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여인


  박사님이 뇌과학 강의 2강 중 안톤 체홉의 단편 소설인 ‘귀여운 여인’을 통해 공부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의심없이 공부하기, 쓸데없는 질문없이 공부하기, 그래서 제대로 된 질문을 하나 턱 하고 물어서 매달려 보기 등은 수업 시간 공부의 자세로써 늘 강조해 온 사항입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매우 공감가는 말이라 생각하여 혼자 웃었더랬습니다. 귀여운 여인 올렌카는 남편을 세 번이나 잃었지만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는 의지의 여인입니다. 극장 지배인, 목재상, 수의관의 부인으로 그때마다 남편의 삶에 자기의 생각과 행동 모든 것을 맞추는 생활을 합니다.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면에서 주체성이 부족한 삶이라 비판할 수도 있지만,  한편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읽히기도 합니다. 올렌카가 자신을 대상에 맞추는 것은 단순한 희석이 아니요, 상실이 아닙니다. 내가 아닌 존재에 자기를 맞춘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의견이요,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건 나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보통은 연애할 적에 조금씩 경험해 보았겠지만 저는 좀 늦은 나이에 다른 대상으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4년 전 중학교에 입학하는 큰 아이의 학교를 대안학교로 정해 두고 우리 부부는 전국의 50여개의 대안 학교에 관해 알아보고 방문하며 우리 아이에게 어울리겠다 하는 곳 몇 군데를정하고 입학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학생뿐 아니라 부모도 자서전에 가까운 장문의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고, 각 학교에서 요구하는 설문에 꼼꼼하게 답해야 했으니 다섯 달에 걸친 입학 준비는 가족 모두의 큰 정성이 필요했습니다. 이름이 좀 알려지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학교는 경쟁이 만만치 않았고 우리 가족은 번번이 불합격이라는 통보를 받아야 했습니다. 애초부터 안되면 모르겠는데 1차 서류심사는 늘 통과했기에 온 가족이 전국을 돌며 면접을 보는 일로 주말을 보냈습니다. 힘들기만 했냐하면 그도 아닙니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가족들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기에 아이와 부모가 서로를 알아가는 진지한 자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애정이 돈독해지는 큰 덤을 얻었습니다.

 

  명성 있는 몇 군데 학교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은 저는 점차 귀여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체 우리집이 안되면 누가 되는거냐 하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만방자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야속한 심정은 오간데 없고 제발 붙여만 주면 학교에서 하라는대로 삶을 맞추어가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해 신설되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 대안학교를 찾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말대로 대한민국 ‘공부꾼’이 다 모여 있다는 그곳에서 저는 면접 때 여지없이 올렌카가 되었습니다. 면접관 선생님이 그간 대안 학교 입학 준비를 어떻게 해 왔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 체홉의 소설 귀여운 여인을 보면 결혼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온전히 맞추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의존적인 삶을 싫어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귀여운 여인처럼 해보려고 합니다. 돌아보니 전에 지원했던 학교도 저에겐 귀여운 여인이 만나 사랑했던 남편과 같았습니다. 아마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열심히 사랑했을 겁니다. 다만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 이유는 아마도 저를 어딘가에 맞추어 변화시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지금만큼 간절하지는 않았기 때문일겁니다. 전에 학교들도 좋은 남편감이었지만 이제는 지혜학교가 저희 집 마지막 남편으로 오랜 시간 같이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희 가족에게 풍덩 빠져서 사랑할 기회를 주세요. ]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호소했던 저를 보고 면접관으로 계셨던 두 분 선생님이 짓던 너털웃음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온 몸을 던져 사랑할만한 대상을 찾아내고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며,  나를 용해할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 또한 대단한 일입니다. 가치있는 대상을 찾을 혜안도 있어야하고 이러다 내가 없어져버리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아이의 학교를 통해서 아이만 자란 것이 아니라 저희 부부도 좋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같이 공부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서로가 조금씩 새로 태어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작년에 만난 박자세를 통해 저는 또 귀여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고 소소한 다툼이나 생각지 못한 배신의 아픔이 도사리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상황에 휘둘림이나 두려움 없이 나를 맡겨볼 대상을 찾았다는 것은 제 의지뿐 아니라 인연이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법성은 깊고 깊어 극히 미묘하니 자성을 지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르는 것이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문이 열리면 바람이 들어오듯이 시절인연이 도래하여야 한다.

- 법성게 한 구절. 박문호 박사님 해석을 참고함.

 

  어찌 법만 그러하겠습니까. 문을 여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니 무엇보다 우선해야겠지만, 바람이 부는 때를 만나는 것은 시절 인연과도 같은 것이니 이러한 공부의 인연이 닿은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