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건 땅을 걷는 것과 동시에 하늘 아래를 걷는 것입니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영주들의 땅을

재는 방식이 독특했습니다. 지금처럼 측량이라는 척도를 기준으로 길이를 잰 것이 아니라 측량을 위해

고용된 사람이 하루동안 걸은 거리를 기준으로 땅을 측량하였습니다. 이것을 '코뮌'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리' 단위가 됩니다. 최소 부락의 크기입니다.


 걷는 다는 것은 땅을 걸으면서 동시에 나를 측량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 자신의 규모와 치수에 맞는

세상 속에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걸을 때마다, 세계가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 걷기의 철학을 쓴 크리스토프 라루르는 말하고 있습니다. 

 

걷는 다는 것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걷는다는 행위는 나를 끌어왔고,

나가게 하는 의미를 전합니다.


교통수단이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으로 확장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 세상을 측정하는

시간이 지나 공간이 세계를 더듬는 현재에 머물게 합니다.


비행기 기장님과 식사를 하던 도중에 평소에 식사는 어디서 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기장님의 말이 어제 

아침에 부산에서 식사하고 점심은 싱가폴에서 저녘 즈음에는 상해에서 먹었다고 합니다. 비행기라는 수단으로

세상에 살다보니 그 공간과 시간의 크기가 남들과 다르게 됩니다.  


비행기 자동 장치로 거의 비행을 하고 있지만 본인이 어디 즈음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파악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박자세 학습탐사를 하며 미국, 몽골, 서호주, 베트남 등을 다녀왔습니다. 그 외에도 중국, 태국 등도 다녀 왔습니다.

그리고나서 지구본에 있던 세상이 제게 들어왔습니다. 가끔씩은 몽골의 사막과 초원에 머물기도 하고, 서호주

마블바의 고요함에 도취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기억의 공간에 빈 구멍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정작 떠오르는 기억은 대부분

이미지이고 세부적 감각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와중에 또렷이 떠오르는 공간은 세부적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 모르게 덩어리진 기억입니다. 덩어리와 덩어리 사이가 흐릿합니다.


몽골에 내 눈 끝닿는 그 곳까지 피어있는 부추꽃의 냄새, 초원 곳곳에 놓인 가축의 배설물, 발바닥마저

두근거리게 만들던 거란성터, 호르고 테르킨 국립공원에서 모닥불에 피어나던 불꽃을 따라 눈길을 옮겼을 때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 싱싱하게 팔딱거리던 그 별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 발로 하나씩 밟아 올라 엉덩이 걸치던 서호주의 조립현무암, 그리고 그 곳에서 들어던 침묵의 소리는

아직까지도 깊게 울리고 있습니다. 바람소리마저 놀라서 탐사대원의 곁을 고요히 지나가던 그  장소는

지금도 때때로 떠올립니다.


모두 내 걸음속에 숨어든 기억입니다. 몸과 함께 스며든 풍경이 덩어리진 기억에 살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시절에 동네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합니다. 국민학교 선생님을 하신 아버지 덕분에 많은 시간을

여러 시골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시골은 어제 걸은 서울 시내보다도 더 선명합니다. 


어쩌다 한 대 지나가던 군내버스가 남긴 비포장 도로의 흙먼지가 인상적이던 동네입니다. 경운기가 지나가고

 바퀴가 풀을 헤치고 좁은 길을 만든 강뚝이 있습니다. 그 강뚝길을 따라 걸으서 강에 도착합니다.

좁은 강에 보를 만들어 물이 고이면 온 동네 아이들은 여름네 멱을 감았습니다. 이 산 저산 쏟다니며 동네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는 서울은 어쩌다 찾아보는 길찾기 어플에서나 그 크기를 가늠하고 있습니다. 북한산 백운대에서

바라보는 서울에는 내 기억의 빈구석이 가득합니다. 내 발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세계가 세상에 그리도

많이 존재합니다.


법렴스님이 쓴 '포행'을 읽으며 그 길이 어찌나 걷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법렴스님이 발걸음마다 피어나는

오래된 땅의 기억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매스미디어가 그리도 발달 했음에도 손으로

만지고, 걷고, 냄새 맡고, 풍광을 깊이 받아 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글이었습니다.

 

내 안에 가득한 지식이 있더라도 그것을 내 몸이 느끼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네비게이션이 발달하여 자동차 운전을 하는데 편안해졌음에도 이상하게 남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가면서 시간을 줄이고 고민하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대신에 길을 찾기

위해 필요한 수고로움을 잊어 버렸습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모퉁이 하나까지 기억하려 노력했습니다.  지도와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동일시 하려던 수고로움이 사라지며 내 안에 세계상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발로 걸으면 내 안에 세계가 확장될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학교를 가기위해

걸었던 그 길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땅이 발바닥을 두드려 열린 세계가 두근거림을 만듭니다. 하루종일 심하게 걷고 들어온 날 샤워를 하고 방에

고요히 앉아 있으면 발바닥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발바닥이 기억하는 세계가 거기에 있습니다.

 

몸과 함께 기억하기가 세상을 내게 들어오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