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경 선생의 '삶에 지름길이 있나'라는 글을 보고 두서없는 글을 씁니다.

물론 삶의 지름길이라는 말은 허투루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좌고우면하지 않으며 진리의 길을 뚜벅뚜벅가는 힘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최근 이래저래 일요일에 시간내기가 어려워진 탓도 있지만

평일에도 공부에 몰입하는 물리적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부족하더군요.

또한 현장에 참여하지 않고 동영상으로 1회분의 4시간 강의를 온전히 듣는 것은 10시간도 훨씬 더 넘게 걸리고

그 공부의 질도 성기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일상에서 짧은 틈이라도 공부에 몰입하는 힘을 키우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여전히 삶은, 생활은, 사람들은, 거기에 요동하는 마음은 내 멱살을 잡고 이리 저리 끌고 다니려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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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가을 유난히 단풍이 처연하게 아름다운데

간밤의 비로 일단락되는 것 같아 오히려 반갑습니다.

감상은 즐기되 여운이 없어야 좋은 거니까요.

단풍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처럼 쾌감을 주는 순간들은 지극히 짧은데

우리는 왜 거기에 끌려다닐까요.

 

서양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에 대해

시인 김수영이 쓴 산문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 말이 유럽 문명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관념의 기원은 적어도 고대 이집트에까지 소급되고 있는 것 같다. 이집트에서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 미라나 사람의 해골을 갖다 놓는 습관이 있었다. 손님들이 그것을 구경하고 있으면 주인은 <죽음을 잊지 말라>라는 주지(主旨)의 인사말을 한다. --(중략)-- 로마의 장군들은 개선을 해가지고 행진해 들어올 때면, 자기의 전차에 노예를 하나 태워가지고 들어왔다. 영광에 싸인 장군의 귓전에서, 노예는 끊임없이 이런 말을 속삭인다. -<뒤를 도돌아다보아라. 그대가 단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제정 러시아에서는 대관식 때에 여러 종류의 대리석을 날라 들여오는 관례가 있었다. 새 황제는 즉위하는 날 신중하게 자기의 묘석을 고르는 것이다. --(중략)-- 테렌티우스의 희극에 나오는, 뼈를 넣는 고항(古缸)에는 그 후에 니체가 즐겨 쓴 그 소름이 끼치는 명(銘)-<인간에 관한 어떠한 일도 나에게는 무연(無緣)치 않으니라>-이 새겨져 있었다. 햄릿은 엘시노아의 무덤 앞에서, 그 전날에 쾌활한 익살을 부리던 어릿광대인 요리크의 두개골을 바라보면서 외친다. <어서 부인네들의 방에 가서 일러주고 와. 부지런히 1인치나 되도록 처바르고 싶겠지만, 머지않아 이런 얼굴이 되는 거라구.>'

                           - 김수영 전집 pp. 419-420. 민음. 

 

김수영 시인 또한 우연한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긴 했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죽음이라는 자명한 진실 앞에 눈을 돌리지 않고 직시하는 힘이 있는 자 만이 진짜 빛나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그 누구도 '인간에 관한 어떤 일도 무연한' 자는 없으니까요.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무감하게 태연한 것도 바보요, 방정맞게 덜덜 떨고 있는 것 또한 천치나 하는 짓이겠지요. 죽음(타나토스)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쾌락(에로스)에 이끌리거나, 죽음을 알지 못해 지표없이 흔들리는 삶이나 그게 그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왜 자연과학공부인가를 다시 논하는 것은 생략합니다.

 

박사님 말마따나 매순간 곧바로 공부에 진입하는 힘, 그냥 공부하는 힘이 삶의 지름길, 지혜라는 생각합니다.

이는 선가의 어떤 화두들과도 비슷하기도 하네요.

 

어찌됐든,

메멘토 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