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게 미래를 묻는다. 그렇게 살아 왔다. 어쩌면 또 그렇게 살아간다.

 

빚이 있고,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산재해 있으며, 앞에 보이는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 두려움에게 미래를 묻는다뇌졸중이나 뇌출혈 혹은 기타 뇌 손상을 입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한다. 지나온 과거를 담은 뇌세포는 산산이 조각이 나있고 앞으로 맞이할 시간을 점검할 뇌세포 또한 그렇게 갈 길을 잃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치료하고 살고 있다.

 

그 사람들 중에 웃음을 누가 먼저 차지하는가를 관찰하고 있다. 누가 먼저 미소를 입가에 머물게 할 것인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먼저 차지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긍정의 뇌를 쓴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뇌과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내가 뇌졸중에 걸리다니 얼마나 행운인가라고 말이다자신의 질환을 통해 뇌가 가지는 현상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두고 몇몇의 사람은 반대를 하고 몇몇의 사람은 희망을 얻는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그 경험이 내게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보가 부족할수록 두려움에게 미래를 묻는다. 조금의 지식으로 미래를 묻는 순간 정하지 않았고 정해지지 않은 시간은 공허함으로 물든 두려움을 전달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지식과 대처법을 간직한 사람만이 준비된 시간과 여유를 선물 받는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맞이하는 뇌졸중과 그 후에 입가에 머무는 미소는 단지 그들이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어떤 어르신들은 여전히 굳은 얼굴과 참담한 표정을 간직한다.

 

우리의 뇌가 하는 일은 행동을 예측하는데 있다. 호모 사피언스의 뇌는 기억을 간직함으로써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영원히 그 간직한 기억이 만든 예측에 묶이는 천형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두려움에게 미래를 묻는 행위가 된다인생은 미래에 도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 도전은 두려움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언어를 만들고 글로 전하여 문화를 만든 것은 기껏해야 5,000년 남짓이다. 많이 쳐봐야 2만년이다. 신생대가 시작하는 6500만년의 기구한 시간은 살아남기 위해 뇌를 써왔다.

 

말을 못하고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여전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 뻔히 알 수 있다. 편도체에게 기억을 묻고 살고 있다. 사람이 싫고 좋고도, 장소를 갈지 말지도, 음식을 먹을지 말지 조차도 묻는다. 편도체에게 묻지 않고 인간은 살 수 없다.

 

정보가 없으면 없을수록 자신 안에 편도체에게 묻는다. 스무 살의 뇌졸중을 앓고 있는 청년은 한 없이 자기 안에 두려움에 묻는다. 그러면 그 젊은 뇌는 인생은 끝이라고 말한다. 팔은 안 움직이고 결혼을 하기에는 받아주는 사람을 없을 것이고, 직장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한다. 절망이 감돈다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은 두려움에게 묻지 않는다. 경험과 지식과 세월이 거쳐 온 몸이 기억한 기억에게 묻는다. 그런 날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말이다.

 

정보가 부족하면 두려움에 묻는다. 정보가 많아지면 현실을 보게 한다. 그 현실에서 내가 나아갈 방향이 선점된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가 늘어나고 선택의 결과를 예측하는 순간 그는 예언가가 되어 미래를 희망이라 발음한다. 더 팽창된 정보와 해석된 현상은 미래를 또한 현실이며 기억이라 발음한다.

 

나는 시간이 그렇게 접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라보는 현실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라 작위적 해석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과의 만남은 당구공의 부딪침과 다르지 않음이 있다. 한 번의 부딪침으로 알 수 있는 그런 만남과 관계는 다음을 예측할 수 없다.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신의 글에서 호랑이를 언급하였다.

 

만약 호랑이라고 말하면 그를 낳은 호랑이들, 그가 삼켜버린 사슴들과 거북이들, 사슴들이 뜯어먹는 목초의 어머니인 대지... 이 전체를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모이고 정보가 지식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성으로 이어진다.

 

성급한 정보는 성급한 미래를 낳는다. 어설픈 희망보다 괴로운 건 없다. 자연은 여전히 인간의 크기보다 소스라치게 크고 멀며 닿지 않는 영역이다. 나이를 먹는다고 하지 않고 언제가부터 그 나이의 내가 나를 기다린다고 말한다한 살의 나이를 먹었고 한 살 먹은 내가 나를 기다려 맞이하고 있다. 얼마나 기쁜일인가 나를 기다린 나를 기쁘게 맞이하려 한다.

 

 

 

  

2015년 나를 기다린 나에게 반갑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