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산 사이에 소리 한 점 들어설 자리도 없이 눈이 가득히 내린다. 길을 걸으면 오도독 뽀도독 눈 밟는 소리가 들어난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바람이 전기 줄을 당기면 윙윙윙 소리에 세상이 움추리고 있다.

 

눈이 내리고 아무도 밟지 않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내 발자국 보려고 새벽에 일어났다. 발자국에 눈이 부서질까 조심스레 걸었다. 운동장 한 가운데쯤 와서 길게 나 있는 내 발자국 보려고 돌아 보았다. 언제 쫓아 왔는지 반근이 녀석이 빙글 빙글 돌면서 자기 발자국을 잔뜩 남겨 놓고 있다. 내 발이 두 개고 반근이 발은 네 개니 내가 이길 수가 없다. 내리는 눈에 신이 난 반근이는 펄쩍 펄쩍 뛰고 있다.  빙글 빙글 돌아서 사방이 반근이 발자국이다. 운동장에 내 발자국을 상상하며 일찍 일어 났는데 이미 판은 엎어진 뒤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눈을 뭉쳐 던졌더니 자기랑 놀아주는지 알고 반근이 녀석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아무리 맞추려고 해도 소록 소록 내리는 눈이 좋아서 뛰는 녀석을 맞출 수가 없다. 약이 오를 때로 올라서 잡으려고 뛰어가니 반근이는 후다닥 달아난다. 어느새 학교 운동장에 나 혼자 눈 맞고 있다. 눈이 한 쪽으로 휙 쓸리는가 싶더니 플라타너스가 후르르 떤다. 탱자나무 담벽이 수우웅 소리를 내고 있다. 멀리 커다란 팽나무가 하늘에 내리는 눈을 잔뜩 맞고 있다. 유리창 덜컹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급히 돌렸다. 다행스레 아무도 없는데 머리만 하얀 학교 지붕이 살짝 무섭다. 집에 들어가야 겠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반근이는 아궁이 옆 멍석으로 만든 개집에 자기 어미 품에 들어가 있다. 어리디 어린 녀석이 아침 내 아취를 뭉길 대로 뭉게 놓고는 천연덕 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낑낑거린다. 야 이 새끼야. 소리를 냈다가 부엌이 통채로 울려서 내가 더 놀랬다. 

 

아궁이에 열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어머니가 새벽에 불을 지폈나 보다. 가만히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니 붉은 숯 사이로 불씨가 작은 혀를 낼름거린다.  사그라 드는 불을 불쏘시기로 뒤적거리니 불이 오른다. 하얀 재가 살짝 일어나 개집으로 날아갔다. 반근이 녀석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먼지를 털어주었다. 좋아하기는 하면서 마지막에 꿀밤을 먹였다. 깽하는 소리가 괜히 기분이 좋다.


 혹시나 썰매를 탈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가 강을 향하였다. 강은 언제 흘렀냐는 듯이 하얀 평지가 되어 있다. 돌맹이를 들어서 던졌더니 쩌정 쩌정 소리가 난다. 조심스레 강둑을 내려가서 발로 얼음판을 굴러본다. 살짝 살짝 걸어서 강을 건너 보았다나뭇가지 하나를 주어서 얼음판을 두들겨 본다.  찌직 소리가 나더니 얼음판에 금이 간다. 암만해도 오늘 썰매 탔다가는 골로 갈 것 같다. 조금 더 얼음이 익어야 할 것 같다.


겉옷을 얇게 입고 나와서 너무 춥다. 집에 가야겠다. 언제 그리 눈이 쌓였는지 뚝방 밑 길이 미끌거린다. 뒤뚱거리다 한 번 넘어져서 손을 땅에 짚었다. 속으로 이러다 또 손 트면 야단 맞을 것 같아서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뛰어갔다. 


 손을 호호 불며 부엌 문을 열었다. 반근이 녀석이 제 어미 품속에서 자고 있다가 문여는 소리에 눈을 개슴뜨레 뜬다. 나를 아는척 하는가 싶더니 어미 품으로 머리를 파고든다. 괜시리 서운하다. 꿀밤을 너무 쌔게 때렸나 생각이 든다.  나도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고 엄마 옆에 누웠다.  

.

.

.

.

.

.

.

.

.

.

.

.

.

. 

일요일 아침인데 일찍도 일어 났다. 어제 과음을 해서 그런지 새벽 겨울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하늘을 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 빌딩과 빌딩 사이에 눈이 내린다. 빌딩 그림자에 뭉개져 내리는 눈이 잿빛이다. 제법 일찍 일어났는데도 길은 온갖 발자국이 난무하다. 일요일 새벽에 나가는 사람이 왜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도시에는 돌멩이 던질 강도 없으니 내 맘에나 돌을 던져 본다.

 

집 밖에 나와 내리는 눈을 보는데 반근이 녀석이 생각이 났다. 태어날 때 몸무게가 반 근도 안 될 것 같았다.   반근도 안되것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걸 옆에서 동생이 듣고는 반근이 이름 좋구만 그랬다. 내 한마디 말로 한 줌이나 될것 같이 작은 강아지는 평생 반근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시골 학교에 부임하고 몇 년이 지나 우리집 막둥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반근이도 태어 났다. 반근이가 크게 되고 목소리가 낑낑에서 컹컹으로 바뀔 때였을 꺼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전근으로 면소재지 시골 사택에서 읍내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급히 이사하느라 반근이는 못 데리고 왔다. 이사짐 트럭에 누군가 태웠겠지 했다가 반근이만 남겨졌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사를 하고 두 달쯤 지났을까. 시골 분교 근처에 살던 어른 몇 명이 읍내에 우리 집으로 인사를 오셨다. 어른들 이야기라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 같았다. 손님이 가시고 나서 부엌에 그 검은 봉지가 놓여 있었다. 무슨 선물을 검은 봉다리에 싸서 가져 오나 싶었었다.

 

하도 궁금하여 들쳐 보았더니 신문지에 돌돌 말린 물체가 있었다. 신문지를 조심스레 풀어 제쳤다. 핏물이 뭍어 나온다. 돼지고기를 받아 오셨다고 생각했다. 그 날 저녘  고기국을  먹었다. 돼지 김치찌게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참 맛있게 밥 두공기나 먹었다. 밥 먹고 텔레비젼을 보는데 반근이 생각이 나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반근이는 언제 데려 온데?"


엄마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데려와야 되지 않냐고 묻는데 설걷이 해야 한다고 엄마는 부엌으로 가셨다. 


몇일이 지나고 엄마와 아빠는 계모임을 다녀 오셨다. 나는 밖에서 얼마나 신나게 놀았던지 작은 방에 안자고 안 방에서 텔레비젼을 보다가 잠이 들었었다. 잠결에 엄마와 아빠가 반근이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집 주인이 떠나고 온 동네를 뛰어 다녔다고 한다.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동네의 닭을 잡아 먹고 다른 개밥 다 털어 먹었단다. 심지어 동네 어르신 팔을 물어서 어쩔 수 없이 동네 어른들이 잡기로 결정을 했다고 한다. 도망치다 학교 담장 대신 심어져 있던 탱자나무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몸이 끼어 옴싹달싹 못하고 도치로 머리를 맞았다. 탱자나무 가시에 몸이 걸려 못 나갔을 것이다.  시골 학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먹고 남은걸 가져 왔다고 했다. 


오바이트가 나왔다. 자다가 왝왝 거리는 아들을 엄마는 깨워서 등을 두들겨 주셨다. 악몽을 꾸었냐고 물어보신다. 대답을 못했다. 눈물이 나오고 배가 오그라들며 쪼여 왔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지는 느낌이었다. 귀 옆에 눈이 쏟아지고 바람이 공간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다리에 몸을 비벼대는 반근이가 있는듯해서 머리속이 웅웅거리고 있었다. 참 많이 아팠다. 아빠는 물을 떠다가 내게 먹였다. 잠시 정신을 차린 나는 힘없이 작은 방으로 가서 동생들 사이에 누었다. 잠은 오지 않았고 창문은 흔들리고 있었다. 눈을 뜨고 바라본 천장은 희끗 희끗거렸다. 하얀 운동장 발자국이 나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 

눈이 참 많이도 내린다. 가물거리던 기억의 언저리를 심히도 건든다. 기억나지 않아도 될 사연이 쏟아지고 있었다. 먹먹해지는 마음에 하늘을 한 번 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귀를 막았다가 뭐하는 짓이야 하고 손을 내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