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릴 때 살던 동네에 작은 책 대여점이 있었다. (요즘도 이런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책장으로 만든 통로가 있다. 책장에는 주로 소설책이 꽂혀있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책장 때문에 이 구역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 낮에도 약간 어둡다. 옅게 깔린 그림자 속에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손때가 잔뜩 묻었다. 책표지를 싼 비닐도 온전하지 않다. 책장이 떨어져 나가 반 이상이 스템플러를 박았다. 고문서 같은 책장을 넘기면 책이 몸을 닳아가며 만난 시간 그리고 사람들과 이어지는 기분이 든다.
내 작은 걸음으로 다섯 발 걸어가면 주인아주머니의 책상에 닿는다. 책상을 지나 몸을 돌리면 만화책이 진열된 책장 통로가 나온다. 반대편과 달리 이곳은 정면에 난 큰 창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환하다. 책 한 권을 꺼내 그 자리에서 읽을 수 있다. 그때 서서 읽은 만화책을 다 세면 큰 책장 세 개는 될 것이다.
그 책방에 가면 읽지도 않은 책들이 전부 내 것 같았다. 참 열심히 갔다. 사실, 순수하게 책이 좋아서 간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책 대여료는 소설책이 600원, 만화책이 300원이었다. 어린 나는 매일 아침 아버지께 손을 벌렸다. ‘책’을 읽고 싶다는 자식에게 아버지의 지갑은 언제나 쉽게 열렸다. 가장 작은 액수가 천 원이었고, 만 원짜리 지폐가 나온 적도 있었다. 어머니였으면 어림없이 동전으로 600원이었을 것이다. 영악했던 어린아이는 그걸 잘 알았다.
학교가 끝나면 아침에 받은 천 원을 꼭 쥐고 책방으로 달려갔다. 주인아주머니께 추천받은 소설책 한 권을 빌리면 손에 400원이 남았다. 그것으로 책방 옆에 붙어 있는 구멍가게에서 100원짜리 불량식품을 샀다. 한 손에 책, 다른 한 손에 불량식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산들바람이 실렸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달콤한 과자를 녹여 먹으면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계기야 어찌 됐든 그때 가장 많은 책을 본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 점점 책방 가는 날이 줄어들었다. 손에 책보다 교과서가 들려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책방은 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추천받았던 책이 안도현의 『연어』였다. ‘다음번에 와서 빌릴게요.’라고 말했는데, 아직 빌리지 못했다.
가끔, 아버지께 아침마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던 그때가 생각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 방식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있는지도 모릅니다. 공간을 나를 중심으로 배치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오른쪽에 혹은 왼쪽에, 위나 아래에, 있다고 기억을 구성하는 식이지요.
물건이 기억을 품고 있는 것도 인간의 기억 방식이겠지요. 물건을 보면 생각이 떠오릅니다. 배가 그리 고프지
않다가도 분식점의 떡볶이를 본다거나 텔레비젼 광고의 음식 광고를 시청하면 먹고 싶은 맘이 생기는
이유도 일종의 기억방식입니다. 그래서 물건을 사랑하고 집착하고 애정을 품고 간직하려 하나 봅니다.
어떤 공간과 물건은 서로가 서로를 증명합니다. 동네 첵방이나 중고서점의 냄새는 삐까번쩍한
대형서점에서는 맡을 수 없는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오래된 책이 풍기는 퀴퀴한 냄새에 거기의
기억이 달라 붙습니다.
책은 글자의 공화국임과 동시에 손으로 들 수 있는 가장 깊고, 넓은 왕국입니다. 핸드폰은 두드려야 나오지만
책 속의 글자는 머물러 나를 기다리는 나무이며 바위 같습니다.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 공터이며, 시골길
구불진 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생각하게 만드는 아릿함이 있습니다. 핸드폰의 편리함이 주지 못하는
친절함이 거기 있습니다. 물론 과학서적과 철학책, 고문서처럼 뻣뻣한 삭신으로 팔짱 끼고 있는 듯한 책도
존재합니다. 그런 책은 꼭 츤데레처럼 느껴집니다. 차갑게 대하면서 알고 보면 나를 챙겨주는 느낌이지요.
독서는 단단한 고독을 선물합니다. 책과 나의 독대는 책이 나를 보는게 아니라 내가 책을 보게 하여
결국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책방은 독대를 기다리를 책의 집결지이며, 정류장입니다.
동네 책방.....제목만으로도 느낌이 있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