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리

꽈리가 꽃밭에서 빨갛게 익어간다. 여름 땡볕의 기운을 받아서 더욱더 색깔이 짙어진다. 이놈은 생명력이 어찌나 강한지 기하급수적으로 자손이 늘어난다. 뿌리를 여기저기로 뻗어 뽑아내도 어느새 또 싹이 돋아나오는 끈질긴 힘을 자랑한다.

 

꽈리를 불던 시절로 돌아간다. 꽈리를 불려면, 먼저 손으로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만지면 하얀 씨가 삐져나온다. 그 다음에 입안에 넣어 조심스레 굴리면서 씨를 다 빼내야한다. 신경을 써서 집중하지만 실패할 때가 더러 있다. 어릴 적엔 터져서 불지 못하게 되면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런 반면 쌉쌀하면서도 달달한 맛을 즐기며 시를 빼낸 뒤 뽀드득 소리를 내가며 부는 맛은 어디에다 비할 수가 없었다.

 

여섯 살 때, 옆집 언니가 파란색 고무꽈리를 불면서 자랑했다. 이때까지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신기했다. 한 번 불어보자니까 언니가 휑하니 달아나버렸다. 속이 너무 상해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라댔는데 동네가게엔 파는 곳이 없었다. 큰집은 시내에 사니까 거기가면 사주겠노라는 다짐을 받고 나서 큰집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유달리 질녀인 나를 귀여워하시는 큰아버지는 동대문에 데리고 가서 고무꽈리를 사주었다. 빨간색 고무꽈리는 하얀 테를 두르고 있어 맘에 쏙 들었다. 꽈리열매처럼 조심스레 다루지 않아도 되고 터질 염려도 없어 하루 종일 불다가 두고두고 불 수 있어 애지중지 여겼다.

 

“꽈리”라는 동요를 들어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요즘은 이런 광경을 꿈에서나 보게 될까! 한 번 들어보자!

빨간 꽈리 입에 물고 뽀드득 뽀드득

동글동글 굴리다가 뽀드득 뽀드득

(중략)

병아리야!

너희들도 빨간 꽈리 불어보고 싶으냐!

다시 이 노래를 들으니 꽈리를 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차츰차츰 사라지는 이런 놀이문화를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살리고 싶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껌을 씹는 대신 꽈리를 불게 된다면, 기계문명에 물들어 딱딱해져 버린 어린 가슴들이 말랑말랑해져 부드러운 가슴을 갖게 될 것 같다.

 

가을이면 다닥다닥 달린 꽈리열매로 꽃꽂이를 하거나 장식용으로 집안에 걸거나 했었다. 일본에서는 음력 7월 15일인 백종(百種)을 앞뒤로 조상님께 공양을 드린다. 꽈리열매로 꽃꽂이를 하거나 다발로 묶어 올리는 것이다. 왜 올리는지 잘 모르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절에서도 똑 같이 올린다. 이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동경의 센소우지(淺草寺)에서는 음력 7월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꽈리시장이 매년 열린다고 한다. 아마 조상님께 올리려고 사가는 듯하다. 벌레도 안 먹고 생명력이 강해 잘 클 뿐만 아니라 열매도 풍성하다. 게다가 씨도 소복하게 들었으니 자손들이 꽈리처럼 되기를 비는 마음에서 조상님께 올리는 건 아닐까!

 

언젠가 누가 약으로 쓰면 좋다고 해서 이젠 꽈리열매를 꿀에 재어두었다가 쓴다. 약으로 쓰기보다 차로 많이 마시게 되는데 마실만하다. 엑기스를 물에 희석해서 손님들에게 내가면 신기해한다. 오렌지색이 나는 이 음료수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다. 꽈리라고 하면 모두들 놀란다. 그리고는 자기네들도 꽃밭이 있으면 심어서 담아보고 싶다고들 한다. 아파트 베란다의 화분에 심어보라고 꽈리열매를 안겨준다. 내년이면 각자 좀 더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리라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마음이 즐거워진다.

 

일본 유학시절, 향합 작품전을 보러 갔다. 차하고 관련된 도구 중에 하나로 향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차도구이다. 이리저리 보다가 이상한 향합을 발견했다. 꽈리주머니로 만든 향합이었다. 꽈리를 감싸고 있는 주머니는 예쁘긴 하지만 이걸로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에 정말 놀랐다. 빨간색이 나는 주칠을 여러 번 올려 만들었다. 더 신기한 것은 주머니의 반을 갈라 뚜껑을 열고 닫을 수 있게 해놓아 정교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주머니는 오래되면 섬유질만 남아 섬세한 구멍이 생기는데 그것을 잘 살려 자연의 멋을 충분히 보인 장인의 솜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또 요리재료로도 꽈리를 쓰는데 익힌 것을 다른 요리와 함께 곁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약전음식의 재료로 효능이 탁월할 뿐 아니라 빛깔이 예뻐 색감을 중요시하는 일본요리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쓴 맛도 있으나 단 맛도 있기 때문에 입가심용으로 주로 쓰이는 것 같았다. 꽈리만 가지고는 요리를 안 하고 고기나 생선요리 등의 고급요리와 함께 나온다. 일반가정에서 쓰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꽈리를 불어 본지 오래다. 이젠 부는 사람도 보기 힘들다. 초등학교 시절에만 해도 많이 불었던 꽈리이다. 도시에 살아서 고무꽈리였지만, 가을이면 꽈리열매를 사서 만들어 불 때도 가끔씩 있었다. 요즘은 꽈리대신 입안에 껌을 씹는 사람이 많아졌다. 꽈리 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지만, 껌 씹는 소리는 누구라도 듣기 싫어한다. 얼마나 듣기 싫으면 “껌 씹는 소리를 내지 마시오!”라고 버스의 운전석 옆에 써 붙여 놓았겠는가! 그뿐인가! 음악회나 극장에서도 껌 씹는 것은 금기로 되어있지 않는가! 껌 대신 꽈리를 부는 아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 음악을 듣는 기분이 되어 가슴이 따뜻해질 것 같다. 그리 먼 옛일도 아니건만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울먹여진다.

 

꽈리를 입안에 굴리면서 불던 꽈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쓰이는 용도가 달라졌다. 나라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변하지만 항상 우리 곁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열매이다. 앞으로 꽈리의 변신은 어디까지 갈까?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꽈리는 그대로인데 사람에 의해 여러 가지로 쓰이는 걸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 자신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계속 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조차 안 해본 것 같아 후회스럽다. 아무리 변신을 해도 꽈리는 입에 넣고 불어야 제 맛이 난다. 그렇다면, 나다운 멋은 무엇일까? 그 멋을 안 다음에야 변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보다도 꽈리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뻗어나가듯 나도 그런 힘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