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천뇌 발표 때는 사계절 별자리가 첨부자료로 딸려 왔습니다. 별 이름과 자리를 어찌 읽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여기저기 찾아보고 여러 번 반복해 그려보니 얼추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6월 천뇌 발표는 첨부 파일이 없이 발표할 내용의 제목만 떠 있더군요. ‘별의 질량별 진화 과정과 핵융합’. 강의 중 별에 대해 공부했고 핵융합 얘기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똑같은 제목으로 필기된 내용이 없었기에 막막하고 불안해져서 김현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발표 부분을 못 찾겠으니  솔다렐라님의 노트에서 콕 찍어서 얘기해 달라고 부탁 드렸습니다. 나중에 보니 제 공책에도 고대로 그려져 있더군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상황이란 이런 겁니다. 오랜 시간 민망해하거나 실망하고 자탄할 여력조차 없으니 한 번 웃고 얼른 복습을 시작합니다. 목표는 발표부분의 동영상을 반복해서 5번 보고 주어진 도표를 50번 그려보는 걸로 정했습니다. 강의를 4번 들으면서 부족한 내용을 보충 필기 하고 연습장에 26번을 그리자 감이 옵니다. 아주 흡족한 것은 아니지만 발표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복습도 되고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나도 해보고 싶다'는 각오와 격려도 덤으로 얻습니다.


  발표를 마치고 일주일 뒤에도 연습장을 가방에 넣어 다니고 종종 꺼내 보았습니다. 애써 공부한 것이 아스라히 사라질까 아쉬워서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기억으로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처음으로 수첩을 꺼내 정성껏 옮겨 두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신나게 별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말 고사 즈음하여 고1 남학생 한 명이 풀 죽은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학교에 국어 선생님을 참 좋아한답니다. 명문대 출신의 아리따운 아가씨 선생님인데 수업도 똑 부러지게 잘해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남학생들이 많답니다. 그래서 이 녀석은 국어 부장을 자진해서 심부름도 열심히 하고 수업 시간마다 집중 했는데, 국어 선생님이 결국 자기보다 성적이 한참 높은 반장한테 훨씬 친절하게 대하더라고, 사람을 점수만 가지고 평가할 수 있냐고 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저는 개그 콘서트 대본 쓰냐 하며 웃음이 나왔지만 이 학생이 학교 풍토에 대해서까지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에요. 그래서 저도 진지하게 별 이야기로 답해 주었습니다.


  공부해 보니 세상에는 별별 별이 다 있고 개성이 넘치더라. 별의 질량과 밀도가 태양보다 너무 작아서 0.08배에도 못 미치면 왜성으로 남게 되고, 태양 정도의 질량이면 수소 핵융합과 헬륨 핵융합을 거쳐서 100억 년이나 빛을 내어 생명을 보살피다가 마지막엔 다이아몬드처럼 축퇴되어서 우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훌륭하지. 근데 태양보다 10배의 질량을 가진 별은 수소와 헬륨 핵융합 뿐 아니라 카본, 산소, 실리콘 등 5번의 핵융합 과정을 거쳐서 철이 광분해되는 영역에 이르게 되고 한 낮에도 빛나는 슈퍼노바가 되는거야. 초신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별은 태양처럼 축퇴되어 자기만 고요히 빛나는 것과 또 다른 방식으로 자기 주기의 마지막을 맞이해. 거대한 폭발로 우주를 장식하고 세상의 온갖 물질을 만들어내는 창조주의 역할을 한단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도 그 덕에 만들어졌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태워 빛을 내는 힘겨운 핵융합의 과정을 두루 거친 별만이 누리는 운명이야. 숭고하지. 근데 태양의 100배쯤 되는 큰 별은 너무 빨리 타오르다가 결국은 이상한 쌍생성 영역에 들어가서 붕괴되고 말더라.

 

  나는 태양계에 사는 사람 각자가 작은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나한테 주어진 에너지를 최대한 성실하게 쓰고 누리며 고요하고 아름답게 최후를 맞고 싶다. 그런데 너는 슈퍼노바였으면 좋겠다. 나는 중년이라 질량이 어느 정도 정해져 버린 생이지만, 10대인 너는 꿈꾸는 만큼 키워 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태양 10배 만큼이나 질량과 밀도를 키워서 너의 우주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내가 지켜 본 너는 정의롭고 선한 사람이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살면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네가 큰 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담대하게 받아들여봐라. 다만 이것저것 너무 기웃거리며 너무 허황된 욕심으로 생활에 안정성을 잃고 이상한 쌍생성 영역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라. 자 공부하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앵무새처럼 조금 공부한 지식으로 얼마나 신나게 이런 얘기를 했던지 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녀석은 교실에서 나갈 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법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합니다. 예쁜 국어 선생님한테 받은 상처를 조금 덜 예쁜 국어 선생한테서 위로받고, 또 아름다운 별들에게서 격려 받았을 겁니다.


* 69차 천뇌 발표 공지를 보았습니다. 분자식 여섯 개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강의 중 졸지도 않았는데 제 공책엔 그 내용이 없네요. 역시나 못 찾는 거죠. 솔다님의 노트도 찾아보고 네이버에 검색도 해 보지만 답이 안 나옵니다. 지난번과 같은 방법을 씁니다. 김현미 선생님한테 아침에 도착하게끔 예약 문자를 넣습니다. “선생님, 발표 때마다 이러하기 염치 없사오나 이번에도 발표 내용을 몬 찾겠어요.” 박사님은 이번 발표 내용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니 공부 하다가 모르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하셨지만, 이런 내용으로 전화하면 거 뭐랄까, 이건 뭐, 참. 허허~