 언어도 불확실한 것이 되고 만다. "


인간의 엿보기는 내 안의 기억과 그 기억을 만드는 언어적 현상이다. 그래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이해에 혼돈이 온다. 우리의 엿보기는 이 시대가 내게 강요한 문화적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에드워드 홀의 말처럼 문화라는 시간속에 불시착한 존재다. 내가 만든 생각보다 만들어진 생각이 더 많다. 서울에 시계탑이 세워진지 100년도 되기 전에 시계가 없으면 안되는 삶을 살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 언어가 인간의 감각과 그에 따른 경험으로 생겨났다.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좋은 엿보기의 일례로 리차드 파인만의 '꽃 이야기가 있다. 꽃을 보고 파인만이 화가인 친구에게 말한다. 


'이것 좀 봐, 정말 아름답지?' 그러자 친구는 파인만에게 자기는 화가이니까 알 수 있는데 과학자인 자네는 아름다운 걸 알리가 없다고 핀잔을 준다. 과학자는 꽃을 뜯어서 분석한다고 엉망으로 만들뿐이라면서 말이다. 그에 대해 파인만은 친구가 돌았나 라고 쓰고 있다.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지론을 내어 놓는다. 


" 그 친구가 느끼는 아름다음은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고, 나도 물론 느낄 수 있습니다. 심미적으로는 화가인 

친구가 더 세련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도 꽃의 아름다움을 취할 줄 압니다. 뿐만 아니라 꽃에 대해 그 

친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꽃 세포를 상상할 수 있고, 세포들의 복잡한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는데, 세포와 그 움직임도 여간 아름다운게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아름다움이 있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세계에도, 내부 구조에도 그 작용에도 아름다움이 있어요, 꽃 색깔이 곤충을 끌어들여 가루받이를 하려고 진화한 거라는 사실은 참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곤충도 색깔을 알아볼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과학은 거기에 의문을 붙입니다. 하등 생물도 미적 

감각이라는 걸 지니고 있을까? 아름다운 것은 왜 아름다울까? 그것은 참 흥미로운 의문입니다. 알고 보면 과학 지식은 꽃에 대한 흥미와 신비로움과 경이감을 더하면 더했지 덜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파인만의 옅보기와 달리 내 친구의 엿보기는 일상 경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만들어진세계상과 자신의 정서 상태를 비교하여 언어로 만드는 것도 살아 남기 위함이다.  친구 자신이 변화되는 걸 바라보려 하는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엿보려는 노력은 자신 안에 세계를 넓힌다. 그리고 세상은 커진다. 친구는 친구 방식으로 그리한다.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엿보기를 한다. 


그러나 파인만의 엿보기는 세계상을 구체적이며, 확실하게 만든다. 작용에 대한 이해가 함께 들어 있다.  꽃을 보며 꽃의 모양을 만든 DNA와 아미노산 결합과 아미노산 결합물로 만들어진 콜라겐의 형태를 생각한다. 그것은 꽃의 아름다움을 너머 내 안에 꽃을 만드는 작업이다. 내게 있는 기억이 내게 들어오는 감각 자극에 머물 곳을 만들어 준다. 


사람을 보는 엿보기는 그 사람을 만날것인가 만나지 않을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내린다. 자연과학 엿보기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 안에 세상을 뚜렷하게 구현시킨다. 


자연과학은 감각 너머에 있다. 부분과 전체에서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친구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내가 머물고 

있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일테면 원자의 세계 같은 -를 연결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소통을 하기 위해 

약속된 개념을 새롭게 만드는게 중요함을 알아서이다. 


원자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일반적으로는 직접적인 지각에 관련된 용어를 쓸 수 밖에 없다. 그게 내게 가진 전부이니 어쩔 수 없다. 자연과학 엿보기는 끊임없는 지식과 정보를 내게 들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감각 너머의 것을 내 일상경험으로 설명하려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 해외여행 몇 번 했다고 지구 크기를 논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심지어 우주 크기는 그저 크다 할 수 밖에.....


엿보기의 노력은 내 안에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리고 내 생각이 거기에서 한 껏 뛰놀게 한다. 끊임없는 흥미와 

새로움이 일어난다. 이것보다 즐거운 일이 있을까 . 


초원에 만발한 꽃의 색깔이 원자에 대한 사고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스무살 하이젠베르크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양자의 세계에 대한 지식과 새로운 세계를 열고 나서 바라본 초원은 분명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오솔길을 지나며 만나는 풀잎과 발길에 치이는 돌멩이, 머리결을 스쳐지나는 바람,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 작은 새, 손을 들어도 다 가리지 못하는 햇살, 저 멀리 보이는 솟아 오른 산, 그리고 나까지 다르고 새롭게 하기 위해 자연을 엿보아야 한다. 


어제와 같지만 너무나 새로운 세상,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