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글벙글 지역에서 서호주 학습탐사 시작 이후로 모처럼 만에 4시간 정도 자유로운 개인시간이 주어졌다.

탐사대원들 나름대로 황금 같은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헬기를 타고 36억년 생명의 역사를 담은 원시대지를 하늘에서 내려 본 뒤라, 나는 곧바로 벙글벙글 지역으로 혼자 트레킹에 나섰다. 뜨거운 햇빛아래 홀로 나섰던 것은 지구와 생명역사의 원형들과 침묵 속에서 대화를 하기 위함이다. 아무래도 사람과의 동행은 원형들과의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할 염려가 있어서였다.

 

송홧가루처럼 고운 흙먼지가 뒤덮인 비포장길을 따라서 한 시간을 걷다가 길 없는 대지로 무작정 걸어 들어갔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텅 빈 길 위에서마저 순수한 원형들과의 대화는 불가능함을 느꼈고, 자꾸만 원시대지 저편의 공간이 나를 불러들여 초대하는 듯 했다.

 

원시대지로 걸어 들어가자 존재의 원형들과 침묵의 대화를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마음상태가 두 개로 분리되었다. 하나는 일상의 지각과 행동을 하는 마음의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일상적인 지각과 행동을 하는 마음을 관찰하는 상위인지작용을 가동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곳은 먼지마저도 없는 대지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있었고, 드문드문 유칼립투스 나무가 어우러진 고운 풀밭처럼 보이지만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밀랍으로 두껍게 무장한 채 가시로 뒤 덮인 억센 풀들이 그 대지 속에 얕은 뿌리를 박고 살아가고 있었다. 동물이래야 개미와 새와 뱀 정도만 눈에 띄었을 뿐이고 새소리만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벙글벙글 지역의 잡목 숲 속을 한 시간 정도 걸어 들어갔더니 어느 순간 사방이 똑같아 보이며 방향감각이 상실되는 느낌이 들었다. 일순간 아찔해지며 드디어 46억년 역사의 원형의 대지가 제대로 나를 초대했다는 설레는 기분이 들었고, 존재의 원형들과 근원에 관한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가벼운 흥분마저 일었다. 그래서 더욱 내가 이 곳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갖는지 예민하게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행동과 생각 하나하나를 세심히 관찰하자, 놀라운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감정, 기억, 생각과 언어가 하나의 근원적인 작용의 다양한 현상일거라는 놀라운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즉 감정이라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작용이 뇌 작용의 다른 과정이라고 여겨지는 기억과 생각과 언어라는 현상의 기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현상들은 인간이 본능적인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행동을 하기 위한 뇌의 구조적 기능적 유전자적인 운명에 속박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처음 인간의 발걸음을 받아들인 이 공간에는 어느 것 하나 특징 지워진 사물이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차이가 없이 반복되는 나무와 풀과 바위에서 지나온 길을 기억할 수 없음은 물론 어느 사물 하나 존재자체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인간이 지각을 하기 위해서는 차이가 있는 외부정보가 필수적이고, 그 차이에 관한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는 메커니즘이 느껴졌다.

이곳처럼 차이가 없는 공간에서 지나온 길을 애써 찾으려 할 때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관찰해보았다. 나는 차이가 없는 공간과 시간을 기억하기 위하여 나도 모르게 무의식상태에서 원형의 대지 위의 사물들에게 내면에서 올라오는 본능적인 감정을 뿌리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고, 지나오며 흩뿌린 감정들을 기억이라는 형태로 무의식적으로 저장하고 있었으며, 이제 다시 그 감정의 파편을 기억 속에 꺼내어 지나온 생존의 길을 찾고 있었다.

 

차이가 있는 외부정보에 감정이 붙여진 지각만이 기억을 만든다.

 

단순히 무수히 많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사물은 기억 속에 감정이라는 실마리로 기억되었다. 나는 순수하게 사물의 존재자체를 인지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사물에 붙여진 감정을 기억해내어 사물을 기억하였다.

 

인간은 외부의 사물에 감정을 흩뿌려서 감정에 물든 사물을 생존을 위한 정보로 기억하며, 단순한 외부의 감각적 자극에 단순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미묘한 감정을 무수히 많은 단계로 구분하여 무한대에 가까운 사물을 기억하는 게 가능하였고,  소리 주파수의 미묘한 차이에 감정을 붙인 언어를 기억의 도구로 삼아서 생존에 의미 있는 기억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게 가능하였으리라고 추측했다.

 

사회적 소통을 통하여 내면에서 비롯된 본능적이고 근본적인 감정의 무수한 축적이 소리와 결합되어 추상화 개념화 의미화 된 것이 언어고 생각이었다.

 

인간이 언어를 기억함에 있어서도 역시 사물에 감정을 붙여 기억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을 적용한다고 생각되었다. 즉 언어도 사물처럼 공간에 존재하는 소리의 주파수의 미묘한 차이에 인간의 내면에서 올라온 감정을 부여하였고, 감정에 물들고 의미에 물든 소리만이 언어라는 형태로 기억될 뿐이었다.

  

무수히 많고 다양한 주파수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정교한 성대라는 조직의 출현이야말로 인간의 생존과 문화와 문명 기타 모든 것을 결정지은 운명의 유전학적 이벤트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외부의 무한대에 가까운 사물과 현상의 정보를 인간의 작은 뇌가 다 기억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해서 외부 대상의 차이를 기준으로 불변표상을 만들고, 생존에 필요한 감정을 곁들여 기억과 생각을 하여 행동의 도구로 이용하는 게 인간현상이었다.

 

결론적으로 몸의 감각입력, 감정, 행동의 세가지 프로세스가 인간현상의 근본적 뼈대였고,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면서 감정과 감정에 물든 사물과 현상을 의미화된 소리와 몸짓인 언어와 제스처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표현하고 의사소통을 하면서 생존에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것보다 유전자적 물질적 구조적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자연에 차이없이 반복해 존재하는 무한한 사물들과 현상들을 인간의 뇌 속에 기억하기 위하여 몸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는 무한대의 세세한 명찰을 만들어 냈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이 기억된 감정을 소통하기 위하여 언어라는 무한대의 표현이 가능한 도구를 개발하여 오늘날 인간의 길을 완성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 발달된 무수히 많은 정교한 언어와 개념과 의미들 역시 기원은 인간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기원이며, 감정이 물들지 않은 언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감정의 흔적에서 동떨어진 추상적인 단어나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를 사람들이 기억하기 힘든 원인은 빠른 시간에 추상화된 단어에서 곧바로 감정을 불러내기가 쉽지 않아서 일 것이다. 감정에서 멀어진 추상화, 개념화, 의미화된 언어에서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감정의 흔적을 찾아내어 반복 학습하여 새로운 시냅스가 자라도록 하여야만 장기기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감정에서 너무 멀어진 추상적 단어와 언어를 기억하기 어렵고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만 장기기억할 수 있고, 한편으로 감동이나 감정적 충격을 받은 기억은 반복하지 않아도 장기기억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기억의 근원이 감정이라는 점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에릭켄달과 리즈만의 기억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장기 기억하는 것은 감동이나 감정적인 충격을 받거나 4회 이상 반복 학습하여 새로운 시냅스가 자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결국 몸으로부터 내면에서 올라온 감정과 제대로 합일된 사물과 현상만이 인간의 장기 기억 속에 저장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감정이 결여된 단순반복은 장기 기억되지 않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예견해 보았다. 학습의 반복은 미세한 감정을 증폭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장기 기억하는 것은 신경전달물질들의 작용으로 새로운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단백질이 새로운 뇌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런 결과가 유전자로 전해져 오늘날 더욱 세분화되고 발달된 언어를 통한 문명과 문화를 이룬 인간현상이 생겨났다고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개체단위의 형질유전보다는 세포단위 혹은 물질단위의 유전현상을 바라보는 게 보다 더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것 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생명의 유전현상이 무언지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며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원래 자연에서 행하던 감정을 뿌리는 습관대로 역시 타인에게 감정을 뿌려서 그걸 통해서 상대방을 기억한다고 생각되며, 그래서 감정이 이성에 앞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 인간은 각자 다른 유전자가 시공상에서 발현된 다른 몸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몸에서 비롯된 다른 감정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해 기억되는 외부정보와 시공의 경험이 달라서 각자가 기억속에 만든 다른 세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똑 같은 유전자를 지닌 쌍둥이 일지라도 매 순간 각자의 시공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세계가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거다인간으로서 너와 내가 다름은 기억된 정보가 달라서이다각자가 틀린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논쟁과 설득과 협상과 대화를 할 때 나의 추상적논리적의미적 세계를 주장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내가 경험한 시공과 나에게 감정이 의미화된 세계를 공감하도록 체험의 기회를 마련함이 보다 효과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결국 자연의 외부 사물과 물리적 현상은 원래대로 존재하는데 인간이 감각, 지각, 감정과 의미부여, 기억, 생각, 행동하는 뇌의 구조적 기능적 특질로 인하여 인간의 뇌가 인지하고 기억하고 감정과 의미를 부여한 대상으로만 우리의 뇌 속에 기억되고 이 같이 기억된 대상만이 인간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걸 알았다.

 

몸에서 비롯된 내면의 감정이 인간현상의 핵심적인 근원에 속하고 기억과 생각과 언어는 감정의 변화된 현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벙글벙글 지역의 공간과 대지에는 46억 년 동안 생명과 그 원형들이 존재해왔지만 내가 발을 디딘 후에야 나의 세계로 편입되었다. 이게 인간이 인지하는 세계의 매커니즘이다.  

 

참으로 위대한 공간이었다. 그 곳에 서있다는 사실로도 모든 것의 기원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그 곳에 있었기에 실험실의 연구결과가 아니고 책 속의 지식이 아닌 주의와 관찰을 통한 체험에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서호주의 빈 공간이 주는 깨달음이 이 정도인데, 우주의 텅 빈 공간에 서 보면 모든 물질과 현상의 세계가 무언지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이미 나의 마음은 밤하늘 우주공간을 향해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오는 것이 기다려졌다.

 

나는 하루하루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라는 무형의 시공속 존재를 통하여 나의 뇌가 인지하고 창조하는 세계를 소립자의 세계부터 우주 저 너머까지로 확장하고 편입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