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상대성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대성이론, 중력장 방정식, 양자 역학, 지질학, 뇌과학, 분자 생리학 등에 등장하는 여러 수식과 공식, 화학식은

모두 일상언어에 벗어나 있다.  일반적으로 점심 식사 시간에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상용어가 가상세계와 현실을 구분하게 한다. 경험이 공간과 장소를 나눈다. 언어가 시간의 속박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벗어나게 하였다. 언어가 만든 연속성이 예측을 탄생시키며, 과거, 현재, 미래의 기억을 만들었다. 

목적 없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우리는 의미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언어가 만든 가상의 세계인

문화속에서 살아가며 쉴 틈 없이 일상용어로 추상세계와 현실을 갈라 놓으며 살고 있다.

 

일상용어를 쓰는 것 자체가 현실에 산다는 말이다. 밥을 먹는다. 화장실을 간다. 돌 잔치는 언제다. 여행은

어디로 갈 것이다. 등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일어나는 현상에 주목되어 있기에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다.

 

일상용어의 대부분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기준으로 일어난다. 감정에 충실한 언어의 대부분이

일상용어이다. 사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고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이 사람의 감정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행을 다녀오고나서 산에 화를 내고, 강에 트집을 잡고, 나무에 짜증을 내는

사람은 없다. 같이 간 사람에게 모든 감정을 퍼부으며 상처받고 상처주기를 반복한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정서를 바탕으로 한 감정에 물든 단어가 일상의 용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변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뇌가 만든 현상이기도 하다. 시간이라는 단어가 변화라는 속성을 포함하고 있으니

시간을 느낀다는 말은 변화를 느낀다는 말과 같다.

 

 

일상적으로 쓰는 이야기로는 생각과 사고의 깊이를 확장시키기 어렵다.

 

일상용어를 전문용어와 교과서적 언어로 대체 하는 순간 우리는  생각의 확장이 일어난다. 감정에

물들어 자신의 정서에 기댄 정보에서 벗어나 사물의 기원과 현상의 패턴을 발견하고 규명된 이야기로

사고를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길을 가다가 기가 맑은 사람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발목을 접질렀을 때 재수가 없어서 라던가 누군가 저주를 퍼부어서라는 추측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부정확하며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믿고 있다. 우리 부모님도 집이 부도로

넘어가고 가족이 사고를 당하고, 소송에 휘말릴 상황에 놓일 때 점을 봤었다. 누군가 해답을 내어 놓으면

거기서 안심을 하고 안도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이 상황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변호사가 소송과

재판을 해결해 주었다.  

 

십년 전에도 했던 드라마와 어제 먹은 식사 얘기로는 우리의 생각을 넓힐 수 없다. 일상용어를

Universal Language로의 대체는 생각을 넓히며 동시에 일상의 공간을 확장 시킨다. 여기에 의미가 있다.

 

한번쯤 생각해 보자. 친구들과 혹은 형제, 가족, 모든 만남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아마 백년 전 사람이 이야기하고 사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이다.

 

 

 

시간상으로 비슷한 정보가 들어오는 그 자체가 현실이다.

 

반복된 삶의 굴레 그 자체가 현실을 탄생시켰다. 삶의 괴로움도 반복에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는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의 추론'에서  권태야 말로 의식의 탄생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계속되는 시간속에 흥미를 잃고 새로움을 찾지 못한 순간에 오늘도 내일도 또 모래도 그 다음날도

같은 날이 지속된다고 하는 순간 권태가 나타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의식이 탄생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현실이다. 시간상으로 비슷한 정보가 들어오는 그 자체가 현실이다. 꿈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기에 꿈이다. 예측이 가능한 것도 모두 반복된 패턴으로 이루워진 현상이 있기에 가능하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반복일 때 의식되지 않는다. 불규칙한 부정맥 같은 현상이 일어날 때 적신호가 된다.

의식되지 못한 반복에 지금이 있다. 그 반복 위에 시간이 생기고 과거와 미래가 생성되었다.

 

반복되는 자극이 현실을 만들었다면 반복되는 일상용어를 바꾸면 어떠할까. 이것이 내가 말하고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박자세에서 추구하는 것처럼 공부가 일상이고 일상이 취미가 되는 현상이

일어나면 현실은 바뀐다.  

 

 

 

 현실이냐 가상이냐라는 단어를 구분하는 현상이 바로 일상언어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니라 반복에 살고 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곳을 '공간'이라 부르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곳을 '장소'라고 구별한다. 이푸 투안과 에드워드 렐프의 이론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장소에 공간을 배치하고, 자신의 장소에 공간을 넓히면 그 또한 확장된

장소를 품는 나를 만날 수 있다. 관습적인 공간을 개인 경험의 장소로 만드는 주체적인 시각과

진정성이 필요한 법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세상이 수 많은 세계로 이루워져 있음을 시사한다. 장소에서 공간을 품는 행위가

세계를 구분하고 나뉘게 하였다. 현실이냐 가상이냐라는 단어를 구분하는 현상이 바로 일상언어이다.

 

일상언어에 매몰되어 산다는 것 자체가 현실에 머문다는 말이며 반복된 현상에 구속된다는 의미가 된다.

일상언어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어떤 이에게는 현실을 외면하고 관계를 끊는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고 검증된 정보를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관상을 보니 재물복이

있다느니, 돼지 꿈을 꾸었기 때문에 복권을 사야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정보가 매우 적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 일본 사람이 못되게

굴어서 하늘이 벌을 내린 거라고 말한다. 백두산이 터지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 질문에 어떤 분은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무릎을 꿇어야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라고 답을 한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이

인간에 의해서라고 서슴없이 이야기 한다. 

 

뇌졸중 환자나 뇌성마비 교통사고, 척수 손상, 암, 종양, 등의 질환에 걸렸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무슨 죄를 지었길레 이다. 내 몸에 일어나는 현상까지도 죄를 지어서라고 말한다. 정보는 오간데 없고 

전생을 따지고 인과율의 법칙인냥 이야기한다.

 

 

 

 

현실에 머문다는 건 시간에 갇힌다는 것과 같다.

 

 

현실에 머문다는 건 시간에 갇힌다는 것과 같다. 똑같은 주제와 현상에 머문다는 것이니 시간에 갇힌것이다.

비슷한 패턴의 질문을 반복하여서는 생각의 크기는 좀처럼 커질 수 없다. DNA나 신경과학, 빅뱅등의 용어는

한 때 일상용어에 속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빅뱅을 쓸 만큼

친숙한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어떤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얘기를 하고 사회적으로 익숙해지는 순간

보편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식으로써 통용된다.

 

Universal Language로 생각한다는 것이 가상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일상에서 쓰지 않는

용어이지 가상은 아니다. 왜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대부분이 Universal Language에서 나온 실체이기

때문이다.

 

일상용어에서 벗어나기는 단순히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를 말하지 않는다. 전문가가 전문가인 이유는

전문용어로 말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를 선택하고 쓰는가가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킨다.

 

 

 

생각의 확장은 깊은 생각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사용을 통해 확장된다.

 

생각의 확장은 깊은 생각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사용을 통해 확장된다. 뇌과학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은 뇌과학의 전문용어로 생각하는 현상이다. 우주를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성 이론과 중력장

방정식 등의 수식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생명을 말하는 것은 생명이 가지는 위대성에 대한 미사여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자 생리학, 고생물학, 생물학, 등의 용어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표현할 때 격이 있다 없다를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단어를 구사하는지에 달려있다. 왕족은

왕족의 언어로, 귀족은 귀족의 언어로, 격이 낮은 사람은 은어와 속어 등의 언어를 구사한다.

 

생각의 범위가 사람의 범위라고 한다면 이것은 결단코 언어의 이해를 통해 일어난 현상이다. 어떤 현상, 사물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 이해한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만든 세계에 살고 있다. 일상용어에서 줄이기는

정보를 포함한 언어의 확장이 우리를 오류 없는 현상을 추구하는 모습이며 선택이다.  Universal Language와

같은 용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삶에 대입시킬 때 일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움으로 탄생되는 일상을

만나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나무의 흔들림에서 산소와 태양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밤 하늘에

수 많은 별들의 기원을 추적하게 되고, 우주의 크기를 가늠하게 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앎의 세계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 목적이 있다. 현실을 더욱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친하게 진해는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공부하는 박사들은 진화는 좋아하면서 진보는 거들떠 보지 않고,

진보를 주장하는 이들은 진화 공부를 게을리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상이 제자리에서 맴돈다. 바꾸는 것보다

바뀌는데 신경을 써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누가 누구를 바꾸는게 아닌 스스로가 바뀌기 위해서 박자세식 학습인 일상용어 줄이기가 필요하다.

 

공부하면 솔직해 진다. 솔직해지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없으면 당당해진다. 당당해지면

누구를 핍박하거나 굴복하게 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높은 벽을 쌓는 법이다.

 

맑고 투명한 만남과 사람이 되는 방법은 공부하여 솔직해지고 두려움이 없으며 당당하여 누구를

핍박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가치적 범주가 머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