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람은 평생을 엿보기를 하며 사는 것 같아~"
친구 녀석이 밥을 먹다 말고 뜬금없이 한 말이다. 앞 뒤가 없이 툭 던지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게 뭔 말이냐고 묻는다.
" 일하느라 업체 사람을 보고 왔는데 자꾸 그 사람이 하는 말보다 나한테 원하는게 뭔지 내가 들여다보고 있더라구."
그 녀석은 가끔 이렇다. 궁금증을 유발하고 상대 반응을 살핀다. 주목받고 싶고, 관심받기를 원한다.
친구는 중학교 들어가면서 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다. 집안의 부도로 동생까지 입양을 보낼 정도의 환경이 자기를 우울증에 빠지게 된 원인이라고 말한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후 20년 이상을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살피는게 일상이 되었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사람을 만나도 자신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게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한 밤 중에 일어나 뒤척이기가 일수다. 친구는 정신과 상담부터 미술 심리, 인지 심리 등의 치료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감정 변화에 이야기를 매우 세부적으로 설명한다.
친구의 "엿보기" 지론은 이렇다. 사람과 사람을 만나던 풍경을 접하던 사건이나 상황이 일어나던 정면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야기를 들으면 그 뒤 이야기가 무엇인지 살피는게 자신에게 이롭다는 거다. 이야기 내용보다 그 말 뒤에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는게 자신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데 실수를 줄인다고 말한다.
풍경을 볼 때도 조금 독특하다. 해질 무렵 산을 보고는
" 우리는 빛을 보는게 아니라 차이를 보는 것 같아. 해질 때 산과 하늘이 어두운정도가 다르잖아. 면적이 아니라 어둠이 만든 산과 하늘이 만나는 선이 구분을 만들어. 그래서 산과 하늘을 아는거야. 그저 선인데 산이랑 하늘이라고 그냥 말로 정한거지. 나도 계속 그렇게 살고 있어. 자꾸 내가 어디있는지 경계 짓지 않으면, 남과 내가 다른게 뭔지 찾지 않으면 내가 어디 있는지 잊을까봐 두려워."
풍경 하나도 자신의 변화와 연관짓고, 풍경 너머의 변화에서 자기가 뭘 보고 있는지 찾아낸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시각 메카니즘에 근접하게 말하는 친구에 관찰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얼굴이 급 밝아져서는
" 난 평생 우울이 내 생각이 잘 못되서 그런지 알았는데 아닌것 같아. 약 바꿨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 문제는 마음이 평안하니까 이상하게 불안하기도 한다만. 아마 사람은 그냥 자기 몸을 쳐다보기만 가능한지도 몰라. 몸이 허락하니까 내 기분도 만들어지는거 아닐까 해."
친구의 관찰의 해석은 내장계, 자율신경계 등을 자아로 두는 에델만의 자아 이론과 비슷하다. 어떤 이론 없이 개인적 경험에 기댄 해석이 어디까지 가능할까를 생각하게 했다.
평생을 엿보기를 하고 있다는 친구의 지론은 "척과 티"에서 더 단단해진다.
" 사람은 엿보기를 하고 살기 때문에 척과 티를 내는 것 같아. 어떤 행동을 하는 척하는것은 남이 나를 보고 있을까봐 하는 행동이고, 어떤 행동의 티를 내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의 의도를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인거지. 그래서 사람은 어쩌면 평생 정면보기가 불가능해. 서로 척하고 티내면서 사니까."
나도 그랬다.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이 녀석이 무슨 의도로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목적없는 행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본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게 아름다운거야 라고 하고 있지만 이미 나는 내 모습을 만들고 있지 않던가.
텔레비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누군가 그랬다.
" 여유 있는 척하는 것과 정말 여유있는 건 다르다는 걸 보는 사람은 알아요."
주목하고 싶은 말은 사람은 척과 티를 구분하는데 에너지를 쓴다는데 있다. 우리는 미리 생각한다. 미리 이런
일이 일어날꺼야를 예상하고 다음 행동을 선택한다. 그래서 만들어 진게 척과 티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엿보기를 하고 산다. 갓난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울음 속에서 그 뒤에 숨겨진 배고픔, 졸림, 대소변 누고 난 뒤의 찝찝함, 등을 찾아낸다. 텔레비젼에서 근엄하게 이야기하는 정치인의 말보다 그가 했던 정책과 행동,
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말 자체의 이야기보다 말투, 억양, 행동거지, 자세에서 말의 진실을 찾는다.
중국의 황제가 자치통감을 읽는 이유를 황제의 품위와 격식을 위해서라 이야기 한다. 격은 어떤 장소, 시간, 때에 어떤 행동의 순서를 할 것인가의 식에서 나온다. 식에서 격이 나오고, 그렇게 만들어진 격이 쌓여 품격을 만든다. 척과 티라는 행동을 어쩌면 인간은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적절한 행동으로 바꾸었다.
사람도 물건과 같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이는 건 쉽지 않다. 일종의 포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척과 티를 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예절이든 매너든 꾸밀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옆보면 산다'
눈길과 손이 저절로 가는 제목이다.
노트필기에서 본 익숙한 '솔다렐라'
그는 박자세의 단순한 지식보다는 행위를 표현한다.
솔다렐라의 글이 진정으로 다가오는 것은
정서보다는 실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직접 뵌 적이 없지만 솔다렐라님 노트는 너무 많이 봐서
아주 친해진 저만의 느낌이네요.
옆 안보고
그 자체로 알기는 어렵겠죠?
담담하게 마음을 살피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솔다님의 그림 못지않은 훌륭한 글, 반갑네요
친구분의 '평생 옆보기' 는
옆보기를 통해 자신을 통찰하는 거라고 나름대로 짐작해봅니다.
요즘 장소 불문하고 드러내거나 나서기 싫어서
급기야 댓글쓰기도 주저했었지요.
솔다님을 비롯한 박자세의 열렬 팬들의 진실한 마음을 전하는 글을 읽으며
이제 조금씩 껍질을 벗고 못생긴 저를 드러내 보이렵니다.
누군가의 페이스북에 언급된 박자세의 소개를 보고,
박자세 홈페이지를 이리저리 들러보다가
제일 먼저 익숙해진 아이디는 '폴리아데스'이고,
두번 째로 익숙해진 이름이 '솔다렐라'였습니다.
폴리아데스님의 꼼꼼한 현장스케치는 생동감이 넘쳐서
얼마 가지않아 박자세 회원들의 얼굴과 닉네임이 익숙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박자세 수업에 참가하고 나서는
혼자서 속으로 아, 저분이 앤디강훈이고, 멘토님, 피데스님 이렇게 실물을 확인했었습니다.
그리고,
솔다렐라의 노트는 그냥 소장품으로도 흡족해서, 어떤 페이지는 코팅해 둔 것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그림을 현장에서 그리지? 하는 의구심을 갖으면서요.
그런데 사실 더 많이 놀랬던건 솔다렐라가 올린 글들이었습니다.
정서가 꽃잎이슬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것부터, 심오한 지식의 경지에 이른 글까지.
부럽기도 하고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을 수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더랬습니다.
박사님의 글쓰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아름다움에 대한 조언을 들으면서,
감정이 물씬 동반되어야 할 기억에 대해 배우면서
솔다렐라님의 수많았던 글들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반가운 이름의 글이 오랫만의 옛친구처럼 정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