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뇌 발표 69차 후기 - 나는 왜 공부하는가?


1. 신체 언어, 과학을 만나다.


  가끔 가슴이 뻐근하고 뭉클합니다. 이것은 감동을 받았을 때 눈시울이 시큰하고 머릿속이 말갛게 되는 증상과 비슷합니다만 가슴 한 가운데서 불쑥 생겨난 뭉클한 기운이 목 위쪽으로 퍼지는 이 알싸한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할지. 이것은 말이 되어 나오고 싶어하는  감정이 몸에 머물고 있는 상황으로 아직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하고 혀뿌리를 간질이며 적절한 언어로 표현되기를 기다리는 신체 언어의 상태입니다.

 

 시를 읽거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접했을 때가 그러한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봄이 되면 봄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경우가 잦아집니다. 나무에 새순이 올라올 때, 만개한 벚꽃이 살랑거리는 바람에 하늘하늘 떨어질 때, 차마 타이어로 뭉개고 지나갈 수가 없어서 차에서 내려 신발을 벗고 누운 꽃잎들을 사뿐히 즈려 밟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밤중 퇴근길 저만의 에피소드입니다. 그런데 박자세를 만나고 서호주 탐사를 다녀온 뒤로는 시도 때도 없이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집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보거나 서호주의 낮은 구릉을 떠올리다가 심지어는 꿈을 꾸고 깨어서도 아득한 그리움과 함께 그러합니다. 



2. 수련생, 진검을 받다.


  몇 번의 천문 우주 뇌과학 발표를 지켜보면서 천뇌 시간은 그간 공부한 분야의 핵심 개념을 선정해 주면 깡그리 외워서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발표의 주제는 생화학 분자식 6개 (ATP, NADH, Q, Cyt b, O2-->H2O, KoK's model), 광합성과 미토콘드리아의 전자전달계, TCA 회로입니다. 제가 맡은 부분은 분자식입니다. 김현미 선생님께 발표 부분에 대한 단계별 도움말을 들으니 분자식은 생화학 공부의 정수라 했던 강의 중의 말이 떠올라 제 처지를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나옵니다.


  아니 어쩌자고 나 같은 초짜한테 진검을 쥐어주나. 그것도 동네 대장간 벽에 걸린 부엌칼이 아니라 날 선 보검을. 검의 사용법은 물론이요 손잡이와 칼날도 구별하지 못하는 생판 초보에게 주어진 분자식을 어쩌란 말이냐.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검의 주인이 되려면 일단 두려움 없이 손에 잡고나 봐야 합니다. 우스꽝스런 칼춤을 추게 되거나 자칫 손을 베어 앗 뜨거 하더라도 수련의 과정이라 생각기로 합니다.


  발표 준비의 순서는 동영상을 복습하며 강의 중 필기한 공책에 박사님의 설명을 녹취하듯 다시 적기, 그걸 되풀이해 쓰고 중얼거려 암기하기, 시간이 되면 권해준 다른 책도 찾아서 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복습 과정만으로도 벅차서 다른 책은 찾아볼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가장 복잡해 보이는 콕스 모델부터 시작합니다. 망간이 빛을 이용해서 전자를 빼내어 산소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신기합니다. 다음은 산소분자가 전자와 양성자를 받아들이며 물이 생성되는 과정인데 노화의 주범이 되는 활성산소가 생기는 원리와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알 게 되었습니다. 시토크롬 b(Cyt b)는 벌집 모양의 아름다운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어서 금세 따라 그릴 수 있습니다. NADH는 한 눈에 들어오질 않게 복잡했는데 반복해서 그리고 훈련할수록 처음 보았을 때처럼 복잡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ATP의 간단한 분자식은 얼른 외우고, 퀴논(Q) 분자식만 3개가 남았는데 간단해 보이는 이 그림을 이해하고서 그리려니 쉽지 않습니다. 표면상으론 전자와 양성자를 하나씩 주고받았을 뿐인데 분자들이 서로 자리를  바꾸고 전자가 어는 자리에 앉아 누구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물질의 성분이 달라집니다. 결국 발표 시간 보충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각 분자식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퍼즐의 조각 몇 개를 얻었습니다. 아직은 큰 그림 전체를 볼  안목이 없지만 이걸 바탕으로 점차 더 알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3. 고수들과 향연을 누리다.


  내가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아이에게 콕스 모델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재미를 붙인 아이가 금세 따라 그리고 외우더니 질문 보따리를 쏟아 냅니다.


“ 왜 전자와 양성자는 붙어 다니지? 왜 전자가 가만히 안 있고 이중결합을 하지? 빛은 왜 들어가지? 광자가 들어가면 전자와 양성자가 나오는거야? 근데 얘네들은 왜 자꾸 나와? ”   

 

 콕스모델의 대략적 설명만 겨우 할 수 있는 저는 결국 대답이 궁색해집니다.


“기다려봐, 고수를 모셔 오마.”


  아이디마저 멘토인 박종환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아이는 과학이 재미있다고 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자세하지만 명쾌합니다. 작은 교실에서 하던 설명이 저녁 식사시간의 식당에서도 이어집니다.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오늘 발표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우리 테이블도 메생이국과 보쌈 된장국을 먹으면서 다음 탐사지인 실크로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봤어도 인정할 향연의 고수들이 틀림없습니다. 


  기계적으로 반복 훈련해서 발표했지만 ‘이것들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스스로 대답할 수가 없어서 답답합니다. 내 손에 익혀진 이 분자식들이 궁금해지니 아무래도 강의 동영상을 다시 보고 분자 생물학 교과서를 읽게 되겠지요.   



4. 나이 마흔, 미토콘드리아를 생각할 때


  몇 년 사이 나이 마흔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공부의 긴 역사로 보면 그닥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인데 우리 사회에서 특히 담론화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중년이 가지는 독특한 위상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릴 적엔 자발적 공부의 조건이 형성되기 어려워 입시와 취업 공부에 매달리느라 공부의 즐거움을 모르고 지냅니다. 30대가 되면 직무와 관련된 재교육을 위주로 공부하고 50대나 60대 이후로는 역시 은퇴를 준비하고 노후의 인생 설계와 관련한 창업이나 각종 취미 활동에 힘을 쏟게 됩니다. 나이 마흔의 공부는 이들에 비해 어정쩡합니다. 시험이나 취업, 창업 준비만큼 절절하지도 않고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경륜을 쌓아 안정된 위치입니다. 물적 심적으로 안정되어 인생의 정점인 불혹. 그러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불혹은 세상과 불통하게 되고, 잘못된 변화를 넘보는 불혹은 잡다한 유혹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생 정점이 가장 위태롭고 불안한 시기입니다.


  10대인 아이의 지독하게 화려한 사춘기를 지켜보며, 저는 아예  마흔의 제 삶에 균열을 내고 변방에 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고 그간 동경하며 바라보던 것들에서 마음을 비울 수 있게 되자 둥근 지구에서 내가 선 어디든지 중심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그리고 돈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공부를 주로 기웃거렸습니다. 처음엔 인문학이었고 그 다음엔 자연과학, 바로 박자세와의 만남입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길래 희노애락의 굴레에서 헤매이는지, 이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어떻게 수용하고 반응해야할지, 고통에서 벗어나 의연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 보기 위해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인간을 관찰하는 연습을 합니다. 거리두기를 하자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자연이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중년은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분자식을 공부하다 문득 드는 생각은 전자의 이동으로 물질들이 이렇게 변한다면 물질적 실존이란 게 과연 있나 의심이 됩니다. 정신이나 자아, 사랑이나 행복 같은 말처럼 실체는 없지만 잠시 느낄 수 있는 상태일 뿐 고정된 상이 잡히질 않습니다. 강의 중 물질의 측면에서 보면 죽음이란 분자구조의 변동에 불과하다고 했던 신선한 충격이 연상됩니다.


  미토콘드리아에 관한 글을 읽다가 “아, 세상에~”를 외칩니다. 미토콘드리아가 자신과 결합한 세포들이 시원찮으면 다른 튼튼한 세포와 결합을 유도하는데 이는 섹스의 기원이며, 다세포로 증식하는 과정에서 불량 세포들을 솎아내는 세포사를 유도하다가 나중엔 생식세포를 분리해서 불멸성을 양도하고 지금의 복잡한 신체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죽음과 성은 같은 맥락이라니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함의하는지 두고두고 곱씹어보기 위해서 어떤 과정으로 그리 되었는지 내 눈으로 익히고 내 손으로 그려가며 온전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수도승이 정진하듯.



5. Fe, 철의 노래


  안방 입구에 따로 마련한 책장에는 오가는 나의 뒷덜미를 잡아 당기는 박자세의 필독서들이 있습니다. 욕실 유리컵 안에는 이를 닦을 때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붉은 조각돌이 있습니다. 운동화 밑바닥의 패인 골에 끼인 채로 서호주 마블바를 나와 같이 거닐고 비행기에 함께 타서 태평양을 건너고 수원 우리집 욕실까지 따라온 철(Fe)입니다. 기특하고 고마운 이 녀석을 위해 철의 분자식 5개를 알고 불러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Fe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면 그 작은 돌맹이가 33억년 전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겁니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박자세에 가서 우주를 설명하는 유니버셜 랭기지인 원소 기호와 분자식들을 큰소리로 따라 읽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추임새마저 가능한 귀명창이 되어 나를 따라온 오래된 철(Fe)이 들려주는 슈퍼노바의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