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일 독일 로텐부르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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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온지 이틀이 지났다. 2시간을 날아 베이징까지 와서 3시간을 쉬고 다시 10시간을 들여 독일의 프랑크푸르트까지 이르는 15시간의 여정이었다. 오기 전날 아침까지도 어떻게 돈을 덜 들여서 취소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 여행이었다. 피하고 싶은 전지훈련을 앞둔 선수 와 같은 기분이었다. 16년을 입시와 함께 해 온 후유증 중에 하나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점수를 매긴다는 것. 특히나 새로운 일에 맞닥뜨리는 경우는 더 그렇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습관 중 하나다. 

 

마치 정복해야할 새로운 산을 오르는 기분으로 유럽 관련 다큐와 영화를 보고 책을 40여권을 빌리고 사다 놓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종용하고 자신을 닦달했다. 나중에 보니 아이들이 읽기 어려운 자료도 있었고 19금의 내용이라 접근방법이 달라야 하는 것도 좀 있었다.  매번 여행과 휴가마다 이렇진 않았고  스스로 정한 16년만의 안식년에서 처음 행하는 큰 일이라 그럴거다. 개인의 역사에서는 나름 기념비적인 일이니까.

 

안타까운 것은 내가 로빈슨크루소가 아니므로 주변의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기 마련인데 안식년 결정으로 인해 학생들과 수업을 쉬고 그들의 학업 전선에 변화를 주었고 (고등학생에게 학업은 전쟁의 느낌처럼 처연하고 때론 비장하다) 특히나 우리 가족들의 경우는 더 그렇다. 늦은 밤 일하는 엄마 덕에 음식은 대강 먹고 오늘만 수습하며 사는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엄마의 사사건건 밀착형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유럽을 한 달 동안 자동차로 운전하며 돌아다닐 계획이다.  자동차 유목민이 되어 24시간 붙어있고 서로가 내는 소리를 모두 들으며 좁은 공간에 함께 하면서 때마다 감지되는 서로의 기분을 공유해야 한다. 침실도 한 개만 얻을거니 자면서 이갈고 코골고 기침하며 뒤척이는 것도 원하거나 말거나 감내해야 하고.

 

 

이곳은 공항이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2시간 남짓 달려서 도착한 중세의 작은 마을 로텐부르크다. 인구 15만의 작은 도시인데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연간 100만명이  방문한다.  중세 시대 소영주가 다스리는 장원 형식의 자급자족 마을의 전형을 간직하고 있는데  아파트나 현대식 건물이 한 채도 보이질 않는 걸 보니 중세의 보석이라 부를만하다. 유럽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연상되는 3층이나 4층의 뾰족한 지붕과 네모난 창마다 꽃을 늘어드린 발코니. 돌로 만들어진 도로는 차가 다니면 우르릉구르릉 소리를 내고 사람들이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에도 몸을 구루면서 반응할 것만 같은 골목길은 마을이 세워진 1300년경의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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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거리의 오래된 건축물을 지키며 사는 그들을 보니 안동의 하회마을이 떠올랐다. 겉으로 보이는 풍광이야 딴판의 동네이지만 변화 분분한 가운데서도 고집스레 옛집을 지키는 사람들. 하회마을에서는 기와의 이끼 냄새를 맡으며 돌담을 끼고 흙길을 걷다 보면 마을 중간에 떡 하고 서있는 당산나무를 만나게 된다. 수령 500년의 팽나무는 수렴청정을 하는 구중궁궐의 중전마마가 온갖 치장을 하고 대전에 나설 때처럼 위엄을 지닌 마을의 안주인이었다. 색색의 천들을 댕기처럼 늘어뜨리고 당줄로 몸 주변을 둘러서 범인들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신령스런 나무.  로텐부르크는 교회와 성곽 주변에 마을의 역사를 함께한 늙은 나무들이 파수병처럼 서있다.  

 

오래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비바람을 견디어낸 낡은 기둥과 지붕은 사람들과 함께 한 세월만큼 정감 있고, 그런 집이 늘어선 골목을 걷다보면 낯선 이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 주는 다정하고 소박한 동네 사람들을 만날 것만 같다. 물이 마을을 감싸고 도는 물도리동 하회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곳 로텐부르그 마을은 외적의 방비를 위해 돌로 쌓은 성곽으로 마을을 둘러 안았다.  낡고 오래된 집을 아끼며 자신들 삶의 방식을 지켜 내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오래된 마을이 서로 닮아있다.

 

아끼는 물건을 넣어둔 서랍을 열 때의 기대감을 가지고 아침부터 마을 구석구석을 산책했다.  때마침 송이눈은 적당히 흩날리고 바람도 그닥 불지 않아 공기가 차고 맑다. 마을 광장과 성문을 지나 외곽까지 걸었는데 마치 어릴 적 읽은 서양의 동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곳에선 삶이 오래되어 나이가 든 사람들도 아이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노인 특유의 고집스러움이나 자긍심은 보이지만 신고의 삶을 살아온 가난한 촌로들의 게슴츠레하고 충혈된 눈빛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가 잠시 머무는 여행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약간의 혼란과 의문을 품게 된다. 이곳 노인들이 낡은 사람 취급받지 않고 오래된 집처럼 편안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 받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볼 일이다. 

 

 

하회마을이 신화의 고장이라면 로텐부르크는 동화의 마을이다. 아이들은 이곳의 눈이 한국의 눈보다 잘 뭉쳐져서 좋다고 한다. 딸아이는 뭉친 눈을 한 입 베어 먹으며 이 마을에서 파는 슈네발(스노우 볼이라 부르는 공 모양의 밀가루 튀김과자) 같다고 좋아 한다. 작은 아이도 감기를 아랑곳 않고 눈 속에서 맨 손으로 오래 버티기 놀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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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머문 숙소는 짐머라 부르는 가정집을 이용한 민박인데 우리가 머문 집은 16세기에 지어졌다. 70대의 주인 할아버지가 갓 구운 빵에 우유, 삶은 달걀과 홍차로 소박한 아침상을 직접 내오는데 주인만큼 나이든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따라와 우리 가족에게 몸을 비빈다. 고양이의 가르릉 소리를 들으니 어릴 적 우리 동네 할머니, 아줌마들이 한 방에 모여 뜨개질하던 풍경이 떠올라 마음이 탁 풀린다. 이곳을 떠나는 날 아침에도 자취눈이 돌길에 내리고 골목에는 눈을 쓸러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짐작건대 500년 동안 이어온 풍경일거다. 남편과 아이들은 아침을 먹다말고 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주억대며 다정한 눈길로 창밖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