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산에 왔다. 지금 부산역 인근이다. 박문호 박사님의 강의가 양산에서 있었는데, 이를 듣고자 부산까지 온 것이다. 이날 강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여 내일 올리고자 한다.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오늘 부산으로 오면서 마침 숄다렐라님과 정희님하고 같은 기차 좌석을 앉았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배운 뇌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정희님은 명상을 하면서 그에 수반되었던 효용을 이야기하였을 때, 숄다렐라님이 어느 일본학자가 쓴 생각비우기라는 책의 내용을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다. 마침 중간에 이야기가 끊겨 그에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지만, 뇌과학을 공부하면서 생각비우기를 대비시켜볼 수 있어서 더욱 깊이 생각에 남는다.

 

이는 오래 잔상이 남는다. 지금 간단히 정리하면 이런 거다. 생각비우기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는가.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생각을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뇌과학을 공부하면서 제법 유추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기가 애매하다. 그럴수록 더욱이 생각이라는 것도 애매해진다.

 

먼저 이에 대해 미끼를 던져본다. 무엇보다도 나는 다른 무엇과 대비할 때만 생성되는 존재인 것 같다. 비교되지 않으면 구별될 나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다른 무엇과 구별되지 않고 있는 상태는 초월한 상태, 혹은 합일한 상태일 것이다. 구별될 때만 우리는 무엇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나, 혹은 더 나아가 더 세분화될 수 있는 나가 될 것이다. 비교될 무엇만 있다면 그 세분함은 무한하게도 말이다.

 

이제 시각을 돌려보자. 또 하나 생각해본다. 지금도 법정 스님의 여운이 길다. 그래서인지 법정스님의 비우기가 느닷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는 이승을 떠났지만 우리에게서 아직까지 떠난 것은 아닌 듯하다. 예전에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젊은 시절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매우 강단있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깡마른 걍팍한 모습이었지만 문필로 장안이 지가를 높인 이라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글들의 관통점은 비우기다. 하나 그때는 그 비우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절실히 느끼기 보다는 그의 책은 이렇구나, 이런 글들이 있구나 라는 정도의 생각에 그쳤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1 그의 글이 매우 명료하다. 2 쉽게 읽힌다. 3 주제가 명료하다. 4 깊은 교훈이 느껴진다. 5. 물론 일반인들의 삶과 괴리가 있을 수 있겠구다 등등이 그것이다.

 

  글은 쉽게 동감할 수 있었다. 좋았다. 너무 쉽게 읽혀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물론 그의 삶을 그렇게도 따라서 살아가고 싶었지만, 그리 될 수 없다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지금도 그 아쉬움이 틈날 때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온다. 다행히 이젠 그의 비우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다 깊게 느낄 수 있어 위안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법정의 비우기는 그나마 그동안 우리네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비우기였던 것 같다.

 

이제 -137억년의 좌표이동을 생각해보자. 이는 자유로운 좌표이동이 가능함을 말한다. 공간상으로 무한히 축소하거나 확대할 수 있는 유연함이며, 또한 시간상으로 무한한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법정의 비우기와 조우한다. 아마도 법정은 시공간상의 좌표이동에 능숙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는 속박을 주는 그래서 참을 수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훌훌 떠나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느 재물과 직위에도 말이다. 좌표이동을 하는 것도 유사한 의미를 던진다. 거시로 좌표이동을 자유로이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을 쉬이 던져버릴 수가 있겠고, 미시로 자유로이 가면 갈수록 모든 것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경이로운 자세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이런 자유로운 좌표이동은 자신과 만유에의 집착을 쉬이 던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비우기와 자재로움을 그의 주변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몇몇 스님네들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욱 탐착에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말이다. 물론 이는 그들을 탓하려 하기보다는, 그만큼 비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법정은 그의 온 삶을 이를 실천하려고 살았던 듯이 보인다. 오직 비우기라는 화두를 가지고 말이다.

 

 

아마 부처는 비우기의 달인일 것이다. 경전을 보면 억 겁년, 수미산, 갠지스강의 모래알 숫자 등등의 표현을 쓴다. 이것이 과장법이 아니라면 그야말로 그 시간과 공간의 자유로운 좌표설정이 능숙하였기에 그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매우 자유로왔던 것이다. 정신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말이다. 그의 말 한마디마디가 보배였던 것을 생각해보라.  

 

이제 저번에 언급한 시공 상의 좌표를 자유로이 할 수 있다면, 즉 우리네의 뇌세포가 그렇게 연결가능하다면, 우리는 주변의 사람과 사물들 즉 만유에 대해 관계를 적절히 맺을 수 있으며, 또 그와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부스럼의 비우기도 능숙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함만이 아니라 이런 좌표이동의 숙달을 한다면 법정의비우기에 보다 쉬이 들어가리라 생각해본다.  

 

뇌가 뇌일 수 있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무한히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또 하나의 속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뇌를 잘 사용하든 그렇지 아니하든 결코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것은 운명이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지 말이다.

그런데 비우기야말로 이 속박을 벗어던지는 순간이 아닐까. 뇌의 기본 속성인 자기구속성을 뇌가 허무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 자유로운 나래를 펴고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닌, 즉 자기로 되게 하는 그런 지평을 여는 것이 아닐까.  

 

내일 아침 숄다렐라님에게 생각비우기가 무엇인지를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