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북스 시절, 2010년 1월에 문건민 회원님이 쓰신 글을 올려봅니다.

 

 

 

 

#1.

 

서울백북스의 박용태 PD님은 이번 뇌과학 강연의 내용을 한번 정리해 보라고 하셨지만

제가 박문호 박사님의 뇌과학 강연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작년에 137억년 우주의 진화 강의에서 시작하여 천안에서의 뇌과학대학원 강의와 대전 온지당에서의 천문우주+뇌과학 모임 발표로 쭉 이어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백북스와의 만남과 나의 뇌과학 공부를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는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인생을 바꾸자, 백북스하자,

이 슬로건은 내 가슴에 깊이 다가온다.

백북스에 나온지 반년이 넘어가는 시점, 내 인생이 이제 바뀌어가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1.백북스를 만나기 전


나는 자연과 접하기 좋은 곳에서 자랐고 꽃과 나무 동물에 관심이 많았기에 중고등학교때 과학 과목 중에서는 생물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부터는 생명이나 생물과 관련된 주제의 책은 읽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고시공부를 하면서는 과학은 나와 관계없는 세계의 일처럼 멀어지고 말았다. 자연과 생명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는 갈증자체를 잊고 살았다고 할까.


사법시험 합격발표가 나고 나는 안도했다.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었다. 여러 해 고배를 마셨던 탓인지 와, 합격이다! 라는 기쁨보다는 드디어 끝났구나 라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고시공부가 끝나갈 무렵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피할 수 없었던 생각은 ‘나는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이것저것 물어올 때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계와 인문계를 나누어 놓고 어느 한 분야의 지식만을 따라가게 하는 교육제도, 그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인간이 바로 나구나! 어디 과학 뿐이랴. 인문 쪽에서도 법률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시험에는 다행히도 합격했지만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만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는 고시공부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에 관한 폭넓은 독서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해를 보낸 탓에 나는 속이 빈 것처럼 허전했다. 이런 내가 과연 제대로 된 법조인이 될 수 있을까?


법조인의 소양 이전에 내 생활 자체가 불편했다. 신문에서 최신의료장비에 관한 기사를 읽어도 용어가 생소해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문제 예컨대 인간복제 허용여부가 이슈가 될 때도 내 머리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심리학책을 읽어도 신경전달물질이나 뇌 구조 등을 모르고서는 영 답답했다. 아이가 커가는 과정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싫어요’를 연발한다든지 이유 없이 떼를 쓰는 시기가 있게 마련인데 이럴 때도 나는 고민했다. 발달단계상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반항기가 온다더니 그게 이때쯤인가? 아니면 혼을 내서 버릇을 잡아야 하나? 아이들의 뇌는 언제쯤이면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궁금한 것들은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알고 싶은 것들은 많아지는데 반해 내게 책을 뒤적일 시간은 별로 없었다.

아직 먹고 자고 싸고 노는 것 어느 하나 혼자 할 수 없는 어린 아들들. 출산 후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두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이 드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뜨면 아이들 먹을 것 만들고, 먹이고 나면 똥 씻기고, 깔깔거리며 도망 다니는 놈들 잡아다 기저귀 채우고, 낮잠 재우고, 그림책 읽어주고, 몸 부비며 놀아주고, 아이들 잘 노는 틈에는 빨래 돌리고 집안정리로 하루가 갔다. 젖먹이 아기는 수면리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밤에 여러 번 깨어 울고 매번 다시 업어 재워야 했다.


(세상의 사랑에는 말로 할 수 있는 사랑과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음을 이때 알았다. 연애시절의 사랑이 말로 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자기 몸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는 줄 수 없는 사랑이다. 나는 그 이후로 세상의 어머니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만성적인 피로와 수면부족 상태였기에 두 아이를 다 재워놓고 이제 드디어 내 시간이구나 하고 책상 앞에 앉으면 곧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그럴 때면 억울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에 대해서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도 아니었다. 너무나 간절히 책이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 화가 났다. 고시공부하는 동안은 비인간적으로 공부만 해야했다면 이제는 비인간적으로 공부로부터 차단된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태어나서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기가 막혔다. 하루에 20페이지 읽으면 성공이었다.


아기는 기가 막히게 예쁘지만 한편으로는 내 체력과 정신력을 쏘옥 빨아들여 버리는 독특한 존재였다.

원래 아기들만 보면 눈이 커지고 아이들과 놀아주기 좋아하는 성격의 나였지만, 정작 내 아이들을 키우느라 자신을 위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자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나의 존재감을 찾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지면서 기분이 쉽게 가라앉고 우울해지기도 했다.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얘기라도 좀 하면 풀리련만, 남편은 직장일로 바빠 매일 늦게 들어오고 아이들은 내 얘기 들어주기엔 너무 어리고. 모유수유 하느라 한 두 시간씩의 외출도 자유롭지 않았다. 사회적인 관계가 차단된 상태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육체적인 피로와는 또 다른 복병이었다. 주부 우울증이라는 것이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보다 하고 마음으로 이해했다.


전에는 나 스스로를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고 자부해왔는데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아 건강하게 태어나고 훌륭한 부모님 만나고 좋은 환경속에서 자라왔기에 진짜 어려움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부서지기 쉽고 상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인간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아기가 혼자 서툰 숟가락질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하루에도 몇 번 씩 부엌바닥에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여기저기 떨어진 젖은 밥풀들을 주워야했다. 이상하게도 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고 울컥해졌다.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내안의 나’는 화를 냈다. 이게 뭐야 ! 나도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단 말이야 ! 책 좀 보고 싶어! 내 안을 좀 채우고 싶다고!


그 즈음에는 남편을 포함하여 ‘아침이면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약오를 정도로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엘리베이터에서도 책 볼 수 있고 버스 기다리면서도 책 볼 수 있고 점심시간에도 밥만 먹고 나면 자유시간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꾀를 내어 아기 낮잠재울 때는 아기를 업고 한손에는 책을 들고 한손으로는 아기엉덩이를 도닥이며 아파트 복도를 왔다갔다 하며 책을 읽었다. 짧은 순간들이지만 그 때 읽은 내용들은 신기하게도 오래도록 남았다.


2. <뇌, 생각의 출현>을 접하고 137억년 우주의 진화 강의를 듣기 시작


둘째 아이가 생후 1년쯤 되어 밤잠도 잘 자고 젖을 뗄 즈음이 되자 나에게도 시간여유가 조금씩 생겼다. 서점에 다니며 책을 고르고 읽기 시작했다. 로마역사, 독서지도, 심리학, 가정의학, 생물학, 우주탐사에 관한 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어린이용 책도 읽었다. 그러다 보니 역시 내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과학이구나 싶었다. 고등학교 이후로 과학책은 안 보았는데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쉬운 접근을 해보려고 과학에세이나 과학자의 전기 같은 쉬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어가는 과학 책의 권수가 늘어도 뭔가 채워지지 않았다. 책의 페이지 수나 가격에 비해 ‘함량미달’이라는 느낌.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새로 얻는 지식의 양이나 질이 낮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과학서적 코너에서 딱 눈에 띈 책이 <뇌, 생각의 출현>이었다. 책날개에 적힌 저자소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인문과학 30%, 자연과학 70%의 책읽기? 이런 독서를 수십 년간 해온 사람이 있단 말이지. 놀랍군. 이 사람이 쓴 책은 도대체 어떤 책일까 더욱 궁금해졌다. 책의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며 읽어보았는데 다 이해되진 않지만 왠지 재미가 있었다.


집에 와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곧 막히고 말았다. 뇌에 대한 책이라더니, 우주배경복사, 허블상수, 초신성, 적색거성 얘기가 나오는데 당시의 나로서는 다 생소하여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왜 뇌과학 책에 우주얘기가 나오는가를 몰라 이상하게 생각했다. 겨우 넘어가니 이번엔 세포얘기가 나오는데 그나마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으로는 다 이해되지 않았다.


이 책을 꼭 이해하고 말리라. 일단은 뭐가 중요한지 그리고 핵심단어는 무언지 정도라도 알아보자는 심정으로 조금씩 더 읽었다. 한편으론 ‘부교재’로 쓰려고 생물학 교과서 한 권을 샀다. 대학교재라서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설명이 친절했다. 복잡한 내용도 그림과 사진 등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과학 잡지도 보게 되었다. 과학에 쉽게 접근해 보겠다고 ‘쉬운’ 책들을 기웃거리는 것보다는 의욕적으로 교과서와 한 판 붙는게 더 빠른 길임을 알았다.


그러다 <뇌 ,생각의 출현>의 저자 박문호 박사님의 ‘137억년 우주의 진화’ 강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벌써 절반 이상 지나가 버렸음이 안타까웠지만 한편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137억년 우주의 진화 강의를 들으러 가던 날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경복궁 부근의 강연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 3호선을 탔다. 지하철이 한강을 넘어 갈때쯤 창밖으로 어둠속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과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아... 얼마만의 저녁외출인가. 4년이라는 기간동안 나의 삶을 채운 임신, 출산, 육아.. 그렇게 책과 공부에 목말라 했던 내가 드디어 공부를 하러, 강의를 들으러 가는구나. 꿈만 같다... ’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나 혼자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3. 본격적인 뇌과학 공부의 시작


백북스를 알게 되고 같이 책읽고 공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다 박문호 박사님의 뇌과학대학원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매주 3시간씩 14회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교재는 이원택 교수님의 <의학신경해부학>이었는데 박사님께서는 이 책은 세계적인 수준의 교과서이니 학기 끝날 때까지 5번 읽으라고 주문하셨다. 고시공부 시절 이후로 이렇게 두꺼운 책은 본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이런 책을 공부한다는 것이 신선해서 나는 고시공부 할 때처럼 책에 자로 줄을 긋고 핵심용어나 암기할 문장에는 형광펜을 치며 읽었다 (자로 줄을 긋는 것은 반복해서 보는 책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빨리 줄을 그어도 글씨부분을 가리지 않는 장점이 있다. )


뇌에는 대뇌와 소뇌가 있고, 소뇌는 우리 몸에서 균형감각을 담당하고, 좌반구와 우반구가 있고.. 하는 정도의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던 나에게 뇌와 신경의 구조를 공부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박문호 박사님의 수업 중 암기사항으로 강조되는 부분은 반복해서 외웠고 교과서에 나온 그림을 투명한 종이를 대고 그리는 연습도 했다. 특히 ‘스무번 그리면서 외우라’고 하신 그림들은 집에서는 이면지에 반복해서 그리고 외출할 일이 생기면 작은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그렸다. 한번 씩 그려본 후 틀린 부분은 빨간 펜으로 고쳐서 눈에 띄도록 했다. 말하자면 반복해서 자가시험을 보고 채점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수강생 중 한 분이 <의학신경해부학> 책의 앞부분을 뜯어내서 수업 중에 가져온 일이 있었는데 박사님께서 그걸 보고 “이렇게 책을 찢어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여유 있으시면 한 권 더 사서 이렇게 찢어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보세요.” 하셨다. 8만원이나 하는 비싼 책이지만 이번 학기 수업을 좀더 충실히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한권을 더 구입하고 책을 장별로 분철했다. 이해가 잘 안되거나 관심이 가는 간뇌, 변연계 부분은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보고 특히 3장 뇌의 외형 부분은 닳도록 보았다. 어떤 뇌 부위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공간적인 배치나 모양을 떠올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텍스트를 읽는 것이 진도가 너무 더디게 나갈 뿐 아니라 뇌 구조를 공부하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시상, 기저핵, 해마, 편도체 등 각 뇌구조간의 위치관계가 파악되지 않아서 너무나 답답했고 내 머릿속을 쪼개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계속 고민하는 한편 신경과학 교과서와 관련 교재를 몇 권 더 사서 참조했다. 하나씩 하나씩 궁금증을 해결해나가고 뇌의 각 부위와 나의 생각, 운동이 기능적으로 어떻게 관련되는지 알아가면서 큰 재미를 느꼈다.


법학 공부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을 다뤄야하는데다, 아직 사회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문제가 왜 중요한지 몸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으로 골치썩어 보지 않은 대학 초년생이 민법과 민사소송법, 형법과 형사소송법에 어찌 처음부터 흥미를 느낄 것이며, 어음을 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어음수수의 법률관계를 따질 것인가. 해당 법률조항이 문제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 자체에 노력이 든다. 비유하자면 단맛을 느끼기 위해 나무토막 씹는 과정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할까.


그에 비하면 뇌과학 공부는, 뇌의 구조는 생긴 그대로 파악하여 외우면 되고 , 잠자고 깨어나고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누구나 자신의 생활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무에 올라가는 노력만 하면 주렁주렁 열린 과일을 따먹을 수 있다. 아이의 뇌 발달단계를 이해하고, 감정변화와 꿈과 수면에 대해 이해하며, 시각의 불완전성에 놀라고, 인간의 뇌의 특성에 따른 효율적인 학습방법을 알게 되는 등, 내가 단 4개월 동안 뇌과학을 공부하며 맛본 과즙의 다양한 맛은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4. 천문우주+뇌과학 모임에서의 발표


뇌과학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대전 온지당에서 천문우주+뇌과학 모임에서의 ‘뇌 구조와 기능’ 발표로 이어졌다. 뇌과학 공부에 올인하고 있으니 주제를 하나 맡아서 발표해보라고 박문호 박사님께서 독려해 주셨다.


세 번을 발표했는데 11월 모임에서는 시상하부, 12월에는 도파민과 세로토닌, 1월에는 글루탐산과 GABA를 맡아서 발표했다. 발표준비과정에서 신경전달물질과 수용체가 우리의 자아형성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깨달았고,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중독에 관련된 약물의 작용기전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그 외에도 파워포인트 다루는 것이 늘었고, 강의하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어 말하고 듣고 전달하는 것과 관련된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20분간의 짧은 발표지만 정확한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관련 분야의 교과서들을 구입하고 참조했는데, 내가 신경심리학, 인지심리학, 해부학, 생리학, 그리고 부분적이나마 생화학과 약리학 분야의 교과서들을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신기하고 즐거웠다.

일단 전문적인 교과서를 접하기 시작하자 뇌과학, 심리학, 생물학과 관련된 일반적인 2-300 페이지 짜리 단행본은 ‘읽어제끼는 느낌’으로 읽어내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꼭 읽으려고 구입해 놓고 아직 손대지 못한 책들은 일단책장의 아래칸에 꽂아 놓고 다 읽으면 맨 위칸으로 올려 정리하는데 요즘 맨 위칸의 책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2.

 

1.나의 생각, 감정, 욕구- 그 모든 것을 담은 분자, 단백질


나는 고민한다. 그리고 누구나 고민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가?’

<시냅스와 자아>를 쓴 세계적으로 저명한 뇌과학자 조지프 르두의 표현을 빌리면,

“퍼스낼러티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당신의 자아, 즉 ‘당신임’의 본질은 당신의 뇌 안에 들어 있는 뉴런들 사이의 상호연결 패턴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냅스라 부르는 뉴런과 뉴런 사이의 접합부는 뇌에서 정보의 흐름과 저장이 일어나는 주 통로다. 뇌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뉴런들 사이의 시냅스전달과, 과거에 시냅스들을 거쳐 간 암호화된 정보의 소환을 통해 수행된다. 뇌기능에서 시냅스전달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자아는 곧 시냅스다’라는 말은 사실상 자명한 이치다.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박문호 박사님의 ‘그것밖에 없다’로 풀면 ‘신경세포와 시냅스, 그것밖에 없다’ 가 된다.


데카르트 식으로 표현한다면

“ 나의 시냅스막에 단백질 분자가 박혀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말할 수 있을까.


2. 박문호 박사님의 ‘특별한 뇌과학 강연’ 시작


박문호 박사님의 4회에 걸친 뇌과학 강연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자아와 퍼스낼러티의 뇌 메커니즘에 대해 우리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우리의 자아를 이루는 기억들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될까? 의식이란 무엇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속 시원하게 풀어보지 못한 뇌과학의 중요 주제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지난 주 토요일(1월 23일), 드디어 뇌과학 강연이 시작되는 날이구나 하고 아침부터 설레었다. 남편과 아이들 점심 차려주고, 혹시나 같이 따라나선다고 떼쓰진 않을까 하여 카스테라와 딸기요구르트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들을 상 위에 풀어놓고선 나는 지하철 역으로 뛰었다.


서둘렀건만 벌써 강의시작 10분전. 강의실 열기는 대단했다. 벌써 많은 분들이 자리잡고 앉아서 기대에 찬 얼굴로 강의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머리가 하얀 어르신들, 수녀님도 스님도 오셔서 함께 강의듣는 자리, 화학전공자부터 법학전공자까지 청중의 출신도 다양하다.

대구, 강릉, 부산 등 멀리서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오신 분들도 있었다. 강의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맨 뒷자리까지 꽉 메워지고 조금 더 늦게 오신 분들은 앞쪽 통로에 의자를 갖다놓고 강의를 듣는 풍경이 벌어졌다. 삼성전자 김태한 부사장님은 강의 내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고 적극적인 자세로 들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강의의 첫 슬라이드는 ACGT(DNA를 구성하는 네가지의 염기) 문자들로 꽉 채워진 화면으로 시작되었다. 박사님이 질문을 던지신다. “이 문자들과 생명의 현상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보통은 DNA에서 시작해서 단백질의 형성과정 순서로 풀어가는데 박사님은 단백질에서부터 아미노산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미노산의 기본구조를 밝히고 그 변형을 통해 우리 뇌의 주요 신경전달물질이 화학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까지 쭉 풀어내는 색다른 방법으로 강의를 하셨다.


유전자란 무엇인가. (이것은 정의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유전자란 하나의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DNA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연결이므로 단백질을 만든다는 것은 아미노산을 지정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인간의 유전자는 대략 2만 5천개인데 벼의 유전자는 5만개에 이른다고 한다. 한해살이 식물인 벼보다 인간의 유전자 개수가 훨씬 적은데도 왜 벼는 달에 못 가고 인간은 달에 갈 정도의 발전을 이루었는가, 그 비밀은 무엇인가. 인간 유전자에서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부분은 1.5%밖에 되지 않으며 7-80%를 차지하는 인트론과 20%정도의 전사조절인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점이 최근 게노믹스에서 초미의 관심사이다.

인간의 단백질은 multifunctional 하고 팀웍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인간의 경우 어떤 단백질이 언제, 어디서 발현되는가를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핵심이구나! )


박문호 박사님께서는 브레인 공부를 위해서는 게노믹스(유전체학)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


왜?
왜 브레인 공부를 하는데 유전체학을 공부해야하지?


-브레인의 활동은 신경세포들 사이의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경세포들 간에 교류가 이루어지는 곳은?

그야 신경세포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겠지.


-신경세포들끼리는 세포막을 길게 뻗어 서로 만나지만 딱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신경세포간의 아주 좁은 틈이 바로 시냅스!


-그 틈은 누가 연결해주지?

-신경전달물질!


시냅스전 신경세포가 흥분하면 그 흥분은 축색을 따라 전달되고 축색돌기 말단에서는 신경전달물질 이 분비된다. 아드레날린, 노르아드레날린, 도파민, 세로토닌, 글루탐산, 가바 등이 이런 물질들이다.

-분비된 신경전달물질은 시냅스를 건너 다른 신경세포(시냅스후 신경세포)의 세포막으로 전달된다.


-시냅스후 신경세포의 세포막에는 무엇이 있지?

이온채널들이 있다. 이온채널은 세포막에 무수히 많이 심어져 있는 단백질분자이다.


신경전달물질이 이온채널에 결합하면 이온채널의 단백질 구조가 변화하면서 세포주위의 양이온이나 음이온들을 통과시키게 되고 결과적으로 다음 신경세포의 흥분시키거나 흥분을 억제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경전달물질과 이온채널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네!


-그렇지!

그런데 신경전달물질도 단백질, 이온채널도 단백질.


-단백질은 아미노산들이 모여 엮인 것이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DNA이고.

-아미노산의 구조를 아는 것은 우리의 의식, 감정, 욕구가 태어난 기원을 추적해가는 일이야.

빅뱅에서 태어난 원자들이 내 생각과 감정 속으로 들어와 안에서 춤추며 뛰노는 것을 느껴봐!


3. 공부방법론

-반복과 암기를 두려워 말자!


고백컨대, 나도 예전에는 암기의 중요성을 무시했던 사람이었다.

사법시험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두문자로 외우는 것 (앞글자 하나씩만 따서 주문처럼 외우는 것) 따위 ‘유치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해하면 되잖아! 일단 이해하고 그 흐름에 따라서 머리에서 빼내면 더 완벽한 거잖아.


아마도 나는 은연중에 이해하는 과목과 암기과목이라는 것을 나누고 암기과목이라고 하면 한 단계 낮은 차원의 공부라고 여겼던 듯 하다. 다른 과 친구들이 “법학은 통째로 암기하는 거지? 힘들겠다.” 하면 “ 아니, 그렇지 않아. 먼저 내용을 이해해야하지.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암기할 수 있겠어.”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공부 요령에 약한 편이었다. 어쩌면 그런 점이 나의 고시준비기간을 연장시키는데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몇 년씩 어린데도 공부를 참 잘하는 후배들을 보고 어느 날 깨달은 것은, 그들은 암기사항을 절대 미루지 않으며, 특히나 핵심개념, 정의는 반드시 외운다는 점이었다.


어떤 개념에 대해 ‘그건 대충 이렇고 이런 것..’ 하는 식으로 느낌만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명확한 용어로 된 정의를 담아두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고과정은 명쾌했다. 기존에 알고 있는 사실관계 뿐 아니라 새로운 사례의 사실관계에 적용해서 결론을 이끌어낼 때도 논리성을 잃지 않았다.


그 후로는 두문자를 따든 의미를 새기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틀을 외우고 핵심개념을 외웠다. 책 목차를 복사해서 책상 앞에 붙여두고 전체 틀을 의식하며 책을 읽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씹어 삼켜 보겠다는 자세로 공부하는 것의 장점은 확실했다. 앞 내용을 암기하고 있으니 뒤쪽에 나오는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비교, 분석이 되었고, 내가 책의 여기저기서 이해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실은 한 가지 문제의 여러 가지 표현이고 분야별로 조금씩 달리 변형되어 표현된 동일주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럴 때 그 과목에 자신감이 확 붙으면서 공부의 묘미를 느꼈다.


어떤 목표를 향해 가면서 똑같은 에너지를 투입한다고 할 때, 요령과 접근방법을 아는 것은 자신이 투입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어떤 강의를 들을 때 훌륭한 선생님의 강의일수록 내용보다도 공부방법이나 접근방식에 대한 얘기에 더 귀를 쫑긋 세우는 버릇이 생겼다. 수업진행중 잠깐 집중을 풀어주면서 여담처럼 이런 얘기를 흘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 잘 듣고 노트 한 쪽에 빨간 펜으로 적어두고 동그라미 쳐 둔다.


어떻게 하면 잘 외울 수 있을까?


일단 마음을 열어야한다. 친한 친구를 맞아들이듯이. 그게 무슨 암기요령이냐고 콧방귀 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경험상으로는 그렇다. ‘이걸 정말 외어야 할까?’ ‘외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치워버리는 것에서부터 암기는 시작된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숙제는?

아미노산의 염기배열을 한 눈에 보여주는 코돈표의 암기!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책장에만 꽂혀있던 분자생물학 책을 펴들었다.


다음은 반복이다.
반복은 이해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암기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당장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도저히 내가 이걸 피할 수는 없는 문제구나 라고 인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의 경우 작년에 137억년 우주의 진화 강의에서 유전자 전사와 번역에 관해 안면만 익힌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좀 더 친해져보자고 한 번씩 쿡 쿡 찔러보고 있는 중이다. 올해는 반드시 단백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옆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복해야지!


당장 읽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새로 공략하려는 분야의 책을 미리 사서 책꽂이에 꽂아 놓고 보는 것도 박사님께 추천하시는 방법인데, 요즘 시도하고 있다. 제대로 읽기 전 단계에서라도 가끔 그 책과 관련된 내용을 접할 때면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읽어본다든가 책 목차를 훑어본다든가 주르륵 넘겨보면서 그림이나 표를 눈에 바른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살짝 맛을 본 다음 다시 책장에 꽂아둔다. 조금씩 그 책과 친해두면 나중에 본격적으로 사귈 때 무리가 없다.


4.함께 나누고 싶은 즐거움, 백북스


한 동안 백북스 홈페이지를 들여다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쉬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몰랐을까.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안타까워하며 괜히 혼자 동동거렸다. 이제부터야, 이제부터야 하고 되뇌이면서도 멋진 강연들과 모임들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후훗, 이제야 백북스를 만난 회원분들도 백북스를 알아 갈수록 나 같은 심정이 될지도 모른다.


백북스를 만나고 강의를 듣고 공부하며 내가 느낀 것을 한마디로 비유하자면, 달리기 연습한답시고 혼자 뛰고 시행착오도 거치고 하다가 이제는 전문코치를 만나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기록이 날로 향상되어가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몇 년에 걸쳐 단련된 수준급의 동료선수들을 만나니 그들에게서 배우는 기량이 상당하다. 언젠가 나도 마라톤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뇌를 공부하는 것은 나에 대한 관심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며, 세상과 의미있는 소통을 하기 위한 언어를 배우는 것! 배우고 느끼며 바라보는 세상은, 닫혀 있던 창문을 열고 비온 후 맑게 갠 풍경을 보는 듯 새롭고 신선하다.


열정적인 강연을 해 주시는 박문호 박사님과 뒤에서 손발이 되어 큰 도움 주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더 많은 백북스 분들과 강연장에서 만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